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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75화 (75/78)

< 75. 이한이 믿는 것 >

75. 이한이 믿는 것

독지(獨指) 그리고 신편(神鞭).

그래서 독지신편(獨指神鞭).

당도백의 무공이고 별호였다.

그것은 당도백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양심법은 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심법이었다.

물론 당문에는 삼양심법 말고도 신공이라고 부를 만한 내공심법이 여럿 있다.

자격을 따져 전수한다지만, 당문의 가주쯤 되면 내용을 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당도백은 당문의 가주가 되면서 오직 가주만이 볼 수 있다는 비전을 전달받기도 했다.

가문 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을 익혀본 적도 있다.

하나같이 세상에 나가면 피를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무공이었다.

그러나 어떤 무공을 익힐 것인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신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익힌다고 해서 꼭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삼류 무림인은 있어도 삼류 무공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무공은 각기 나름대로의 오의를 담고 있어서 깨우치기만 하면 결국에는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무림에는 시장에서 동전 몇 푼 주고 산 삼재검법으로 검의 끝을 봤다는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건강을 위한 기본적인 토납법으로 등선을 했다는 사람에 대한 경험담이 나오기도 한다.

당도백 역시 그런 무림의 전설같은 이야기에 공감하는 편이었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때는 절세의 신공이라고 떠받들며 자격을 갖춰야 열람이라도 할 수 있는 가문의 무공에 집중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자신에게 맞는 무공이 가장 좋은 무공이라는 말처럼 결국은 삼양심법으로 돌아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렇게 평생을 삼양심법과 함께 살아온 당도백에게 이한의 도발은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어디서 삼양심법을 훔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삼양심법의 특징을 뻔히 보이는 무공을 시전하면서 시치미를 떼다니!

이것은 조롱이었다.

가문에서도 쫓겨나게 된 네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비웃음이었다.

한 때는 당문의 가주로 만인의 두려움과 우러름을 받던 당도백이었다.

지금 당장은 가문에서 밀려날 위기에 있다고 해도 그가 가졌던 평소의 태도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어이없는 도발을 받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그냥 넘어간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당도백은 그답게, 그리고 당문의 가주답게 행동했다.

불경한 자를 직접 징치하기로 한 것이다.

당도백은 순식간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경맥을 타고 올라온 독기운이 눈까지 영향을 끼쳐서 눈이 검게 변했다.

삼양심법 특유의 표식이었다.

독을 암기처럼 발사하기 위해 손으로 몰아넣다 보니 눈까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삼양심법을 접해본 사람들은 당도백의 눈이 검게 변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서 고개를 조아리곤 했다.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순간 독에 중독되어 죽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도백의 별호에 독지, 즉 독손가락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였다.

당도백은 예고도 없이 독기를 지법으로 쏘았다.

전갈의 꼬리, 뱀의 독낭, 두꺼비의 껍질에서 채취한 독을 함께 연단해서 만든 독을 먹으며 쌓아 올린 독기였다.

원래의 재료들도 위험한 독이었지만, 연단한 후의 독은 더 지독해진다.

단 한 방울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죽일만한 위력을 가진 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경력에 실려 쏘아진 독기가 얼마나 위험할지는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실 이것은 당도백과 이한이 대치한 순간 모두가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독공을 수련했음이 분명한 이한이 당도백의 독에서 얼마나 잘 버티어낼지가 모두의 궁금함이었다.

그리고 이한은 모두의 궁금함에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휘저어 경력을 파훼한 것이다.

몇 개는 슬쩍 건드려서 방향을 비틀어 버렸고, 몇 개는 손으로 받아내서 아예 소멸시켜 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허공을 휘젓는 이한의 손놀림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당도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도백은 자신이 쏘아낸 경력을 해소하는 이한 때문에 처음의 분노를 잊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시건방을 떨며 도발하던 젊은 놈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경력을 저렇게 간단히 해소하다니!

경력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다루는 것은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원래 지법이나 격공장을 통해 발산되는 경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피하거나 막는 것은 오직 느낌만으로 해야 한다.

무공이 뛰어나거나 감각이 좋은 사람일수록 좀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한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한은 경력이 날아오는 모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

열을 시각화하는 열화상카메라로 빛이 없는 곳에서도 생명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이한은 두 눈으로 경력, 즉 내공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나노가 제공하는 다양한 여러 시야 모드 중 하나였다.

열화상카메라처럼 복잡하고 정밀한 기계는 필요 없었다.

두 눈과 두뇌만 있으면 된다.

물론 효율을 위해 기관에 입사할 때 약간의 시술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약간의 시술’에 지나지 않았다.

나노머신 생산 모듈을 뼈에 박아넣는 것처럼 말이다.

이한이 보는 시야에서 손가락에서 쏘아지는 경력은 탄환과 비슷했다.

속도만 상대적으로 조금 느릴 뿐, 크기나 궤적은 권총탄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익숙한 느낌이었다.

당도백은 이한의 태도가 여유롭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무리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저렇게 여유가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전장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공포인 무공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당도백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지금이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당도백의 ‘독지’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것은 지법의 위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법을 통해 구사하는 독공이야말로 두려움의 진정한 원인이었다.

원래 독기운이 실린 경력은 파훼를 하는 것이 아니다.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건드리는 것만으로 중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독공의 무서운 점이었다.

독공을 처음 접하는 자들은 평소처럼 지법을 막거나 파훼하려다가 독에 중독되곤 했다.

그러나 이한은 대놓고 당도백의 경력을 파훼하고 있었다.

중독 따위는 전혀 무섭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검게 변한 손,

검게 변한 눈.

이한은 자신이 독공을 익혔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당문의 독공을 말이다.

하지만 독공을 익혔다고 해서 반드시 독에 면역인 것은 아니다.

세상에 있는 독의 종류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도백은 자신의 독공이 이한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그렇다면 독공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상대해야 했다.

다행히 당도백은 독공만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별호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가 신편이다.

당도백은 채찍질도 독공 못지않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채찍질을 잘했던지 별호에 신(神)이라는 글자 붙을 정도였다.

위력도 대단해서 그의 내공이 실린 채찍질은 바위를 부수고, 사람도 부쉈다.

이장이 넘는 채찍이 당도백의 허리에서 풀려나와 이한을 노리고 꿈틀거렸다.

가짜 도사의 일행을 조각낸 채찍이었다.

아직 전투 후의 정비를 하지 못해서인지 채찍에는 말라붙은 피가 선명했다.

채찍은 기형병기에 해당한다.

배우기도 어렵고, 잘 쓰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특출나게 유리한 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명확한 것이 기형병기의 숙명이었다.

그런데 당도백은 채찍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은 숨기는 것에 능란했다.

채찍에게 유리한 것은 거리, 불리한 것도 거리였다.

당도백은 한 손에는 채찍을, 다른 손에는 암기를 잡고 채찍에게 유리한 거리를 지켜냈다.

이한은 그런 당도백을 상대로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독이 아니라 순수한 무공으로 당도백을 상대하게 되니 잠시 동안 가졌던 유리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신 경험과 재능을 무기로 삼는 전장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곳에서 이한은 당도백이 절정의 경지를 벗어난 존재임은 체감해야 했다.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채찍이 당도백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채찍이 별개의 두뇌를 가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예측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한은 자신의 머리를 노린 채찍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채찍은 자신의 뺨을 핥듯이 지나갔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채찍에 휘말려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고막을 찢어놓을 것 같은 파공성도 귀를 찔렀다.

피가 썩는 것 같은 불쾌한 냄새도 함께였다.

냄새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채찍의 끝이 점점이 이한을 찍어 왔다.

마치 펜싱칼로 연달아 찔러오는 것 같았다.

몸통에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는 악의가 느껴지는 수법이었다.

이한은 무거운 경력이 실린 채찍의 끝을 일일이 주먹으로 쳐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눈으로 따라가기도 버거울 정도의 빠름이었지만, 나노가 호르몬을 잔뜩 부어 넣은 이한의 몸은 조금 전과는 또 다른 상태였다.

생각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도백과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었다.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면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다가 끝나리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 몇 발짝을 좁히지 못했다.

“웃!”

암기 때문이었다.

이한은 자신의 뒤통수를 노린 암기를 간신히 피해냈다.

혈화접.

나비를 닮은 암기였다.

움직이는 모습도 나비를 닮아서 비틀비틀 이한의 주변을 맴돌았다.

당도백이 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은 고수라고 하더니 이런 곳에서 실력이 드러났다.

아무리 혈화접이 공기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암기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계속 이한의 주변의 떠도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것은 당도백이 슬쩍슬쩍 경력으로 혈화접을 건드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한의 시야에 혈화접과 당도백이 연결된 끈 같은 것이 보였다.

이미 몇 차례 던진 암기는 일회성이었지만, 혈화접은 아니었다.

혈화접은 꾸준히 이한의 뒤통수를 노리며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평상시보다 과하게 상태를 끌어올린 신체가 조만간 부작용을 호소할 것이고, 내공 역시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믿을 것은 이한이 독정을 만들면서 만들어낸 특별한 독과 나노가 준비한 나노머신뿐이었다.

아무리 독공을 익혔다고 해도 모든 독에 면역은 아니라고 했던가?

그것은 당도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노머신.

안개처럼 퍼져나간 나노머신의 영역에 드디어 당도백이 들어왔다.

외부로 확산된 나노머신이 당도백을 둘러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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