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마지막으로 남은 자. >
76. 마지막으로 남은 자.
나노가 만들어서 외부에 뿌린 나노머신은 자체적인 추진 기관이 없는 종류였다.
마치 미세한 안개 입자처럼 공기 중에 둥둥 뜬 채 기류에 떠밀려 다닐 뿐이다.
수행할 수 있는 기능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나노로부터 3장 이상 떨어지면 작동을 멈추고, 그 상태로 일각이 지나면 파괴 프로토콜을 시작한다
나노가 이렇게 단순한 나노머신의 만들어 낸 이유는 간단했다.
적당한 재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한의 단전을 만들기 위해 단탈로늄 희토류 복합체가 필요했던 것처럼 나노머신에 추진체를 덧붙이기 위해서는 변형된 악티늄 계열의 중금속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단백질뿐이었다.
인체 내부에서 간단한 기능을 수행하는 나노머신을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그래서 나노는 불가능한 것에 미련을 가지기보다는 가능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지금의 나노머신이었다.
그리고 나노가 전력을 기울여 만들어 낸 멍텅구리 나노머신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한에게서 조달할 수 있는 단백질 분량으로는 몇 군데 덫을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당도백이 덫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걸려들었습니다! 이제 당도백의 목숨은 이한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나노는 자신이 쳐둔 덫에 당도백이 걸리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나노와 같이 인공지능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은 여러 가지 제약이 걸려 있다.
특히, 누가 명령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부분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금기나 다름없었다.
반면에 감정적인 상호작용은 오히려 장려하는 편이었다.
만들어진 인격이라고 해도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감정적인 상호작용은 스트레스를 막기 위한 좋은 방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한의 명령에 복종할 때는 인간이 아닌 티가 좀 났지만, 이렇게 감정을 표현할 때는 인간과 별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한은 나노의 인간적인 기쁨에 동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슬슬 간을 보며 이한의 뒤통수를 노리던 혈화접이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혈화접이 한 개였을 때는 그래도 대응이 가능했는데 두 개가 되니 상대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도백의 팔이 두 개, 혈화접도 두 개.
네 개의 팔과 싸우는 셈이었다.
이래서는 이대일로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같이 온 당문 사람들은 둘의 싸움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당문의 가주였으니 직접 손을 대기가 좀 그렇다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외부인이면서도 뭔가 수상한 점이 있는 어사대의 어사판관을 다른 이의 손을 빌려서 제거하고 싶다는 것인지.
이한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서 따져 물을 상황도 아니었다.
숨돌릴 틈도 없었다.
이한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도백이 덫에 걸려들었으니 덫이 작동할 만한 시간만 확보할 수 있다면 이한이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실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당문의 사람들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이한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자신들이 직접 손을 댈 정도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당장이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했다.
날카롭게 찔러오는 채찍의 끝부분을 다시 한번 쳐내는 순간, 이번에는 두 개의 활화접이 뒤쪽에서 달려들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듯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이한의 목을 노리는 혈화접에 이한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굴렀다.
도저히 피할 수 있는 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는 것은 고사하고 피할 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채찍과 혈화접은 둘 다 너무 변화가 심한 무기였다.
막으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혈화접의 움직임이 변할 정도였으니 피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든 일단은 공격을 피해야 했다.
땅바닥을 뒹구는 이한을 향해 연달아 채찍이 휘둘러졌다.
채찍 끝만 아니라 채찍의 중간까지 활용해 가며 이한을 향해 끊임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혈화접은 더이상 나비가 아니었다.
움직이는 모습이 나비라기 보다는 제비에 더 가까웠다.
활강하며 기회를 노리는 모습은 매와 닮았다.
[귓바퀴 손상! 출혈을 막습니다. 통증을 차단합니다. 귓바퀴 재생은 전투 후로 연기합니다.]
결국 이한은 한쪽 귀를 내주고 말았다.
나노는 자신이 복귀한 후 처음 겪는 이한의 부상에 딱딱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필요한 조치를 완료했음을 보고했다.
혈화접 하나에 대한 대가로 귓바퀴를 내어주다니!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만약 혈화접이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면 귓바퀴 대신 머리를 대가로 내줄 뻔했다.
그러나 이한이 겪은 위험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땅바닥까지 구르면서 나노머신이 작동할 만한 시간을 벌어다 준 덕분이었다.
당도백이 나노가 쳐둔 덫에 걸려들었을 때, 안개처럼 떠다니던 나노머신이 달라붙었다.
일부는 호흡을 통해 당도백의 내부로 들어갔고, 일부는 당도백의 피부에 붙은 후 안으로 침잠했다.
나노머신은 신체 내부로 들어가자 작동을 시작했다.
나노가 방출한 나노머신의 유일한 목적은 자체 증식.
일단 인간의 몸에 닿아서 인체 내부로 들어가면 수분과 단백질을 재료로 자기 복제를 하면서 급속하게 증식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었다.
한 단계의 자기 복제가 끝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5초.
불과 1분 만에 12번의 사이클이 돌면서 1개의 나노머신은 1만 개 가까이 불어났다.
그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당도백의 채찍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화접을 건드려버렸다.
활강을 하며 계속 이한을 노리던 혈화접은 예상 밖의 간섭에 추락하고 말았다.
“어!”
당도백은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도백이 채찍을 쓰는 법은 금룡편법에 근거를 둔 무공이었다.
금룡편법은 원래 당문의 무공으로 암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금룡편법을 익히려면 눈과 손이 함께 합을 이루는 정교한 동작이 필수불가결했다.
금룡편법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은 허공에 작은 공을 여러 개 던지고 받는 놀이를 입문시험으로 하는데 적어도 8개는 던지고 받고 해야 입문 자격을 주었다.
그렇게 입문한 재능있는 사람이 꾸준히 노력해야 당도백처럼 채찍과 암기를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고, 채찍의 움직임에 암기를 숨겨서 던지기도 하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된다.
그런데 채찍으로 암기를 건드려?
그것도 신편이라는 당도백이?
당도백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이한의 접근을 견제할 목적으로 채찍을 연달아 휘둘렀다.
여러 번의 타격을 하나로 모으면 쇳덩이라도 깰 수 있다는 금룡편법의 첩첩파쇄법이었다.
타격한 횟수는 5번.
평소 같았으면 쇳덩어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철판 정도는 충분히 찢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도백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아야 했다.
다섯 번의 타격 중 같은 곳을 때린 경우는 처음의 둘이 전부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한 뼘 정도 되는 거리만큼 빗나갔고, 마지막에는 아예 엉뚱한 곳을 때리고 말았다.
당도백은 잠깐 공포에 잡아먹혔다.
원하는 곳에 공격을 꽂아 넣을 수가 없다니!
술에 취해서 암기를 던져도 원하는 곳에 명중시키던 당도백이었다.
초절정의 고수가 되기까지 많은 실전 경험이 있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문제는 이런 이상한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저쪽에 서 있는 탑조차 기울어져 보이기 시작했다.
중간부터 위로는 아예 휘어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통증까지 느껴지는 것이 심장에 탈이 나도 단단히 탈이 난 것이 분명했다.
당연하겠지만 혈맥을 따라 흘러야 할 혈액은 물론이고 경맥을 따라 흘러야 하는 내공도 원활하게 흐르지 않았다.
피가 굳어서 죽처럼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증상을 따져본 당도백은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독에 당했구나!
아마 뱀독을 기반으로 알 수 없는 몇 종류의 맹독을 첨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이것은 수치였다.
명색이 당문의 가주라는 사람이 독에 당하다니!
당도백은 푸석하게 윤기를 잃어가는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혈화접을 피해 땅에서 뒹굴던 이한은 흙이 묻은 옷을 툭툭 털고 있었다.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본 당도백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내게 언제 하독을 했지?”
“언제 독을 사용했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 중요한 것은 내게 해독제가 있을지의 여부 아닐까?”
“나를 놀리지 마라. 피가 굳을 정도면 이미 끝난 후다. 나는 앞으로 일각 내로 정신을 잃고 죽겠지.”
이한은 당도백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노머신이 신체의 단백질과 수분을 사용해서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혈관에 들어 차 버렸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그러나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너무 오만하군.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지? 당문이 세상의 모든 독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 않나?”
“오독문의 사람인가?”
이한은 당문이 경계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당문과 오독문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에게 흥미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나는 경사에서 왔다. 어사대의 어사판관이다.\”
“어사판관이라니! 가문의 겁쟁이들이 꼬리를 내린 이유가 있었군.”
“해독제가 있다. 살고 싶나?”
이한은 간단한 명령으로 당도백의 체내에 있는 나모머신의 작동을 멈추고, 다시 단백질과 물로 분해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나노머신의 자기 파괴 프로토콜을 시작해서 당도백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다.
그러나 당도백은 해독제를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살고 싶다고 하면 목줄을 채울 것 아닌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 게다가 나는 의술에도 아는 바가 적지 않다. 해독을 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망가진 몸이 회복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당도백의 말이 점점 어눌해지고 있었다.
피부는 말라서 쩍쩍 갈라지고, 얼굴은 미라처럼 변해갔다.
나노머신의 자기복제 속도는 경이적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당도백을 잡아먹었다.
당도백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과 단백질은 나노머신으로 대치되어갔다.
그 모습을 본 이한은 중얼거렸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겠군.”
당도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한은 당도백의 심장이 멈추는 것을 확인한 후 그로부터 떨어져서 탑으로 향했다.
그제서야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고 있던 자들임이 분명했다.
몇몇은 당문의 사람이었지만, 몇 명은 당문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몇 명은 이한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