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거대한 진을 건설하는 사람들 >
77. 거대한 진을 건설하는 사람들
탑 근처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붉은 머리가 있었다.
옷은 평범한 광산 인부처럼 입었지만, 어떻게 봐도 광산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한 역시 이 사람을 광산 인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 출신조차 아닐 것이다.
물론 제국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검은 머리는 아니다.
하지만 경사처럼 제국의 모든 것이 모여드는 수도도 아니고, 이민족이 오가는 국경 근처도 아닌데 붉은 머리라니!
그것도 사천 지방처럼 외부와 교류하기 어려운 땅에 붉은 머리는 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이한은 이자가 아마 가짜 도사들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아니, 거의 확신이었다.
적어도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당도백이 옥광산을 파괴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두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도백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한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했다.
아마 공간이동과 관련된 정보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지금.
이한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붉은 머리에게 다가갔다.
이한의 손이 붉은 머리의 이마를 잡았다.
그다음은 나노가 할 일이었다.
나노는 붉은 머리의 두뇌를 스캔하고, 뇌파를 분석했다.
두뇌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엿보기 위해 미세전류를 흘려서 반응을 확인하기도 했다.
두뇌를 따로 떼어내서 세포단위로 분해해 가면서 조사한다면 충분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겠지만, 이렇게 간이로 검사하는 방식으로는 많은 기억을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도 최근의 기억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기억 위주로 알아볼 수는 있었다.
[공간이동과 관련되어 말론이라는 자가 계속 언급됩니다. 핵심 기술자 중의 하나로 판단됩니다. 말론의 영상을 띄웁니다.]
이한의 시야에 금발머리를 한 젊은 남자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젊은 외양과 달리 손짓으로 지시를 하는 모습은 제법 관록이 있는 자처럼 보였다.
태도도 매우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명령을 살아온 사람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런데 이 사람,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북양의 지하 동굴에서 물을 터뜨리고 사라졌던 자였다.
당시에도 말하는 것이 평범한 자는 아니라고 느꼈는데, 역시나 싶었다.
공간이동과 관련된 기술자라니!
이한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잡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에 그는 호숫물을 지하로 끌어들였다.
상식을 넘어서도 어느 정도여야지.
그런 상황에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하시설에 호수의 물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어이없게 죽어버린 무림인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고, 경험이 많다고 하더라도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이한도 피부호흡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고생 꽤나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미리 준비하고, 도망친 자를 잡는다고?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당시 북양에 모여들었던 무림인들의 추적이 주변 백리에 미쳤다고 하지만 도망친 자들의 행방을 쫓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이한 역시 방심하고 있던 우두머리를 잡을 뻔했지만, 그자는 팔 하나를 남겨놓은 채 공간을 뛰어넘어 도망을 쳐 버렸다. .
경사의 인력과 물품을 빨아들여서 거대한 지하시설을 건설했던 자들 중 핵심은 모두 도망친 셈이었다.
심지어 그 거대한 시설이 어떤 목적에서 건설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죽은 자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단편적이고, 서로 모순적이었다.
그래서 이한은 다른 곳에서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천까지 왔다.
하지만 이한의 노력은 한 가지 정보를 얻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이곳, 사천에 있던 자들은 별로 중요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핵심은 북양에 있던 자들이 분명했다.
이한이 뒤를 쫓아야 할 자들은 그들이었다.
아무래도 제국의 북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이곳의 일부터 마무리를 지어야했다.
개인적인 볼일은 이미 끝났지만, 어사대의 어사판관으로서의 임무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붉은 머리를 조사하던 이한에게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한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어사판관 대인을 뵙습니다. 육선문의 낭장 이헌도라고 합니다.”
“육선문의 협군 명류연이라고 합니다.”
···
“사례감의 태감을 모시고 있는 오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앞다투어 이한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대부분 육선문에 속한 관리들이었고, 환관도 하나 끼어있었다.
모두가 감찰을 담당하는 관청에 속한 자들이었다.
환관은 누구에게 속해 있든지 상관없이 당연히 황제 직속이겠지만, 육선문은 좀 달랐다.
육선문은 단일 조직이 아니다.
세 개의 관청이 육선문이라는 하나의 간판 아래에서 활동하는 조금 복잡한 관청이다.
원래 육선문은 무림의 문파를 감찰하기 위해 기존의 감찰 기관에서 능력있는 자들을 차출해서 만든 임시 관청이었다.
그러나 무림의 문파나 지방의 거대 세가들이 득세하면서 무림의 문파를 감찰한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권력이 되어버렸다.
활동 범위가 경사로 국한되는 감찰 기관일수록 육선문에 욕심을 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황실의 입장은 감찰 기관들과 달랐다.
육선문을 정식 관청으로 만들어서 권력을 몰아서 쥐여주는 것도, 그렇다고 육선문을 폐지해서 무림의 문파들에 대한 감찰에 차질을 빚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황실에서는 육선문을 그대로 유지해 버린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육선문은 자체적으로 인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감찰 기관으로부터 파견되어 오는 사람들로 인원을 충당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육선문 사람끼리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다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감찰 기관끼리의 다툼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일종의 미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감찰 기관을 배려해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원래 사천 지방으로 파견된 감찰 기관들의 목적은 당문을 감찰하고 필요하다면 병력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무림의 고수들이 필요하면 근처의 문파에서 고수를 불러오고, 병사가 필요하다면 근처의 지방군을 동원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다.
어사대 사람들이 사천의 중요한 문파에 가 있던 것도 그런 목적에서의 사전작업이었다.
하지만 감찰 기관에서 파견된 자들은 당문에 대한 제대로 된 증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당문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을 넘지는 않았기 때문에 계속 시간만 낭비했다.
그래서 어사판관 이한이 온 것이다 .
단순히 감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찰 결과에 따라 판결도 내릴 수 있는 관리가 온다면 당문이 폭주할 수도 있다고 기대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강경한 독립론자인 당도백이 하룻밤 사이에 가주에서 축출되었고, 미끼로 온 어사판관은 직접 당도백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것도 독으로.
어떤 독인지는 당문 사람들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독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독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죽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찰 기관에 속한 관리들의 목이 뻣뻣하다고 해도, 독을 잘 쓰는 어사판관에게까지 목이 뻣뻣한 자들은 여기에 없었다.
그렇게 눈치가 없는 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육선문에서 쫓겨 나갔거나 죽었다.
남은 자들은 시세에 민감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보낸 기관을 위해 공적이 필요했다.
당도백이 제거당하고, 사천 지방이 안정화되는 이때에 체면치레를 하려면 작은 공이라도 세워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한 것은 붉은 머리였다.
“이자는 경사에서 도망친 대진국의 도사들과 한패거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1년간 육선문에서 이들에 대해 조사했는데, 경사와 계속적인 교류가 있었습니다. 경사에서 이들에게 보낸 인력과 물품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데려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이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붉은 머리로부터 얻어낼 것을 다 얻어냈으니 누가 데려가든지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어사대의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새로 도착한 당문 사람들이 가주에서 축출된 전대 원로의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조정에서 내려온 관리들은 공을 다퉜다.
이한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
말론이 있는 곳은 암석 사막이었다.
모래로 덮인 곳이 아니라 돌과 바위로 덮인 곳이다.
춥고 황량한 땅이었다.
뜨거운 낮과 추운 밤은 바위를 쪼갰고, 모래가 섞인 거센 바람은 암석을 갈아서 다시 모래로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기는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산다는 느낌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모래 사막보다도 인간에게 더 적대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인 곳, 이곳은 그런 땅이었다.
그러니 이런 곳에다가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어떤 종류라고 하더라도 권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땅에 무엇인가 건설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같은 집단의 일원이라면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이 옳았다.
적어도 뭐가 문제인지는 말해 주어야 했다.
“사형께서도 아시겠지만, 이곳에 진을 설치해봐야 1년을 유지 못합니다. 지랄같은 바람이 모조리 쓸어가버리겠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바닥이 암석이라고 해도 음각으로 파내고 그 자리를 옥으로 대신 채워넣는 일이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규모를 생각하면 1년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적어도 3년은 걸릴 겁니다. 물품과 인력이 원활하게 보급된다는 가정하에서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저도 유감입니다만, 불가능합니다.”
“역시 무리였나?”
말론은 마법진을 그려놓은 큰 두루마리를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질이 너무 떨어져서 생각보다 마법진의 크기가 너무 커졌다.
직경이 300장이 넘으니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만약 청옥을 구하지 못했다면 그나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옥이라면 세 배는 더 커져야 했을 것이고, 금이나 은으로는 그 양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건설에 동원할 인력은 그로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많이 동원한다면 가능하겠지요. 한 명이 필요한 곳에 열 명을 쓰면 설마하니 기간을 단축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외지고 황폐한 곳에서 어떻게 인력을 동원합니까? 주변의 부족을 모조리 끌어다가 일을 시켜도 불가능합니다.”
“북양처럼 하는 것은 안 되겠지?”
“경사에서 인력을 끌어대다가 조정은 물론이고 무림인들까지 꼬여들었습니다. 탄광 지대인 북양에서도 그렇게 눈에 띄었는데, 이곳 같이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안됩니다. 이미 북양에 건설해둔 모든 것이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종주께서는 어디에 계신 겁니까? 마나를 충전해둔 옥구슬을 그분이 따로 챙겨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 그 분이야 혼돈으로부터 선택된 분이니까 자신의 의지로만 움직이지는 않으신다.”
“정말 모르십니까?”
말론은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