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혼돈으로부터 연결이 끊긴 사람 >
78. 혼돈으로부터 연결이 끊긴 사람
과연 이자를 믿을 수 있을까?
질문을 받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말론은 대답을 망설임으로 자신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의 설계도대로 거대한 마법진을 건설할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필요에 따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믿음밖에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왜 신뢰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들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단순히 힘을 갈구할 뿐이었다.
만약 원하는 힘을 얻지 못할 것 같다는 의심이 들게 되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대놓고 분란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향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추측을 이야기하는 것도 곤란했다.
언제나 사실 그 자체만을 이야기해야 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퍼진다면 말에 실린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마법사에게 그런 상황은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마법사가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정말 피치 못할 경우, 이를테면 목숨의 위협을 받아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나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그나마도 마법적 성취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법사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말론은 두루마리를 말아서 정리한 후 품에 넣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
말론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상황 설명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뢰받지 못하는 자의 상처받은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그러나 말론은 그를 달래줄 생각이 없었다.
“종주님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금지한다.”
말론은 철저하게 말을 아꼈다 .
신뢰받지 못한다면 두려움이라도 느끼게 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힘을 스스로 깎아먹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현상을 비트는 힘의 본질은 아직도 완벽하게 규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의 말에 언령이 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믿음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다른 사람의 신뢰 역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지 부정정적인 의미에서든지 저 마법사가 하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마법사가 명성에 집착하거나 흑마법사가 악명을 즐기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어떤 식으로든지 명성이 높은 마법사일수록 언령 또한 강해지는 것이 분명했다.
명성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법.
말론이 두려움을 선택한 이상, 어설프게 주변 사람들을 대할 생각은 없었다.
말론은 긴장한 채 자신을 주목하는 ‘사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들로부터 사형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형제 간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종주를 따르는 마법사들 간의 서열에 지나지 않았다.
“명령은 이미 내려진 후다. 너희들은 오직 따를 뿐이다.”
사제들은 고개를 숙였다.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모를 자들은 아니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음 뿐.
여기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말론의 사제들은 말론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말론은 복잡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자들을 바라보았다.
사천에 있던 옥광산이 무너진 것은 확실했다.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자는 자신과 비교해도 별로 뛰어난 자가 아니니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문제가 생겼다는 말과 같다.
몇 개월 후면 정기적으로 사천을 왕복하던 상단에서 확인을 하고 알려오겠지만, 아마 옥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을 것이다.
사천뿐만이 아니었다.
경사에 있던 말론의 사부는 탑과 함께 공간을 뛰어넘어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경사에 있던 모든 기반도 사부와 함께 사라졌다.
더 이상 물품과 인력을 공급받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리고 이번에는 종주가 모습을 감췄다.
북양에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후였다.
이 세상에서 얻은 지식을 응용하여 만든 것도 다 물에 잠겼다.
다시 돌아가서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 이후로 모두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말론의 사부에게서도, 그들의 종주에게서도 어떤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렇게 방치된 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계획한 대로 움직인 것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막북의 사막에서 마법진의 설계도나 만지작거리면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방치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뭐라고 할까.
물론 어떤 상황일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종주는 혼돈의 의지에 지배당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고, 말론의 사부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혼돈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둘 다 혼돈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다.
자신들과 같은 소모품과 달리 그들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말론은 이 세상에서도 혼돈의 추종자들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 세상을 둘러보면서 이 땅에서도 억압받고, 억울한 자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돈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될 만한 씨앗도 여럿 볼 수 있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태워버릴 정도로 소명의식이 강한 자 말이다.
그런 자가 혼돈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다.
말론이 태어났던 본래의 세상에서도 흑마법사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흑마법을 추종하는 이가 생기는 것은 혼돈의 선택 때문이었다.
평범했던 인간이 혼돈의 선택에 의해 반신에 가까운 힘을 얻고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고통과 억압으로 가득 찬 현재의 세상에 대한 부정이었다.
말론 역시 그러한 점 때문에 혼돈의 추종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본래의 세상에서 아주 먼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에 혼돈이 존재하지 않기에 생긴 영향일까?
말론은 생각을 멈췄다.
불경하다는 느낌, 그리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그를 자제시켰다.
말론은 주변에 있는 부족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부터 다시 확인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일단은 원래 세운 계획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어 놓았다.
*
고개를 숙인 자에게 허리도 구부리라고 하는 것은 가능한 범주의 요구다.
고개를 숙인 입장에서도 이왕 고개를 숙였으니 허리 정도는 구부려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마까지 바닥에 박으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지나친 일이다.
아니, 그전에 이마를 바닥에 박으라고 요구하는 놈이 미친놈이겠지.
이한은 뒤늦게 나타나서 헛소리를 하는 육선문의 6품 주사에게 역정을 냈다.
“오 주사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새로 뽑힐 당문의 가주를 누구로 할지 결정해야 한다니! 왜 그걸 우리가 해야 하오? 그리고 경사로 가서 황제께 인준을 받아야 한다고? 이해할 수 없군. 그런 것이 무슨 실익이 있다는 거요? 가문마다 정해진 법도가 다 다르니까 종통을 잇는 일은 가문의 규례에 따르는 것이지 외부에서 뭐라고 할 일이 아니오. 함부로 헛소리를 얹었다가는 다른 세가들로부터 경계나 사고 말겠지.”
어사판관은 3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실무부서의 최고 책임자가 대개 3품이니 정치적인 배경없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품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래 감찰 기관의 품계는 일반 관료제의 품계에 비해 한두 단계는 더 위로 쳐 준다.
감찰 기관의 6품이면 일반 관료제의 5품과는 당연히 동격으로 대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4품과도 맞먹는다.
이것은 정승이라고 하더라도 어사판관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육선문의 6품 주사 따위가 어사판관의 면전에서 헛소리를 내뱉다니!
아무리 공에 눈이 어두웠다고 해도 지나친 일이었다.
그러나 6품 주사의 눈에는 정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헛바람이 들었던 가주를 내치는 것으로 당문에서 황제 폐하께 충성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문이 사천 지방의 지배자나 다름없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럴 때 당문의 기를 완전히 꺾어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세력이 강성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주변에 확인을 시켜 주어야 합니다. 당문에서는 우리의 권고를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 거부할 수 없겠지. 어사대에 육선문에 금의위에 도찰원까지 잔뜩 몰려왔고, 사천 지방 뿐 아니라 운남이나 섬서에 있는 문파에서도 고수들을 파견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자기들끼리 서로를 위로하며 고개를 숙이겠지. 그리고 역시 당도백이 옳았다고 중얼거리며 역심을 속으로 숨긴 채 기회를 노릴 것도 분명해. 아마 다음번 당도백을 당문 스스로 제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걸. 오히려 보호하려고 하겠지. 어딘가의 멍청한 6품 주사 때문에 말이야.”
이한은 대놓고 비아냥댔다.
원래라면 아무리 품계가 차이가 난다고 해도 다른 관청의 관리에게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이한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한은 상대를 두드려 패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친 말씀입니다. 저는 오직 황제 폐하께 대한 충성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데 어사판관 대인께서는 오히려 당문의 편의를 봐주시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도백을 죽인 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자는 마땅히 경사로 끌고 가서 국법의 엄정함을 널리 알리는 표본으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여기까지 듣자 이한은 육선문의 6품 주사가 지껄이는 말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공격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당문의 가주 선출에 대한 관여부터 이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당도백에 대한 처우 문제까지 거론하고 있으니 하나만 걸리라는 식이었다.
이런 경우는 정치적인 견제가 주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란을 일으켜서 이번 일에 공이 큰 어사대의 입지에 타격을 주자는 것이다 .
지금 6품 주사는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저격수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한은 누가 어사대에 어깃장을 놓는지 궁금해졌다.
“자네는 육선문 소속이라고 하던데, 원래는 어디 출신인가?”
“......금의위 출신입니다.”
“당문이나 나를 노린 것이 아니라 어사대를 노린 견제겠군. 어사대가 너무 일을 잘하니까 금의위에서 불안했나 보지?”
이것은 일종의 영역다툼이었다.
금의위나 어사대나 모두 황제 직속의 감찰 기관이니, 한쪽이 잘하면 다른 쪽에서 체면이 상했다고 생각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한에게는 귀찮기만 한 일이었다 .
만약 이한이 어사대 사람이라면 논란을 키워서 오히려 어사대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사용하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어사대와 금의위 사이의 권력 다툼 따위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양쪽 모두의 조력을 다 받을 수 있다면 좋았다.
그래서 이한은 금의위에 한가지 선물을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