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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화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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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이 세상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음식은 쓰레기 같고 사람들 몸에선 끔찍한 악취가 나며 길거리엔 괴물이 득실거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왜?

원래 세상에선 새벽에 세탁기 돌리는 놈 대가리를 깨면 안 되지만 여기선 아니니까.

원래 세상에선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윗집 애새끼를 때리면 안 되지만 여기선 아니니까.

원래 세상에선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놈 얼굴에 주먹을 꽂으면 안 되지만 여기선 아니니까.

문명인은 무례하게 굴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으니 야만인보다 무례하다고 하던데, 이곳에 와보니 그 말이 딱 맞았다.

현대인에 비하면 이곳 사람들은 확실히 야만인이지만 무례하게 구는 일은 잘 없었다. 그게 들고 다니는 칼 한 자루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 아들은 쓰레기였네.”

지금 여기 있는 야만인은 과연 무례하지 않았다. 뭔가 자기 아들에게 무례한 말을 하긴 했지만.

김창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 노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별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은 많았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제 동생들의 것을 뺏을 줄은 알아도 자기 손으로 뭔갈 가져올 줄은 몰랐던 놈이거든.”

노인의 이름은 게딜 데노반이라고 했다. 그는 이 근방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대상회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김창이 있는 곳은 바로 그 데노반 가문의 응접실이었다. 오늘 아침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게딜의 손님으로서 이곳에 있었다.

일단 아직까진.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한다네. 자기 능력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는 소리지. 그런데··· 세상살이란 게 참 얄궂게도 능력과 위치가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거든.”

게딜은 탐욕스러운 뱀의 눈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앙상했지만 한때는 저 손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줄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귀족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훌륭한 건 아니지. 항상 능력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게 문제야. 능력도 없는 놈이 그저 태생만으로 남들 위에 설 수 있거든. 끔찍한 일이지. 그리고 더 끔찍한 건······ 그런 놈들은 대개 욕심도 많다는 사실이고.”

김창은 손으로 칼잡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하도 쥐고 다녀서 길이 잘든 소가죽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아까도 한 말이지만, 내 아들은 능력은 쥐뿔도 없는 게 욕심만 그득했어. 내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길바닥에서 구르다 비루하게 죽었을 놈이 천지도 모르고 까불더군.”

게딜이 후 하고 또 담배를 연기를 뿜어냈다.

“나는 언젠가 그 녀석이 사고를 치리라 생각했지. 내 안목은 정확했다네. 하는 사업마다 죽을 쑤고 결국 음지의 사업에 손을 대더군. 다른 사업장을 인수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때 결심했지. 아무리 장자라고 해도 이 녀석에겐 가문을 물려주면 안 되겠다고.”

긴긴 말을 내뱉고 나서 목이 말랐는지 게딜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김창은 칼자루를 한 번 고쳐잡았다.

이제 죽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직 들어야 할 말이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킨겔을 죽이려고 했나? 가문을 물려주기 싫어서?”

게딜은 김창을 시켜서 자기 아들인 킨겔을 죽이려고 했다. 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했는가?

저 쓸모없는 아들놈이 가문을 말아먹을 게 분명해서? 불법적인 사업으로 가문에 큰 타격을 줄 게 분명해서? 그래서 남의 손을 빌려 없애려 했나?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세상에 가문 물려주기 싫다고 아들 죽이는 아버지도 있나? 그냥 안 물려주면 그만이지. 내가 킨겔을 죽이려고 한 건 그 후레자식이 내 여자를 건드렸기 때문이야.”

환장하겠군. 김창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킨겔은 능력도 없는 게 욕심만 많은 게 문제라고. 그 후레자식, 제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그게 누구거든 가지려고 들지. 이번 문제만 해도 그래. 아무리 발정 난 개새끼라고 해도 나랑 재혼해서 제 어미가 된 여자를 노리나? 미친놈.”

“···킨겔이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대서 그런 게 아니고?”

“그게 뭐가 문젠가? 돈만 벌면 그만이지. 진짜 문제는 사업을 하다가 돈을 잃는 걸세. 반대로 돈을 번다면? 뭔 사업을 하든 알 게 뭔가?”

“사업장을 인수하려고 사람까지 죽였다면서. 그건 상관없나?”

“사람 좀 죽이는 건 괜찮아.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게 문제지.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건 뒤처리가 힘들거든.”

김창은 여기까지 온 시간이 점차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에겐 받아야 할 돈이 있었다.

“이제 됐나? 시작해도 되겠지?”

김창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킨겔이 있었다. 거래 덕분에 목숨을 건져 데노반 가문으로 돌아오게 된 그는 설마 이런 진실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물론 김창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개 같은 집안이로군.

“고작, 고작······ 고작 그딴 이유로 날 죽이려 들어? 이 개자식! 너는 내 부모도 아니야!”

“저 후레자식이 말하는 것하고는······. 고작이라고? 감히 내 것을 탐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줄 알았느냐? 나는 아들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염병! 이봐! 당장 저 역겨운 늙은이를 죽여버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건방지게 왜 명령이야. 김창은 눈썹을 까딱였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게딜만 죽이면 다 끝날 일이니 굳이 군말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자네는 제법 실력 있는 칼잡이라고 들었는데······ 솔직히 실망이야.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의뢰인과의 약속을 그리 쉽게 뒤집다니 말일세.”

천천히 다가오는 김창을 보면서 게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는데도 침착한 것은 대상회 가문을 이끌던 관록 덕분일까.

물론 그게 아님을 김창은 알고 있다.

“후회하지 말게. 원망하지도 말고. 자네가 선택한 일이니까.”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안쪽으로 들어왔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데노반 가문의 사병이겠지.

김창은 자신을 노려보는 병사들의 얼굴을 쓱 본 뒤에 입을 열었다.

“괜한 짓일 텐데.”

“자네가 플레이어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뭐? 플레이어라고 배에 칼 안 들어가나? 찌르면 다 들어가게 돼 있는 법이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플레이어들은 그들이 키우던 게임 속 캐릭터의 몸을 빌려 이곳에 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육성을 다 끝낸 것도 아닐 테니 그다지 강하지 않은 플레이어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약한 플레이어가 현지인에게 맞아 죽는 경우도 가끔 있고.

게다가 게임에서도 잘 키운 캐릭터가 다구리 당해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러니 게딜의 판단은 영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가 김창이 아니었다면 확실히.

“자네가 한 선택의 대가를 달게 받게. 그리고 킨겔? 너는 조금 후에 보자. 넌 뒈졌다.”

게딜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순간 무장한 병사들이 달려들어 김창을 공격했다. 열댓 명이 들어왔다고 해도 그들이 한 번에 문을 통과할 수는 없으니 실제로 공격하는 건 세 명 정도였다.

김창은 침착하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후에 가장 먼저 따라붙은 병사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마치 말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억 소리와 함께 병사가 뒤로 날아갔고 뒤따라 달려오던 병사들이 부딪쳐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김창은 바로 움직였다. 넘어진 병사의 머리를 발로 짓밟아 으깨고 날아오는 창을 칼로 쳐냈다. 그리곤 조금 낮게 찔러 들어오는 창의 자루를 손으로 붙잡아 자신 쪽으로 휙 당겼다.

“어어?”

병사가 멍청한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이가 몇 개나 부러져 공중에서 춤추는 사이에 칼날이 몇 번 번쩍이더니 곧 머리통 몇 개가 휙휙 소리를 내며 날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병사 다섯이 죽었다. 절반이나 되는 숫자가 제대로 상처 하나 내지도 못하고 죽는 걸 본 게딜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김창의 학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

“끄아아악!”

휙휙. 칼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비현실적이었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잔인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곳곳에 피가 뿌려지고 잘려 나간 사지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데 게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경험한 노련한 상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느끼고 말하기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으아아악! 뒈져!”

마지막으로 남은 병사 하나가 발악하듯 김창을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쨍 하고 울리는 금속음 다음에는 잘려 나간 손목이 있었다. 병사는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자신의 잘린 손목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리도 이미 목에서 떨어져 바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 우웩!”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김창이 뒤를 돌아보니 토사물을 뱉어내고 있는 킨겔이 있었다. 저 등신 새끼, 사업 때문에 사람도 죽인다면서 이런 것도 못 참나?

김창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거두고 게딜을 쳐다봤다. 그가 믿었던 열 명의 사병은 김창에게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이런 건 싸움이 아니었다. 학살이지.

“아까 뭐라고 했지?”

“으, 으으으······.”

게딜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신음만 흘렸다. 김창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게딜의 손에 칼을 박으며 말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원망하지도 말라고 했지.”

“끄아아악!”

“상대를 봐가면서 건방을 떨었어야지.”

“끄윽······. 사, 살려주게! 킨겔 저 개자식이 뭘 약속했든 난 그 두 배를 주지! 제발!”

부자(父子)라서 그런지 하는 소리도 똑같다. 김창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끝이 없겠는데. 난 금화 오십 개면 충분해.”

“제발, 제발!”

김창이 칼을 들어 게딜의 목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쿵쿵 소리가 울리는 게 누군가 응접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설마 또 사병들인가. 몇 명이 더 몰려오든 결과는 똑같겠지만 일이 귀찮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김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응접실 입구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달려온 건 사병들이 아니었다.

“아버님! 이게 대체 무슨······. 으악!”

“우웁!”

달려온 것은 게딜의 자식들이자 킨겔의 동생들이었다. 그들은 응접실 안의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 욕지기를 느끼거나 비명을 내질렀다.

“벼, 병사들을 불러! 병사들을 부르라고!”

“저 개자식을 죽여버려!”

“아버님! 곧 구해드리겠습니다!”

이거 시체 몇 구 더 치워야겠는데. 김창은 칼자루를 고쳐잡고선 게딜의 머리를 싹둑 잘랐다.

“저 녀석을 잡아라!”

“주인님을 구해!”

외침을 듣고 우르르 몰려온 병사들이 또다시 김창에게 덤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킨겔은 모닥불에 뛰어드는 벌레들을 떠올렸다.

“안 돼······.”

킨겔의 중얼거림은 병사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운명은 불에 타죽는 날벌레들과 다를 게 없었다.

“끄아아악!”

“크억!”

“켁!”

병사들은 죽고 또 죽었다. 김창의 칼날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받아내는 자가 없었다. 때때로 협공을 통해 김창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하나 내긴 했지만 그건 정말로 생채기에 불과했다.

김창은 잘 익은 밀을 베어내듯 병사들의 목을 잘라냈다. 그건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낫질처럼 정말 목가적인 행위였다.

엄청난 살기 따윈 없었지만 감히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자들도 없었다.

“아아······.”

하나둘씩 쓰러져 가는 병사들을 보고서 킨겔의 형제들이 할 수 있는 건 탄식뿐이었다. 한 명은 다리의 힘이 빠져 털썩 쓰러지기까지 했다.

“컥!”

마지막 병사까지 죽고 나서야 싸움은 끝이 났다. 김창은 아까 자른 게딜의 머리를 들고서 킨겔에게 다가갔다.

“축하한다, 킨겔.”

툭. 바닥에 떨어진 게딜의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서 킨겔의 발에 부딪혔다.

“이젠 네 가문이야.”

그 말을 하고서 응접실을 나서는 김창을 감히 붙잡을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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