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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3화 (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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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노반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어젯밤에는 장자인 킨겔이 납치를 당하더니 다음날에는 웬 덩치 큰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 후에는 단 한 사람에 의해 가주 게딜이 죽고 사병 스무 명이 죽었다.

납치된 장자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축하 연회를 열자고 했던 게 몇 시간 전의 일인데, 갑자기 가주는 물론이고 사병까지 무더기로 죽었으니 가문의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그 누가 홀로 사람 스무 명을 썰어 죽이는 칼잡이에게 복수하려 들겠는가?

그리고 새롭게 가주가 된 킨겔은 김창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건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가문이 망하는 걸 막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약속했던 보수다.”

킨겔은 묵직한 주머니를 건넸다. 김창은 안을 열어보지도 않고 주머니를 바로 챙겼다. 그는 킨겔이 감히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도 한 마리 받아 가지.”

“금화 오십 개를 꿀꺽했으면서 더 달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킨겔의 목소리에 김창이 눈썹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럼 안 되나?”

“······아니. 마구간에 일러두지. 마음에 드는 놈으로 데려가.”

김창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드러운 의자에서 일어나 킨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음에도 누구 죽일 일 있으면 불러라. 넌 특별히 싸게 해주지. 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고.”

미친 새끼. 킨겔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 김창의 손을 맞잡았다. 단단했다.

“그러지.”

“그리고 한마디 해두겠는데.”

뿌득. 맞잡은 손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킨겔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았다.

“괜한 생각하지 마라. 난 분명히 충고했어.”

킨겔이 할 수 있는 것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래야지. 그런데 넌 이대로 괜찮겠나?”

킨겔은 벌건 색으로 달아오른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뭐가?”

“네 가문 말이야. 당장은 상황이 혼란스러우니 괜찮을 테지만 결국엔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가주인 게딜이 죽었으니 그 자리는 일단 장자인 킨겔의 차지가 됐다. 하지만 혼란이 수습된 후에는 게딜의 죽음에 어떤 사유가 있었는지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도 킨겔은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형제들도 죽여주랴?”

“···누굴 개백정으로 아는군.”

아버지도 죽인 놈이 새삼스레 뭘. 김창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집안 관리 잘해라. 겨우 얻은 자리 뺏기지 말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킨겔이 뿌득 이를 갈았지만 김창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난 간다.”

돈도 받았겠다, 이제 이 저택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김창은 성큼성큼 걸어서 방을 나섰다.

“개 같은 플레이어 새끼······.”

뒤에서 킨겔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금화 오십 개를 받았는데 욕 좀 들으면 어때.

“······.”

김창이 바깥으로 나오자 복도는 정적으로 휩싸였다.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은 감히 그의 눈을 마주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자기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김창은 침묵으로 휩싸인 복도를 지나쳐 뚜벅뚜벅 걸었다.

그가 지나가자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역병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군.

김창이 턱을 긁적이며 복도의 모퉁이를 돌 때였다.

“어머, 여기서 만나는군요.”

우아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김창은 이 여자가 누군지 몰랐다.

“누구쇼?”

“이 저택의 안주인입니다. 명목상으로는요.”

데노반 가문의 안주인이라면 게딜의 부인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명목상이라는 건 아무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데노반 부인이로군.”

“낯간지러운 호칭이네요. 이 저택에서 날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어요.”

알 바 아니었다. 김창은 여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젊은 부인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게딜과 킨겔이 한 여자를 두고 다툴 만큼.

“그래서 할 말이라도?”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 할 만한 것은 아니군요. 내 방으로 가지요.”

외간 남자를 방으로 부르는 건 정숙한 숙녀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데노반 부인과 김창은 애초부터 이 저택에서 더 떨어질 평판이 없었다.

“그럼 갑시다.”

“이쪽으로.”

데노반 부인은 명색이 안주인인데 몸종 하나 없이 홀로 다녔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위해 일부러 혼자 움직이는 걸지도 몰랐다.

“차를 내오지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데노반 부인의 방은 크지만 화려하진 않았다. 딱 있어야 할 만한 가구만 있는 걸 보면 본래 사치를 즐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이름은 에밀리라고 해요.”

흔한 이름인 걸 보면 본래 데노반 부인의 신분은 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창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말했다.

“김창.”

“그래요, 김창. 이름을 들으니 알겠군요. 플레이어시죠?”

이곳 사람들 기준으로 김창이라는 이름은 대단히 특이한 이름일 텐데 에밀리는 아주 능숙하게 발음했다.

하기야 원래 그들은 게임 속 NPC고 ‘여초딩사랑꾼’이나 ‘노인복지관틀니도둑’ 같은 웃기지도 않은 닉네임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읽지 않던가.

그런 역겨운 닉네임에 비하면 본명인 김창은 별로 말하기 어려운 이름도 아닐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은 들었어요. 혼자서 스무 명을 썰어 죽였다죠? 내가 검술에 문외한이긴 해도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알고 있어요.”

“내 실력 칭찬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시킬 일이라도 있으신가?”

에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한 가지 물을게요. 당신이 게딜을 죽인 건 킨겔 때문이죠?”

“그래.”

“그리고 게딜은 킨겔을 죽이려고 했고요?”

김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는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킨겔이 날 사랑한 건 알고 있어요. 언젠가 그 문제로 두 사람이 다투게 되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군요.”

김창은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게딜을 사랑했나?”

“사랑하려고 했죠.”

대충 봐도 돈 때문에 한 결혼이다. 김창이 픽 웃었다.

“그럼 킨겔은? 게딜 같은 늙은이보단 그쪽이 더 나았을 텐데.”

“이젠 그를 사랑하려고 해야겠죠. 단지 그것뿐이에요.”

결국 두 남자는 자신들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려 했다. 참 바보 같은 일이 아닌가.

김창은 차 한 모금을 마신 후에 말했다.

“그래서 시킬 일이 있느냐고.”

“네, 있어요. 날 좀 도와줄래요?”

그러니까 뭘? 시킬 일이 있으면 빨리 말이나 할 것이지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는 에밀리를 보며 김창은 얼굴을 약간 구겼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킨겔은 결국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 테지요. 지금이야 다들 혼란스러우니 킨겔을 가주로 인정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진실이 드러나게 될 테니까요. 여자에 미쳐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라. 누가 그런 사람을 가주로 모시려 할까요?”

동감이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리가 말을 이었다.

“킨겔이 몰락하면 곤란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킨겔이 게딜을 죽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형제들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요. 날 부자를 홀린 요녀라고 부르며 죽이려 들겠죠.”

하기야 맞는 말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자들에겐 복수의 대상이 필요할 텐데 에밀리는 참으로 적당한 상대일 테니까.

“그래서 그쪽을 데리고 도망쳐 달라는 건가? 그런 부탁이라면 곤란한데.”

“그런 염치 없는 부탁을 할 수는 없죠. 그리고 도망쳐도 데노반 가문에서 날 쫓을 테고요. 당신이 영원히 날 지켜줄 수는 없으니 별 의미 없는 짓이지요.”

“그럼?”

“이 도시 뒤쪽에는 산 하나가 있어요. 거기엔 작은 오두막이 있는데 마법사가 살고 있답니다.”

“마법사?”

그런 곳에 혼자 사는 놈치고 뒤가 안 구린 놈이 없던데. 김창이 미간을 좁히자 에밀리가 이어 말했다.

“조금 특이한 사람이긴 해도 실력은 확실해요. 그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주세요.”

“그 마법사는 왜 찾는 거지?”

“난 이 저택에서 도망쳐서 새 삶을 살려고 해요. 그러기 위해선 내 모습을 버리고 변장을 할 필요가 있죠.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오래 가는 변장.”

그런 걸 굳이 마법사에게 부탁한다면 이유야 뻔하다. 모습을 바꿔서 도망치려는 속셈이다.

“모습을 영영 바꾸는 마법도 있나? 그런 건 용이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고등한 마법은 아니에요. 하지만··· 역할은 비슷하죠. 김창, 당신은 그저 마법사에게 내 말만 전해주면 돼요.”

“그거면 된다고? 돌아와서 답변을 전해줄 필요도 없고?”

“네, 그냥 그게 끝이에요. 어차피 답변은 마법사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이 수고할 필요는 없어요.”

말만 들으면 아주 간단한 부탁이다. 그냥 가서 말만 전하면 되고 굳이 돌아와서 대답을 전해줄 필요도 없다.

너무나도 간단한 일인데 돈까지 받을 수 있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도망친 다음에는 어쩔 셈이지?”

“내 삶을 살아야죠. 그간 게딜에게 받은 돈으로 작은 식당이라도 열어볼 생각이에요. 전 생각보다 손재주가 있거든요.”

그러면서 씩 웃는 모습은 확실히 두 사람을 홀릴 만한 아름다움이었다. 김창은 찻잔을 마저 비운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수는?”

“은화를 좀 드릴게요.”

고작 말만 전하는 일인 만큼 보수는 그리 세지 않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미 김창의 수중에는 금화 오십 개가 있는데.

김창은 에밀리가 내민 은화 몇 개를 손에 쥐었고 몸을 돌려 문을 향해 움직였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지.”

“네, 조심히 가세요. 당신이 부디 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를 빌게요.”

대답은 없었다. 김창은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그 마법사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건가?”

“네. 그런데 그건 왜요?”

“정숙한 부인이 요사스러운 마법사 따위와 친분이 있다는 건 그리 좋게 들리지 않는군.”

무지는 두려움의 근간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법사를 두려워한다. 마녀사냥 같은 어이없는 일 따위가 벌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회 가문의 안주인이 마법사와 친분이 있다는 건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에밀리도 쓰게 웃었다.

“내가 귀족 가문의 영애였다면 그 말도 틀린 건 없겠지요. 하지만 난 그런 귀한 가문의 사람이 아닌걸요. 질 나쁜 친구들도 한둘쯤 있을 만도 하지요.”

“마법사와 자주 거래했군. 뭘 했지?”

“김창, 당신은 칼잡이가 아니라 성기사라도 되는 건가요? 그건 내가 답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 같군요.”

그 말이 맞다. 그건 에밀리가 대답해야 할 일이 아니고 김창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정말 사악한 요녀라고 해도 뭐 어떤가? 망하는 건 이 가문이지 김창의 인생이 아닌데.

“하지만 정 궁금하다면 하나 말해줄 수는 있지요.”

“그게 뭐지?”

에밀리가 씩 웃었다.

“숙녀의 비밀이랍니다.”

염병, 그럼 아무것도 말 안 해준 거잖아. 김창이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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