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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4화 (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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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게임이었다면 퀘스트 수락이라는 버튼이 떴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긴 게임 속인지, 아니면 게임이랑 비슷한 다른 세상인지 알 수 없는 곳이라 그런 버튼 따윈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요즘 게임이라면 으레 있는 길안내 시스템 따위도 없었다. 그 말은 목적지까지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럇!”

데노반 저택을 나선 김창은 곧장 산을 향해 말을 몰고 있었다. 도시 바로 뒤에 위치한 산은 그리 멀지 않아서 어쩌면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끝마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산이 제법 험하군.”

수상한 마법사가 숨어 살기엔 딱 적당한 곳이다. 김창은 말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길을 찾기 시작했다.

“···굳이 이런 곳에 숨어 사는 마법사라면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텐데.”

산속에서 헤매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도 아니고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마법사라면 분명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놈일 텐데, 그런 놈이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진 않을 것 아닌가?

더욱이 에밀리는 산에 가면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이 넓은 산을 뒤지면서 마법사를 찾아야 하나?

“제기랄, 일을 잘못 맡았나.”

일 한 번 해주고 금화를 오십 개나 벌었으니 그깟 은화 따위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일이 쉬우니 별생각 없이 일을 받았던 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정말로 이 넓은 산을 뒤지며 다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약속 따위는 어겨버리고 내 갈 길이나 갈까?

칼잡이는 신의로 먹고산다지만 그건 개소리다. 칼잡이를 먹여 살리는 건 신의가 아니라 들고 다니는 칼 한 자루와 남이 주는 돈이다.

물론 신의가 없다면 돈도 받기 어렵지만 지금은 일단 돈부터 받지 않았나? 그럼 신의는 다음 문제다.

“···음?”

잠깐 고민하던 김창은 주머니 속에서 뭔가 반짝이는 걸 알아차렸다. 얼른 꺼내 보니 에밀리에게 받았던 은화 중 하나였다.

“이걸 따라가라고?”

은화에서 쏘아져 나오는 빛은 마치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에밀리가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냥 보냈던 건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나.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빛을 따라 움직였다.

은화에서 나오는 빛은 아직 낮인데도 몹시 환해서 길을 찾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김창은 마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건 아무래도 태양의 빛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인 듯했다.

한참 빛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가 보였다. 모닥불로 뭔가를 해먹은 흔적도 있는 걸 보니 정말 여기에 마법사가 사는 모양이었다.

오두막은 생각보다 제법 컸다. 사람 두셋 정도는 살아도 될 법했고 근처에는 창고도 하나 있었다.

육체노동을 싫어하는 마법사치고 제법 잘 지어두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저것도 전부 다 마법으로 한 일이던가.

김창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말에서 내려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창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다지 특이한 것도 없는 창고다. 저 안에는 아마 장작 팰 때 쓰는 도끼 같은 여러 잡동사니가 들어있을 터다.

그러니 굳이 열어볼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김창은 그 문을 열었다.

“손님이냐? 혹시 길 잃은 여행자라고 하진 않겠지?”

문을 열긴 했지만 아주 약간일 뿐이었다. 김창은 안쪽을 볼 새도 없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봐?”

너 본다, 이 새끼야. 김창은 그 말을 목구멍 뒤로 삼키고서 미간을 좁혔다.

“네가 여기 사는 마법사냐?”

“마법사냐고? 새끼가 혀 반쪽은 잘라 먹었나, 말이 왜 그리 짧아?”

마법사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성이었다. 마법사답게 머리에 고깔모자를 쓰고 있긴 한데 별로 어울리진 않았다.

“그럼 넌 혀도 멀쩡한 놈이 왜 반말이냐. 내가 좀 잘라주랴?”

마법사는 허 하고 웃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건방진 새끼네? 너 이름이 뭐냐?”

“김창.”

이름을 들은 마법사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뭐야, 플레이어였냐?”

상대가 플레이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다. 두려워하거나 적대하거나.

그런데 저 마법사는 둘 다 아니었다. 그저 떨떠름할 뿐.

“반응 보니 댁도 그런 것 같은데.”

김창의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햐, 여기서 동향 사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역시나 같은 플레이어였다. 김창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동향 사람은 무슨. 너 내 고향이 어딘지 알아?”

“고향이 어딘지는 몰라도 한국 사람인 건 맞잖아? 해외 런칭도 안 한 망겜인데 설마 외국인은 아닐 거 아냐?”

하기야 그 말이 맞다. 이 게임을 하던 사람 중 대부분은 한국 사람이니 이곳의 플레이어는 대개 한국인이다.

“그래서 댁 이름은 뭔데.”

“박대호.”

원래 저 마법사도 게임에서 사용하던 닉네임이 있을 테지만 굳이 그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서로 얼굴 안 보이는 게임 속이라면 몰라도, 얼굴 맞대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이름을 어떻게 말하나?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뭔가 용건이 있다는 거겠지? 무슨 일로 온 거냐?”

“내 일 때문에 온 건 아니고, 난 그냥 말 전하러 온 거다.”

“무슨 말? 누가 널 보냈는데?”

“에밀리.”

짧게 말하자 마법사가 얼굴을 찡그리듯 웃었다.

“아, 우리 우수 고객님. 그래, 또 뭐가 필요해서 심부름꾼을 보내셨을까?”

김창은 박대호에게 에밀리의 말을 전했다. 그녀가 처한 상황과 요구 사항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마법사는 큭큭 웃기 시작했다.

“뭐야, 그런 재밌는 일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고? 이거 그 현장을 보지 못해서 정말 아쉽군. 설마 여자 하나를 두고 부자끼리 싸우다가 어느 한쪽이 죽어버릴 줄이야. 이야, 이거 너무 한심해서 웃음이 다 나오는데?”

혼자 큭큭 웃는 박대호를 보며 김창은 미간을 좁혔다. 기분 나쁜 새끼.

그가 지금까지 만나온 마법사는 대부분 저 모양이었다. 뭔가 음산한 연구를 하면서 남의 불행을 비웃는 작자들.

물론 세상에는 귀족의 후원을 받거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고상한 마법사들도 많았다. 다만 김창이 그들과 만날 연이 없었을 뿐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칼밥 먹고 사는 놈은 대개 비슷한 수준의 놈을 만나게 되는 법이니까.

“심지어 그 잘난 데노반 가문의 사병들이 고작 한 명한테 깨졌다고? 그 칼잡이란 놈의 얼굴이 궁금해지는군.”

그 칼잡이가 바로 여기에 있지만 박대호가 알 리가 없다. 그는 한참을 큭큭 웃더니 싱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 우수 고객님이 원하는 게 바로 변장 도구란 말이지. 까다로운 물건이지만 못 만들 것도 아니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모습을 영영 바꾸는 마법을 쓸 수 있나? 그건 용이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용은 가끔 모습을 바꾸고 사람들 사이에 숨어든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모습을 오랫동안 바꾸고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유명한 대학의 마법사라고 해도 장시간 동안 모습을 바꾸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산속에 숨어 사는 일개 마법사 따위가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용의 마법을 빌린 건 아니야. 애초에 그런 마법은 쓰는 법도 모르고. 그냥 내 방식은··· 약간의 편법이지.”

“편법?”

“그래, 편법. 대상에게 직접 마법을 거는 게 아니라 도구에 마법을 거는 거다. 좀 더 말해주자면 내 방식은 변신이 아니라 의태에 가까운 건데······. 뭐 말해봤자 네가 알아먹을 것 같진 않군. 그리고 영업 비밀이기도 하고.”

사람 무시하는 게 재수 없군. 김창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다가 곧 그만뒀다. 저 자식의 배에 칼빵 몇 대 놔주면 술술 불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에밀리가 당신의 물건을 자주 이용하는 모양이지. 보통 뭘 사가나?”

“뭘 사가냐고? 숙녀가 마법사한테 살 게 뭐가 있겠어?”

뭐가 있는데? 저주 인형? 김창이 대답 대신 눈썹을 좁히자 마법사가 말했다.

“숙녀라면 누구나 아름답게 보이길 원하지. 나는 그걸 도와줄 뿐이야. 그러니까 화장품 따위를 판다고.”

마법사가 뭘 그딴 걸 만드나? 김창은 어이가 없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왜 동화를 보면 마녀가 지네며 두꺼비를 솥에 넣고 끓여 온갖 약을 만들어내지 않나. 별의별 걸 다 만들어내는 게 마법인데 화장품 따위야.

“인기 상품은 얼굴에 바르는 분이야. 시체처럼 희게 만들어주지. 그리고 피처럼 붉은 입술을 만들어주는 립스틱도 인기가 많아.”

그걸 다 바르면 진짜 귀신 같겠는데. 김창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 외에도 머리에 바르면 윤기가 흐르게 해주는······.”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가만히 뒀다가는 이 쓸데없는 소리를 더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김창은 단호히 말을 끊었다.

“나는 이만 간다. 에밀리에게 답장은 네가 한다고 했으니 알아서 하고.”

“아, 벌써 가려고? 갈 길이 바쁜 모양이군.”

“용건도 끝났는데 더 있어서 뭘 해.”

“하긴 그것도 맞아. 갈 길 바쁘면 가야지. 그런데······.”

박대호가 길게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며 김창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런데 뭐.”

“···너 혼자 온 거냐?”

“혼자 오면 안 되나?”

박대호가 고개를 젓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남자 혼자 보냈지?”

김창은 그 중얼거림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몸을 돌려 박대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대로 말에 올라타 여길 떠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가려 했다.

“이봐.”

그런데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등자에 발 한쪽을 올렸던 김창은 잠깐 고민했다. 굳이 돌아봐야 하나? 이러면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가기 힘들 텐데.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김창은 등자에 올렸던 발을 내리고 마법사를 쳐다봤다.

“또 뭐?”

박대호는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재수 없던 목소리를 더욱 내리깔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보니 내 창고의 문을 여는 것 같던데, 그거 아주 위험한 행동이야. 그냥 창고가 아니라 마법사의 창고니까 말이야. 원래는 그러면 안 돼.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잖냐.”

또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김창은 버릇처럼 칼자루를 매만졌다.

“만약 문을 연 순간에 불꽃이 터져 나왔다면 어쩔 셈이냐? 아니면 마법 화살이라도 나왔다면? 응?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문을 멋대로 열면 안 되지. 어쨌거나 그건 내 개인적인 공간이니까 말이야. 나라면 좀 더 신중했을 거야. 아무래도 마법사의 은신처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좀 더 신중하게······.”

“야.”

“응?”

김창은 이제 인내심이 점차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칼자루에 감긴 가죽의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며 말했다.

“뱀 새끼 몸 꼬는 것도 아니고 말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좀 말해. 아니면 진짜 혀 잘라주랴?”

“······.”

마법사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봤나?”

“뭘?”

“안쪽.”

김창은 웃었다. 음침한 새끼. 내 그럴 줄 알았다.

“보긴 뭘 봐? 네가 사람들 납치해서 가죽 다 벗겨놓은 거? 솜씨가 별로던데.”

박대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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