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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새끼······.”
박대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으르렁대며 김창을 향해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하기야 사람 잡아다 가죽 벗기던 걸 들켰으니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현실에서 자신의 음습한 취미를 들켰을 때의 기분일 텐데.
“뭘 그렇게 노려봐?”
김창의 말은 박대호의 신경을 긁기에 충분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릴 때마다 불씨가 확 튀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는데 당장이라도 마법을 날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그가 아직껏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김창 역시 플레이어기 때문이다. 영주의 기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봤자 전혀 무섭지 않지만 같은 플레이어는 다르니까.
“보아하니 한 번 붙어보려는 모양인데, 그러지 마라. 충고하는 거야. 살려줄 테니까 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해.”
“···뭐?”
김창의 말이 재수 없게 느껴지는 건 둘째치고, 방금 뭐라고? 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고?
박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는 건 뭔 소리인가? 그러니까 사람 가죽 벗기던 걸 마저 하란 소리인가?
“······진심이냐?”
“그래. 아니면 뭐 진짜 한 번 붙어보려고?”
플레이어끼리 분쟁이 발생했을 땐 대부분 대화로 해결하려 한다. 일단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점도 있고 정말로 한 번 붙으면 둘 중 하나는 죽거나 크게 다치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 출신끼리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서로 죽고 죽일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남도 아니고 굳이?
타지에 가면 동포끼리 단단하게 뭉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여기서도 발동했다. 그 때문에 그들끼리 정말 죽일 각오로 싸우는 일은 없다.
그러니 김창이 박대호가 뭘 하든 그냥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박대호가 하던 일이 사람 가죽 벗기는 것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 가죽 벗기던 놈을 그냥 놔주나?”
김창의 태도로 볼 때 박대호와 싸워서 질 것 같아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다. 그는 그냥 박대호가 뭘 하든 관심이 없는 것뿐이다.
“그러면 안 되나? 나는 네가 사람 잡아다 가죽을 벗기든, 그걸로 옷을 만들어 입든, 아니면 떡을 치든 관심 없어. 그러니까 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해.”
이쯤 되니 박대호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람 가죽 벗기던 놈이 할 만한 말은 아니긴 하지만 보통 이런 걸 보면 정의감 같은 게 샘솟지 않나?
더욱이 김창에겐 박대호를 막을 만한 힘이 있을 텐데.
박대호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꾸 이러면 자기가 자기 좀 막아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지 않나.
“대전이가 일어난 후로부터 삼 년인가 지났던가?”
박대호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김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삼 년은 길지. 영문 모를 일 때문에 생긴 충격을 추스르고 이 세상에 적응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야.”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몇 명이나 되는 플레이어들을 만났을 것 같냐. 생각보다 많아. 그네들은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거든.”
박대호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망해가던 게임을, 그것도 새벽에 잠도 안 자고 붙들고 있던 놈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이 몇이나 있을까. 아마 별로 없을 거야. 게다가 그네들이 하던 일이라곤 게임에 접속해서 뭔가를 죽이는 것뿐이었잖아. 그런 놈들이 게임 속에 갇혔다면 뭔 일을 하겠어?”
“······뭔갈 죽이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게임을 너무 오래 해서 머리가 망가진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놈들이었던 건지, 별 이상한 짓거리 하는 놈들이 많더라고. 하기야 현실에선 백수였는데 여기선 칼도 쓰고 마법도 쓸 수 있게 됐으니 오죽하겠냐마는.”
박대호는 이제 슬슬 김창이 하려는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대전이가 일어난 후에 이 대륙에는 제법 큰 혼란이 있었다.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하는 행동은 애새끼나 다름없는 놈들이 대량으로 나타났으니 뭔 일이 벌어지겠나?
그들이 부리는 패악은 몇몇 뜻있는 플레이어들의 노력 덕분에 수습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플레이어들에 의한 사건은 간간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여기 있는 자신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나도 대전이 초반 때 플레이어랍시고 개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놈 몇 명을 죽인 적이 있다. 처음엔 정의감 때문이었는데 나중 되니까 그럴 이유를 못 느끼겠더라고.”
“왜?”
“당장 나만 해도 돈 주면 사람 죽여주는데 내가 뭔 잘난 놈이라고 남의 죄를 징벌하나?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내가 뭐 협객도 아니고 목숨 걸어가며 그럴 이유가 있냐고.”
하기야 김창도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칼잡이인데 남 죄에 대해 왈가불가할 입장은 아니다. 그냥 사람 죽이는 것과 사람 가죽 벗겨서 죽이는 것에 뭔 차이가 있나?
그러니 그는 박대호가 무엇을 하든 참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그냥 서로 갈 길 가자고. 굳이 피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박대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김창은 그걸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선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고삐를 잡고 말의 배를 힘껏 차려는 순간이었다. 싸움이라는 게 늘 그렇듯, 시작은 한순간이었다.
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말이 불길에 휩싸였다.
“이 씹새가······.”
불꽃이 몸을 휘감기 전에 진작 말 위에서 뛰어내린 김창은 바닥을 한 바퀴 뛰어내렸다. 그의 직감은 아주 예리해서 이 정도 기습은 간단히 피할 수 있었다.
“······네 말은 확실히 맞아. 우리끼리 굳이 피 볼 이유는 없지.”
흘끔 본 박대호의 손에선 두 개의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 세상에 레벨 따위는 없지만 불덩이의 크기를 보면 제법 강한 놈일 듯했다.
“그런데 안 되겠어.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게 좋아. 네가 말로는 그냥 서로 갈 길 가자고 했지만 실은 ‘원탁’에 고자질이라도 하러 가는 거면?”
원탁은 플레이어들끼리 만든 일종의 협력 단체다. 어떤 영주도 감히 플레이어를 처벌할 수는 없지만 원탁은 다르다.
플레이어는 더 강한 플레이어에 의해 죽는다.
“······의심병이라도 도졌냐? 나도 돈 받고 사람 죽여주는 놈인데 뭘 잘했다고 거기에 고자질하러 가?”
“그건 여기 용병들도 하는 일이잖아. 한국에선 돈 받고 사람 죽이면 안 되지만 여기선 그래도 돼. 그런데 여기서도 사람 잡아다 가죽 벗기는 건 불법이거든. 그러니 너랑 나랑은 사정이 다르지.”
틀린 말은 아니다. 김창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말을 한 번 보고서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손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올려져 있었다.
“죽이기 전에 묻자. 너 왜 그랬냐?”
“뭘?”
“왜 사람 잡아다 가죽 벗겼냐고. 그게 취미냐?”
“아깐 관심 없다며?”
“그랬는데, 이젠 그냥 죽이면 억울할 것 같아서.”
박대호의 얼굴에 가학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이유는 두 가지야. 첫째는 내 일 때문에 그런 거고.”
마법사가 사람 가죽 벗겨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기껏해야 화장품이나 만들어 파는 마법사가 왜 이런 산속에 숨어야 했을까?
“사람 죽여서 화장품 만드는 거였냐?”
“그래. 그 왜 역사에 보면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면 젊어진다고 믿었던 여자가 있잖아? 이름이 뭐랬더라, 바토리 에르제베트였나. 어쨌거나 그건 개짓거리였지만 여기선 아니야. 사람 죽여서 그 부속물로 화장품 만들면 정말 효과가 있거든. 여긴 마법이란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에밀리는 사람 죽여서 만든 화장품을 샀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대호가 사람 가죽 벗겨서 변장 도구를 만드는 사실도 분명히.
“그럼 두 번째는?”
“그건 그냥 취미. 덕업일치라고 하잖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 아니야?”
씹새끼,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김창도 사람 죽이고 돈 받긴 하지만 그게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가죽 벗기는 게 취미야? 그럼 가죽 공방이나 들어갈 것이지 이게 뭔 개짓거리야.”
“뭐 어때? 여기가 한국이야?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여기도 법 있고 질서도 있어.”
“그래. 그런데 우리가 지켜야 할 법과 질서는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다. 누가 감히 플레이어를 처벌하는가? 그건 같은 플레이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플레이어끼린 싸우지 않는다.
힘없는 법과 질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플레이어에게 그건 아무런 족쇄가 되지 않았다.
“너 혹시 목에 현상금 걸려 있냐.”
“아마? 내가 다른 데서 이 일 하다가 걸려서 여기로 도망친 거거든.”
“그나마 다행이군.”
다행히도 공짜 일은 아니라는 소리다. 심부름 값으로 은화 몇 개 받고 시작한 일인데 아무 보상도 없이 싸워야 한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새끼, 자신만만하네. 너 좀 치냐?”
“아니.”
“아니?”
“좀이 아니라 존나 잘 치지.”
박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뒈지고 나서도 그딴 허세를 부릴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화르륵!
박대호가 양손을 휘두르자 불씨는 거대한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그것은 곧 두 개의 채찍으로 변해서 김창을 향해 날아갔다.
쾅!
가죽 채찍이었다면 그냥 흙먼지나 조금 오르고 말았을 테지만 박대호가 휘두른 건 마법으로 만든 불꽃 채찍이었다.
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고 사방으로 흙이며 자갈이 확 하고 튀었다. 공격에 맞았다면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리고 죽었을 게 분명했다.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채찍의 따가움,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의 뜨거움. 이 두 가지 고통의 조합은 박대호의 가학적인 성격에 아주 잘 맞았다.
그는 지금까지 이 공격으로 죽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끄악!”
흙먼지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곧 박대호의 왼쪽 손목이 날아갔다.
“씨발, 뭔데!”
김창의 칼이 자신의 손목을 잘랐다는 건 알겠다. 그건 눈으로 봤으니 알겠는데 머리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씨발, 뭔 가속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니고서야 저게 말이 되나? 그 잠깐 새에 공격도 피하고 거리까지 좁혔다고?
“씹새끼!”
박대호는 얼른 마법으로 김창과의 거리를 벌렸다.
칼잡이와 마법사의 싸움은 언제나 간단하다. 거리를 좁히면 마법사가 뒈지는 거고, 거리를 못 좁히면 칼잡이가 뒈지는 거다.
그러니 절대로 칼잡이 상대로는 거리를 내줘선 안 된다. 그건 마법사가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대원칙이었다.
박대호는 언제나 그 대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 될 것 같다.
“너 뭐야, 이 미친 새끼야!”
아무리 거리를 벌려도 김창은 바로 쫓아왔다. 이쪽은 점멸 마법을 써가면서 도망치는데 저긴 그냥 발로 뛰면서 쫓아오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뭔데 바로 쫓아오냐고!”
“칼잡이.”
그게 대답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건가? 칼잡이면 그냥 발로 뛰어서 점멸 마법을 뒤쫓는 게 가능하다는 뜻인가?
씹새끼, 그게 됐으면 마법사는 어떻게 살라고? 점멸 쓰고도 죽어야 하는 직업을 대체 누가 해?
“크악!”
기어코 오른쪽 손목도 잘렸다. 그 뒤에는 칼날이 한 번 번쩍이더니 박대호의 허리가 반쯤 잘렸다.
안쪽에서 피며 내장이 줄줄 새는 걸 보면서 박대호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입 안으로 들어온 흙 맛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씨발, 하여튼 밸런스 망겜 같으니라고. 마법사를 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김창의 칼이 그의 목을 잘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