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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를 살리긴 뭘 살려. 너희가 제일 적폐 직업이야.”
김창은 허공에 칼을 휘둘러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그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박대호의 머리를 손으로 집었다.
“이 새끼 현상금이 걸려 있다고 했지.”
그건 아마 원탁에서 건 것이리라. 그들은 플레이어랍시고 패악을 부리고 다니는 놈들을 끔찍이도 싫어하니까.
“죽여서 가면 싫어할 텐데.”
사실 원탁이 현상금을 건 목적은 죄를 지은 플레이어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플레이어가 강하다고 해도 불사의 존재는 아니다. 혼자서 국가를 상대하거나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죄를 지은 놈은 언젠가 죗값을 치르게 된다. 국가가 직접 플레이어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개인이 그걸 뭔 수로 버티나.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도리라지만 원탁 입장에서는 국가가 플레이어를 처벌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NPC 새끼들이 건방지게 플레이어를 죽일 때 원탁은 뭘 했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될 테니까.
또한 죽은 플레이어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설치는 미친놈들이 나타나게 될 게 뻔하니까.
그래서 원탁이 직접 죄를 지은 플레이어에게 현상금을 거는 것이다. 이건 우리 애들이 잘못한 일이니까 우리가 직접 처리하겠다고, 그러니 너희들은 건방지게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기 위해서.
“죽여서 데려갔다고 현상금을 떼먹진 않겠지.”
김창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대호의 머리를 천에 쌌다. 잘린 단면에서 여전히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이 죽었으니 이제 원탁까지 걸어서 가야 할 터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킨겔에게 말 한 마리를 더 뜯어올까? 좀 귀찮긴 하지만 원탁까지 걸어서 갈 수고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하던 김창은 문득 에밀리를 떠올렸다. 사람 죽여서 화장품을 만들던 박대호와 거래하던 젊은 부인.
그녀는 박대호가 뭘 만드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와 거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에 대해서 조금의 책임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럼 돌아가서 그녀도 죽여야 할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던데, 가서 그 머리를 잘라주어야 할까?
김창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 뭘 해야 하는가.
끼이익.
창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천장에 매달린 시체들이 보였다.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시체도 있고 아직 벗기던 중인 것도 있었다.
김창은 칼을 몇 번 휘둘러 천장의 줄을 모두 끊어냈다. 그리고 네 구 정도 되는 시체를 질질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뭘 하려는 것인가?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다.
“삽도 없으니 묻어주진 못하겠고.”
이건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도 아니고 동정도 아니다. 그냥 해야 할 일이니 하는 것뿐이다.
김창은 시체들을 한데 모으고 허리춤의 술통을 끌렀다. 시체들 위에 한 바퀴 뿌린 후, 아직 타오르고 있는 말로부터 불씨를 얻어 그 위로 던졌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시체들을 보던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누구는 이들이 진짜 사람이 아니고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라던데, 박대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래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이런 짓을 벌였을까? 잘 모르겠다. 김창도 사람 죽일 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기에.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박대호가 씹새끼라는 사실.
* * *
원탁은 대전이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가 게임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못 하고 날뛰던 놈들이 워낙 많던 탓에 그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 운영에 있어서 잡음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원래 불만 많은 놈들은 목소리는 커도 제 손으로 뭘 하려는 의지는 없기 때문에 원탁이 붕괴할 우려는 없었다.
그건 원탁에게도, 그리고 이 세상의 주민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쓰레기가 더럽다고 쓰레기통을 없애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랬다간 온갖 쓰레기들이 길거리에 뿌려질 게 뻔하니 원탁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원탁은 자유 도시 칼라드에 자리를 잡았다. 자유 도시답게 영주가 없는 덕에 활동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원탁의 건물은 칼라드 안에서 가장 큰데, 그걸 지을 때 들어간 돈의 일부는 자유민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이루어졌다.
목에 칼 좀 들이밀긴 했지만 어쨌거나.
“걸어서.”
원탁의 접수원이 찡그린 얼굴로 김창을 쳐다봤다. 그가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한 줄 안 모양이다.
“아, 진짜 뭐야. 짜증 나게. 나 바쁜데 헛소리할 거면 꺼지죠?”
접수원은 젊은 아가씨였다. 딱 봐도 일하기 싫어하는 티가 역력한데 민원인에게 함부로 막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플레이어기 때문이다.
그녀는 플레이어라는 지위가 남들한테 싸가지 없게 굴어도 되는 권리쯤 되는 줄 안다. 하기야 몇 없는 여성 플레이어니 항상 떠받들어졌을 것이고 남들한테 깝치다가 처맞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일 터다.
김창은 접수원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겨 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랬다간 한 대 맞고 죽을 텐데 그래선 안 된다.
“의뢰하러 온 거면 저쪽으로 가요. 나 바쁘니까 빨리 꺼져주면 고맙겠는데?”
원탁은 꼭 플레이어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원탁의 플레이어들은 이곳 사람들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괴물 따위를 대신 죽여주는 일도 하고 있다.
접수원은 아마 김창을 의뢰를 하러 온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워낙 허름한 꼴이기도 했으니까.
“난 현상금 받으러 왔는데.”
“뭔 현상금?”
“박대호한테 현상금 건 거 아닌가?”
그 말에 이리저리 서류를 뒤적이던 접수원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혹시 이름이?”
“김창.”
“뭐야, 플레이어였구나. 그러면 말을 하지. 난 서수민이에요.”
이 여자는 별로 강하지 않다. 그러니까 원탁에서 접수원이나 하고 있지.
그녀가 싸가지 없게 굴어도 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곳 주민들한테고 같은 플레이어에겐 아니다.
“잠깐만요. 박대호··· 박대호······. 아, 여기 있다.”
서수민은 서류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빼서 김창에게 내밀었다.
“이거 맞죠?”
서수민이 내민 종이는 현상금 수배지였는데 거기엔 박대호의 얼굴과 현상금이 적혀 있었다. 찬찬히 확인한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은데.”
“그러면 신병 인도 절차를 좀 밟을게요. 박대호 씨는 어디 있어요?”
김창은 허리춤에 매단 보자기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데리고는 왔는데, 안 보는 게 좋아.”
“······왜요, 고문이라도 했나?”
“아니, 그보다 더한 걸 했지.”
김창의 무심한 목소리는 결코 농담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서수민은 윽 소리를 내며 목을 움츠렸다.
“잠깐만요.”
그녀가 잠깐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마 더 윗사람에게 가는 것일 터다.
서수민이 사람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김창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돈을 처발라서 만든 건물답게 원탁 내부는 휘황찬란했다.
이 정도면 어느 영주궁 이상의 화려함이 아닐까. 이리저리 주변을 쳐다보고 있던 김창은 곳곳에 모여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놈들이라면 모두 플레이어일 것이다. 이곳 주민이라면 감히 플레이어의 심기를 거스를까 조심스럽게 행동할 테니까.
“야, 저 새끼가 쳐다보는데?”
너무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던 탓일까. 저쪽에서도 김창의 시선을 눈치채고 말았다.
딱히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지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게 저쪽 입장에선 기분 나빴을 수도 있다. 그건 확실히 김창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뭘 야려, 새끼야?”
하지만 다짜고짜 욕부터 갈기는 것까지 이해해줄 생각은 없었다. 김창은 칼자루 위에 손을 가볍게 올린 채로 저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햐, 이 새끼 눈깔 봐라? 너 여기서 플레이어랑 눈 3초 이상 마주치면 뒈지게 처맞는 거 모르냐?”
김창은 저쪽에서 뭐라 떠들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을 뿐.
하나, 둘, 셋. 일 분이면 떡을 치겠군.
“너 뭐 벙어리냐? 대답 안 해? 아니면 눈을 깔던······.”
“그거 쌍방 적용이냐?”
“······뭐?”
갑작스러운 말에 갑옷을 입은 남자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창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거 쌍방 적용이냐고. 너희도 3초 동안 나 쳐다봤으니까 나도 너희 뒈지게 패도 되냐?”
남자가 움찔했다. 그는 자기 일행들을 쳐다보며 눈길을 나누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새끼가 뭘 쪼개는 거지. 자기들은 셋이니까 용기가 샘솟기라도 하나? 김창은 눈쌀을 찌푸렸다.
“야, 너 이름 뭐냐?”
통성명이나 하면서 시간이라도 끌어볼 셈인가. 하긴 그래야 누군가 소란을 말려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고, 또 뒈지게 처맞고 가오가 상하진 않을 테니.
“김창.”
“그래, 자신감 넘치는 걸 보니 역시 플레이어였구만. 너 여기 처음이지? 난 너 같은 놈들 자주 봤다. 칼 한 번 휘두르면 사람이 죽으니까 내가 막 뭐라도 된 것 같고 그러잖아. 그런데 말이다, 여긴 너 같은 놈들이 수두룩해요. 괜히 깝치다가 다친다? 그러니까 설치지 말고 가서 네 일이나 봐.”
봐줄 테니까 가서 네 일이나 하라는 이야기를 전에 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김창은 옛날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새끼들, 여기서 함부로 깝치면 안 된다는 걸 아는 놈들이 저리 설치나?
“그거 충고냐?”
“그래, 원탁 선배로서 해주는 충고다.”
김창은 접수대에 기대어 비스듬히 섰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이 후배 놈이 선배한테 인사 한번 올려야겠군.”
“음?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야······.”
다가오는 김창을 보고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남자가 손을 뻗어 가볍게 홰홰 내저었다.
그리고 김창을 그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우드득.
“끄악!”
뭔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남자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 회전했다. 그리고 곧장 등이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뭐야!”
다른 사람들도 요란한 소리에 소란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와 함께 있던 다른 남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씹새가!”
두 사람이 동시에 덤벼들었지만 김창은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가까운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선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아 휙 하고 잡아당겼다.
남자는 김창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대신 맞고서 끄엑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가 부러져 허공을 춤추는 가운데 김창의 주먹의 발차기가 벼락처럼 꽂혔다.
“끄악!”
두 사람의 몸이 겹쳐져서 휙 하고 날아가더니 그대로 테이블과 부딪쳐 우당탕 소리를 냈다.
멀리 날아간 두 사람은 숨쉬기가 괴로운지 꺽꺽 소리를 내며 바닥을 버르적거렸다.
“미, 미친 새끼······. 이게 대체 뭔 짓거리······.”
처음에 바닥에 내던져졌던 남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김창은 그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날렸다.
방어를 할 새도 없이 처맞았으니 남자의 얼굴이 뒤로 확 젖혀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입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핏물이 튀는데, 순간 김창의 손이 그 안으로 훅 들어갔다.
혓바닥을 손가락으로 붙잡은 김창은 컥컥 소리를 내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가르침을 주는 거지. 후배가 주는 가르침을 달게 받아라, 씹새야.”
“끄, 끄으윽.”
“뭔 가르침이냐고? 간단해. 깝죽거리면 혀 뽑힌다는 가르침.”
남자는 헉 소리를 내며 김창을 쳐다봤다. 저 미친 새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정말 이대로 혀를 뽑아버릴 것 같은 기세인데 그랬다간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아은대애······.”
“돼. 안 되면 되게 하란 말도 있잖아.”
김창이 정말 혀를 뽑아버릴 듯 세게 잡아당겼다. 남자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한 원탁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