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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7화 (7/200)

7

그만하란다고 그만해야 할 이유는 없다. 김창은 딱히 원탁 소속도 아니고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원탁은 사고를 치고 뒷감당할 자신이 없는 놈들이나 가입하는 것이다. 그럼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그러면 뭘 하든 상관없다. 원탁의 사람을 죽이든 말든.

“그만!”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냉기가 불어닥쳤다. 김창은 저쪽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뭔가 마법적 조화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뒤로 뺐고, 갈 곳을 잃은 마법은 불행히도 남자의 혓바닥을 얼리고 말았다.

“끄아아악!”

손이야 좀 얼어봤자 별 타격이 없지만 혀는 다르다. 남자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웬 남자가 다급히 다가왔다.

그는 키는 물론이고 덩치도 아주 컸는데 생긴 것만 봐선 영락없는 전사였다.

그러나 실은 마법사였으므로 맨손으로 괴물 서넛은 찢어 죽일 것 같은 덩치로 마법이나 깔짝거리고 있으니 참으로 아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씹······. 거기 너희들, 얘랑 친구들 사제한테 데려가. 혀 안 깨지게 조심하고.”

남자는 그냥 김창의 손을 얼려 행동을 제한하려 했을 뿐일 터다. 설마 그걸 피할 줄은 몰랐을 것이고.

뜻밖의 사태에 남자의 얼굴이 약간 굳었지만 김창은 태연했다.

“그러니까 사람한테 함부로 마법을 쓰면 안 되지.”

자기를 놀리는 듯한 말에 남자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좀 놀렸다고 이 녀석도 덤벼들려나.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남자가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대단한 인내심이다. 본래라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마법을 난사했어야 할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알량한 책임감 때문일까? 이유가 어찌 됐든 김창은 그를 더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홀을 가로질러 복도를 지났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남자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실용적인 디자인과 깔끔한 내부 구조가 남자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는 김창을 등지고 서서 정면의 창문을 보고 있었다. 뭔 말이 없어서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가 갑작스레 이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인마, 내 체면 좀 생각해주면 안 되냐? 씹, 거기서 네가 혀 뽑아버리면 뭔 일 생길지 뻔히 알면서······.”

책망하는 말이지만 심하게 타박하는 느낌은 없다. 사실 서로 아는 사이라 그랬다.

김창은 이 덩치 큰 마법사와 구면이었다.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이름도 알고 사정도 알았다.

마법사의 이름은 한석구였다.

“내가 네 체면까지 생각해줘야 하나? 난 원탁 소속도 아닌데.”

“자식아, 그건 네 일방적인 주장이고. 모든 플레이어는 원탁 소속이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뻔히 알면서 그래.”

“그거야말로 그쪽의 일방적인 주장 아닌가?”

한석구는 김창과 말씨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기엔 너무 지쳐 보였으니까.

“창이야, 오랜만에 나타나서 웬일인가 했더니······. 넌 원탁에 사고 치러 나오는 거냐?”

“여기 원탁에서는 3초 동안 눈 마주치면 뒈지게 패도 된다고 하던데. 난 그냥 걔네가 한 말대로 한 것뿐이야.”

“그게 대체 뭔······.”

“그래서, 사고 쳤으니 나 잡아다 감옥에라도 보내게?”

한석구가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야지. 서로 주먹다짐 좀 했다고 감옥 보낼 것까지야 없지만 다신 그러지 않게 경고든 뭐든 해야지.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뭐? 김창이 가만히 있자 한석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러긴 싫군. 일단 너한테 감히 경고씩이나 할 자신도 없거니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껴.”

“어째서?”

“잘했으니까. 잘 팼어, 그 새끼들. 다음에도 또 깝치면 종종 패주고 그래.”

“뭐?”

지금 비꼬나? 남들 보는 눈도 많은 데서 사람 팼다고 꼽이라도 주는 건가? 김창이 눈썹을 까딱거렸지만 한석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잘했다고. 그 양아치 새끼들, 전부터 일은 하지도 않고 거기 모여서 꺼드럭대는 거 보기 싫었는데 잘 팼어. 그런 새끼들은 좀 맞아야 해.”

설마 사람 패고 잘했다는 소리 줄은 몰랐는데. 김창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 새끼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네.”

“의뢰가 들어와도 자기보다 만만한 놈들한테 짬 때리고 맨날 놀기만 하는 놈들인데 마음에 들 리가? 게다가 심심하면 도시 사람들 괴롭히고 여자들 희롱하고 다니는데? 나는 말이야, 껄렁거리는 놈 좋아해요. 너무 꽉 막힌 놈보다 차라리 낫거든. 그런데 그것도 자기 일은 다 해놓고 껄렁거려야지. 자기 일 잘해놓고 놀면 누가 뭐라 해? 안 해놓고 노는 게 문제지.”

김창은 작게 웃었다.

“그럼 혀도 뽑아버리게 그냥 두지.”

“무슨 그런 말을. 그랬다간 뭔 일 생길지 알고.”

“하지만 결국 댁 때문에 혀가 얼어버렸잖아. 잘못하면 그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던데.”

“업무상 과실이라고 해두자고.”

김창은 한석구를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저쪽에서도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김창. 이제 슬슬 이쪽에 정착할 마음이 들었냐?”

“난 그냥 현상금 받으러 온 것뿐이야.”

“박대호 말이지.”

한석구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수민이 말 들어보니까 살려서 데려온 것 같진 않던데. 시체는 어디 있냐?”

“여기.”

쿵.

김창이 대충 던진 보자기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만 들어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씹.”

보자기에 달라붙은 굳은 피, 끔찍한 악취,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파리떼. 김창이 방금 던진 게 뭔지 맞추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말 죽여서 데려오면 어떡해? 플레이어 수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자꾸 줄어들면 곤란해진단 말이야.”

“게임일 땐 PK도 밥 먹듯이 하지 않았나? 뭘 새삼스레?”

“새끼야, 그땐 그냥 게임이었고. 그때 내가 진짜 사람을 죽였냐? 캐릭터를 죽인 거지. 이거랑 같아?”

“박대호는 사람 죽이는 걸 무슨 데이터 쪼가리 죽이는 일쯤으로 생각하던데. 그럼 제 목숨도 결국 데이터 쪼가리일 뿐 아닌가? 그런 놈 좀 죽였다고 성낼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한석구는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서랍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하기야 이 새낀 워낙 죄질이 나쁘긴 했지. 사람 잡아 죽이는 걸 즐기는 미친놈은 몇 명 있었지만 가죽 벗기는 놈은 처음이었으니까. 잘 죽였어. 이 새끼 살려서 감옥에 처넣어봐야 내 속만 터지지. 보고서야 내가 알아서 해결하지.”

“그래, 그럼 이제 정산할까?”

김창은 박대호를 죽이고 난 후의 일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받아야 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다.

“현상금 말하는 거지? 자, 여기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석구가 금고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김창은 능숙하게 잡아챘고 안에 든 돈을 확인했다.

제법 묵직한 게 지금까지 번 돈으로 며칠은 놀아도 될 듯했다.

“그러면 난 간다. 이왕이면 자주 보지 말자고.”

돈도 받았으니 이제 여기 더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괜히 아까처럼 또 시비나 걸리지.

김창은 그대로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담배 연기를 내뿜던 한석구가 다급히 외쳤다.

“아니, 잠깐만! 벌써 가려고? 식사는 못 해도 차라도 마시고 가지?”

“남자랑 둘이서 차 마실 만큼 한가하진 않은데.”

“나도 남자랑 차 마시는 거 안 좋아해. 근데 가기 전에 내 이야기 좀 듣고 가라.”

“원탁에 들어와서 자리 하나 맡아달라는 이야기라면 미리 거절해도 되나?”

“원탁이 왜 너한테 자리 하나 줘야 하는데? 김칫국 마시지 말고 이야기 듣고 가.”

그런 거 아니었어? 김창이 혼자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한석구가 곧 차를 끓여 왔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차분해졌다.

“뜨거우니 천천히 마셔.”

“빨리 마시고 갈 거니까 할 말이나 해.”

“재수 없는 새끼······.”

한석구가 쯧 하고 혀를 찬 후에 말했다.

“너 원탁의 플레이어들이 사람들한테 의뢰도 받고 그러는 거 알지?”

“알지. 그걸로 돈 버는 거 아닌가?”

“용병들이 하는 일이라면 대개 다 하는 것도 알 테고?”

“뭔 말을 하려는 건데?”

한석구가 후 하고 찻잔을 불었다. 뜨거운 김이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너 영지끼리 붙는 영지전 알지? 그거 하면 막 용병 고용하고 그러잖아.”

“그런데?”

“요즘 영지전 유행이 그거야, 용병으로 플레이어 고용하는 거. 근데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냐? 전쟁이 전보다 더 길게 이어져.”

플레이어는 강하다. 혼자서 병사 수십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런 존재가 용병으로 고용됐는데 왜 전쟁은 더 길어진단 말인가? 오히려 더 짧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김창이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자 한석구가 차 한 모금을 마신 후에 말했다.

“왜 그런 줄 아나? 용병을 한쪽만 고용한 게 아니라 양쪽 다 고용해서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생각이 들 텐데, 이게 상관이 있어. 역사를 보면 말이야, 사실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잘 안 싸워. 왜? 걔넨 그냥 돈 받고 온 놈들이라 애향심이나 애국심 같은 게 조금도 없거든. 게다가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와 나중에 같은 주인 밑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척질 만한 짓을 하겠어? 대충 싸우는 척하면서 돈이나 빼먹는 거지.”

“그래서 영주들이 고용한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라고?”

“그래. 진짜 용병들끼리도 그런 짓을 하는데 플레이어들은 어떻겠어? 걔넨 길거리에서 시비 붙어도 자기들끼리 잘 안 싸우는 애들이야. 그런데 전쟁 나가서 서로 죽고 죽이겠어? 절대 안 그래. 대충 싸우는 시늉만 하고 끝내는 거지. 그런데 그거 가지고 영주가 뭐라고 할 수 있나? 기분 나쁘다고 일 때려치우고 가버리면 영주만 엿 되는 건데.”

한심한 이야기다. 김창은 찻잔을 손에 들며 말했다.

“그러면 왜 굳이 플레이어를 용병으로 고용하는 거냐. 어차피 싸우지도 않는데.”

“내가 안 고용해도 적은 고용할 테니까. 냉전 시대 때 핵무장 경쟁하던 거 알지? 어차피 쏠 자신도 없으면서 왜 기를 쓰고 핵을 만들었겠어? 내가 안 만들어도 적은 만들 테니까. 그럼 결국 나도 쏘지도 않을 핵이 있어야 하는 거야. 싸우지도 않는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 것처럼.”

결국 핵이 핵의 억제력이 되는 것처럼 플레이어도 플레이어의 억제력이 된다는 소리다.

“그럼 결국 영지전은 영주의 병사들로만 치러진다는 소리군.”

“그래. 하지만 어느 한쪽이 전투에서 이겨도 상대 쪽 플레이어가 성을 지키고 있으니 점령도 할 수 없어. 그러니 전쟁 기간은 쓸데없이 길어지기만 하지.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전쟁이 길어질수록 받을 돈도 많아지니 나쁠 건 없고.”

참으로 기가 찬 이야기라서 김창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웃기는 새끼들. 이상한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그래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냐? 나도 가서 용병으로 뛰면서 불로소득 타 먹으라고?”

“아니. 그런 좋은 건수가 있으면 내가 가서 먹었지.”

이것도 웃기는 놈이군. 김창이 빤히 쳐다보자 한석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농담이야. 너한테 부탁할 건 별건 아니야. 혹시 설득 잘하나?”

“뭔 설득?”

“내가 왜 용병 이야기를 길게 했겠어? 지금 이 근방에서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까 말한 사정 때문에 전쟁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 원래 이런 건 대충 먹을 만큼만 빨아먹고 돌아오는 게 상도덕인데, 이번에 간 새끼들은 그런 게 없어.”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한 달하고 반 정도. 원래 영지전은 길어도 한 달은 안 넘으니 아주 씹새끼들이지.”

“그래서 걔네 데려오라고?”

“그래. 오죽하면 영주들이 원탁에 사람을 보내서 하소연을 하더라. 제발 자기들 중재 좀 서달라는데, 그게 실은 돈 빨아먹는 귀신 놈들 데려가란 소리지. 모르긴 몰라도 그 영주들은 이제 전쟁 같은 거 절대 안 할걸.”

김창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가서 말한다고 걔네가 듣겠나? 안 들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가서 설득하라고 했잖아.”

“내가 그런 말재주가 있진 않아서.”

한석구가 뭔 소리를 하느냔 얼굴로 말했다.

“말 안 듣는 새끼들 잡아 오라고 보내는 건데 뭔 말재주 타령이야? 가서 대갈통 좀 주물러줘. 그럼 설득될걸.”

김창이 웃었다.

“그런 거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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