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8화 (8/200)

8

김창은 한석구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돈을 많이 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사람 죽이는 것보다 말 안 듣는 놈들 대갈통 좀 주물러주는 게 더 쉽지 않겠나.

“미리 말하는데, 이번에 죽여서 데리고 오면 안 돼.”

내가 사람 죽이는데 환장한 개백정도 아니고 걔네를 굳이 왜 죽이나?

김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그 녀석들이 먼저 칼이라도 들이밀면 모를까, 다짜고짜 죽여서 데리고 올 이유는 없었다.

“걔네 죽여달라고 돈 받은 것도 아닌데 죽일 이유가 있나.”

“···그럼 돈 받았으면 죽일 거냐?”

“돈 받았는데 왜 안 죽여? 난 정직하게 장사해.”

돈 받은 만큼 일 안 하면 확실히 사기가 맞다. 하지만 그게 살인 청부에도 적용이 되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돈 받더라도 사람 죽이는 일은 안 할 것 같은데.

한석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곧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쨌거나 고생 좀 해주라.”

김창은 대답 대신 손만 가볍게 흔들었다. 그는 집무실을 나와 다시 홀로 향했다.

“쟤야?”

“혼자서 세 명을 때려눕히던데······.”

홀을 걷고 있으니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는지 알만했다.

원탁은 본래 플레이어끼리 친목을 다지는 곳이다. 자기들끼리 싸워봤자 득 될 건 없지만 친해지면 득 될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깥에서도 웬만하면 자기들끼리 싸우지 않는 건데 원탁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김창은 신성한 친목의 장인 원탁 안에서 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세 명을 상대로 싸워서 이기기까지 하지 않았나?

당연히 뒤에서 수군거릴 만한 일이다. 친목의 장에서 싸움을 벌인 건방진 놈을 욕하기 위해서든, 그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기 위해서든.

“그런데 쟤 누구야?”

“몰라. 내가 여기 드나드는 놈 얼굴은 얼추 다 알고 있는데 쟨 처음 보는데.”

“원탁에 한 번도 안 와본 게 아닌 이상 얼굴을 처음 볼 수가 있나······.”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은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대강 얼굴을 외우고 있었다. 아주 친하진 않아도 얼굴 보면 누구인지는 다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김창을 알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끼리 뭉치기 시작한 건 원탁이 생기고 난 후인데, 김창은 원탁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김창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한석구처럼 원탁이 생기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저 친구니?”

그러니 저기서 저 친구냐고 묻는 놈도 김창이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그러니까 또 겁도 없이 대가리를 들이미는 것이다.

“네, 맞습니다! 저 새끼 맞아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 얻어맞고 뻗었던 놈들 중 하나다. 김창은 그냥 무시하고 가려다가 등 뒤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안녕! 뭐 바쁜 일 있는 거 아니면 얼굴이나 좀 보여주고 가지?”

명랑한 목소리다. 얼굴 안 보여주고 가면 뭐 뒤통수라도 한 대 때릴 건가?

김창은 턱을 긁적이다가 요구하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 봤으니 됐나? 이제 가도 돼?”

“아니, 안 되겠는데? 통성명도 하고 가야지.”

거기 있는 건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냥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약간 비현실적인 외모였는데 그건 그녀가 요정이라서 그랬다.

요정이라는 게 뭔 소리냐면 그냥 글자 그대로였다. 종족이 인간이 아니라 요정이라는 뜻이다.

모든 캐릭터는 종족이 인간으로 고정이지만 게임에 돈을 처바르면 종족을 바꿀 수도 있다던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김창은 약간 말문이 막혔다. 종족이 바뀐다고 더 세지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돈을 쓰는 미친놈이 진짜 있었네.

게다가 그거 돈 쓴다고 무조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아주 낮은 확률을 뚫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걸 성공한 걸 보면 이 요정 놈은 게임에 미쳤거나 돈이 썩어 넘치거나 둘 중 하나일 듯했다.

“뭘 가만히 있니? 이름 뭐냐니까?”

여자의 재촉에 김창이 입을 열었다.

“김창.”

“김창?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이름도 안 들어봤는데 보긴 뭘 어디서 봐? 김창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약간 쳐들며 말했다.

“넌 뭔데.”

“나? 나 몰라?”

자존감 비대인가? 왜 자길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김창은 친목질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아는 플레이어가 몇 없었다.

그건 그가 친구 없는 사회 부적응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놈들은 신경을 안 써서 그렇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플레이어는 딱 두 종류뿐이다. 날 죽일 수 있는 놈이거나, 아니면 죽여야 하는 놈이거나.

그런데 이 요정은 둘 중 어디에도 해당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산자이라고 들어본 적 없어?”

뭔 이름이 그래? 김창도 자기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산자이는 그보다 더했다.

“뭐 닉네임 같은 거냐?”

꼭 본명을 써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게임 닉네임을 그대로 써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산자이라는 게 뭔 의미인지는 몰라도 닉네임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을 테니.

“아니?”

“산자이가 이름이라고? 한국에 산 씨도 있나?”

“나 한국인 아닌데? 중국인이야!”

중국인도 이 게임을 해? 하기야 중국인이라고 이 게임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겠지만······.

“새벽에 작업장 돌리다가 끌려왔어!”

염병. 그럼 그렇지. 중국인이 이 게임을 왜 하나 했더니 그냥 작업장 돌리던 놈이었다.

그러면 이 요정은 작업장 돌려서 번 돈으로 다시 게임에 현질을 했다는 소리인가? 그건 회사에서 월급 받아서 그 돈으로 다시 회사 물건 사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나.

김창은 뭐 이딴 놈이 다 있지 하고 쳐다봤지만 산자이는 싱글싱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네 따가리들도 다 중국인이냐? 작업장 돌리던 애들이야?”

“아니? 얘네는 그냥 여기서 만난 애들인데 내 부하 삼았어.”

“그래서, 네 부하들 복수하러 왔냐?”

김창이 슬쩍 시선을 돌리니 아까 얻어맞았던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자기 대장이 분명 제 복수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일까.

산자이가 씩 웃더니 말했다.

“그러려고 왔지.”

“그럼 얼른 해.”

김창은 어서 덤비라는 듯 칼자루 위에 손을 올렸다.

“근데 안 할래!”

“아니, 누님!”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산자이는 무시했다. 그녀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얘네 나 믿고 가오나 잡을 줄 알지, 실은 아무것도 없는 애들이거든? 그러니까 어디 가서 처맞고 다녀도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까 얘네가 강했어도 처맞았을 것 같더라고.”

이 여자는 지금 김창과 붙어보지도 않고 실력을 가늠했다는 소리일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뭐 그런 건가?

김창은 픽 웃으며 말했다.

“안 덤빌 거면 좀 꺼지지. 나 바쁜데.”

“나도 바빠! 바쁜데 시간 쪼개서 온 거니까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자구.”

“바쁘면 가서 네 일이나 볼 것이지 왜 자꾸 붙잡는데?”

산자이가 작게 웃으며 턱을 쳐들었다. 건방진 태도인데 얼굴 때문인지 별로 건방져 보이진 않았다.

“우리 일 하나 같이 할까? 우리 길드 들어올 생각 없어?”

길드. 워낙 오랜만에 듣는 소리라 김창은 잠깐 멈칫했다.

하기야 이건 원래 게임이었으니 길드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이젠 게임이 아니게 됐으니 길드 시스템 자체가 남아있진 않아도 길드에 가입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있을 게 아닌가.

“나보고 너희 길드 들어오라고?”

“어!”

“뭐 때문에?”

“인재 영입하는데 이유가 있니? 헤드헌팅이라고 들어봤지? 걔네가 뭐 다른 목적 있어서 면접 제안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이런 제안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원탁과 거리를 두고 각지를 떠돌았던 탓이다.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곧 말했다.

“난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래도 괜찮나?”

“괜찮아! 원래 게임 하는 애들치고 정상인 없어.”

“난 마음에 안 드는 애들이 있으면 일단 칼빵부터 놔주는데, 네 따가리들한테 그래도 되나?”

“뭔 개소리야!”

뒤쪽의 남자가 발끈했으나 산자이가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도 돼.”

“네? 누님, 방금 뭐라고······.”

부하가 당황하건 말건, 산자이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네 죽여도 된다구. 칼빵 놔주든 말든 알아서 해. 그래서, 들어올 거야?”

부하는 아연한 얼굴로 산자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산자이는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김창을 응시했다.

김창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몇 초 정도의 응시 끝에 그가 말했다.

“아니.”

산자이가 명백히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쉽네. 이유가 뭔데? 혹시 다른 길드에서 먼저 제의를 받았다던가?”

“그냥 하기 싫어.”

“우리가 뭔 일 하는지도 모르면서?”

“부하란 새끼들이 자기 심심하다가 괜한 사람한테 시비 걸고 다니는 거 보면 길드 수준도 알만하지. 뭔 일 하는지까지 알 필요가 있나?”

“그래······.”

산자이는 정말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더 매달리진 않았다. 김창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근데 정말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뭐 살인 충동을 못 참는다거나······.”

산자이의 물음에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겠냐? 그냥 한 소리지. 내가 무슨 개백정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왜 죽여. 돈이라도 받았으면 모를까.”

“그럼 돈 받았으면 죽이니?”

“돈 받았으면 일하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돈 주고 고용할 걸 그랬네······.”

차라리 그랬으면 김창도 순순히 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산자이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바쁜 시간 뺏어서 미안해. 다음에 또 보자!”

“싫어.”

그 말을 끝으로 김창은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산자이는 붙잡지 않았고 그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상황을 황망하게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다급히 물었다.

“누님, 정말 그냥 보내요? 저희가 처맞았는데도?”

“너희가 맞을 만하니까 맞았겠지? 그리고 내가 너희 똥 치워주는 사람은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이대로 보내면 다른 길드에서 비웃을 텐데요.”

길드원이 처맞았는데 그냥 보내면 남들 보기에 쫄아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남자는 굳이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단지 거기까지만 말하고 은근히 산자이에게 눈치를 줬을 뿐이다. 그리고 산자이는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 복수는 못 해줘도 너희 패는 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도 돼?”

“아니요······.”

남자는 바로 찌그러졌지만 그래도 아주 입을 다물진 않았다.

“그런데 진짜 왜 그냥 보내시는 겁니까? 물론 플레이어끼리 안 싸우는 게 암묵적인 룰이긴 한데 그건 저 새끼가 먼저 깼잖아요? 우리가 먼저 맞았는데 손 좀 봐준다고 해서 원탁에서 뭐라고 할 것 같진 않은데······.”

“나 센 거 알지?”

“네, 알죠.”

자기 입으로 강하다고 하는 놈치고 진짜 강한 놈은 없다지만 산자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강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남자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저 건방진 놈을 그냥 보내주지? 저 새끼가 좀 세긴 해도 다구리 치면 못 이길 정돈 아닐 텐데······.

“처음엔 기억 가물가물했는데, 생긴 거 보니까 이젠 기억났어. 옛날에 나 작업장 돌릴 때 PK로 캐릭터 싹 다 죽이고 간 놈이 있었는데 그게 쟤거든? 그래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본캐 들고 와서 맞짱 떴는데······.”

“떴는데?”

“개처발렸어. 못 이기겠더라. 남들 하지도 않는 칼잡이 빌드 타길래 뭔 컨셉충인가 했더니만······.”

산자이가 이젠 사라지고 없는 김창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쟨 그냥 사람을 잘 죽여.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지 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