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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9화 (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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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롬 성 영주 허스칼은 가끔 자기가 플레이어였으면 하는 상상을 했다. 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적들 대가리를 서너 개씩 따버리고 손짓 한 번으로 괴물을 불살라 죽이는 플레이어.

만약 내가 플레이어가 된다면 일단 칼 들고 내 약혼자랑 바람났던 씹새끼 집부터 찾아가야지. 그리고 그 새끼 아랫도리를 잘라버리는 거야. 새끼 진짜 좆만하네.

그다음에는 어렸을 때 나 괴롭혔던 귀족 놈을 찾아가는 거야. 그리고 그 새끼 잡아다가 존나 때려야지. 너 그때 재밌었냐? 나한테 왜 그러냐고? 씹새야, 그럼 너는 그때 나한테 왜 그랬는데······.

“······영주님?”

그리고 또 뭘 할까? 근처 귀족들 모아서 도박할 때 같이 손장난하다가 걸렸는데 자기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던 기사 놈을 찾아갈까?

그 새끼도 같이 카드에 장난질했는데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왜 나만 못살게 굴어······. 씹새끼들. 살기 힘들다 진짜.

“출진 시간입니다, 영주님.”

플레이어가 되면 그것 말고 또 뭘 할까? 할 수 있는 일이야 많을 테니 오히려 결정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한 가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주님? 영주님!”

자신을 반복해서 부르는 소리에 허스칼이 반응했다. 그는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로 고개만 돌려 자신의 부관을 쳐다봤다.

부관이라고 해서 별 대단한 놈은 아니고 그냥 칼 잘 쓰길래 병사들 지휘나 좀 하라고 시킨 놈이다.

원래는 성에서 돼지나 잡던 천한 놈이라 굳이 말 나눌 일도 없지만 요즘 들어서 허스칼은 이 백정 놈에게서 이상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오래 봐서 정이라도 들었나? 하기야 한 달도 넘게 이 녀석이랑 얼굴 마주 보고 살고 있으니 친근감이 생겨도 이상할 건 없겠다······.

“씨발, 오늘도 나가야 해?”

“···오늘도 나가야 합니다. 출진 시간입니다.”

출진이라는 건 말 그대로 전장에 나가야 한다는 소리다. 오늘도 나가야 한다는 건 어제도 나갔다는 소리고 그제도 나갔다는 소리다.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그건 내일도 나가야 한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왜 그래야 하냐고?

“오, 허스칼.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오늘은 다들 열심히 해서 이 전쟁을 좀 끝내보자고. 전쟁 시작하고 한 달 더 되지 않았나? 나도 이제 슬슬 원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전부 다 저 씹새끼 때문이다. 허석인가 뭔가 하는 저 뺀질거리는 새끼.

‘망할 새끼, 뭐가 어쩌고 어째? 오늘은 열심히 해서 전쟁 좀 끝내보자고? 씹새끼, 네가 아무것도 안 하니까 이 전쟁이 여기까지 온 건데······.’

허스칼은 이럴 줄 알았으면 플레이어를 용병으로 고용하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마 저쪽 영주도 똑같이 하고 있으리라.

“가자고, 영주님. 영주님이 선두에 서서 씩씩한 모습을 보여줘야 병사들도 힘이 날 거 아니야, 응?”

허석이 뭐라고 지껄이든 허스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축 늘어진 채로 말을 몰 뿐이었다.

“저기 적이 보이는군. 영주님, 명령은?”

허석이 말하자 허스칼은 힘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휙 하고 내렸다.

“···돌격.”

세상에 그리 힘없는 돌격 명령이 있을까. 아마 저쪽 영주도 똑같은 명령을 내렸는지 반대쪽에서도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다.

‘염병, 이게 대체 뭔 짓거리야······.’

수백 명의 병사들이 서로 맞부딪치긴 했는데 우렁찬 함성도 없고 끔찍한 비명 소리도 없다.

의욕 없는 병사들은 허공에 벌레라도 잡는 것처럼 서로 무기를 휘적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매년 벌어지는 정례 훈련 때, 고참 병사들을 불러내서 훈련을 시켰을 때 저런 식으로 훈련하던가? 열심히 하기 싫어서 동작은 대충대충 하는데 그 동작이 또 오랫동안 몸에 익어서 그럴듯한 모습은 나오던.

지금 저 병사들도 그러하다. 저들은 전쟁 벌어지면 무기 쥐고 나오는 징집병이라 따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건만 성의 없는 동작은 제법 그럴싸했다.

하기야 한 달 하고 반 넘게 매일 같이 불려나와서 무기나 휘두르고 있으니 그 동작이 몸에 익을 법도 하다.

이게 실전을 가장한 훈련이라면 허스칼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 실은 실전이라는 게 너무나도 억울하다.

“오, 다들 잘하고 있는데? 몰아붙이는 것 같아. 이대로라면 오늘 우리가 이길지도 모르겠는데.”

뒤에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건 역시나 허석이다. 그는 말 위에 탄 채로 한 손에는 사과를 들고 와작와작 씹어먹고 있다.

마치 연극이라도 구경하는 모양새지만 허스칼은 감히 그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저번에 언제인가, 왜 안 싸우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저 새끼가 뭐랬더라?

“나는 영주님을 지켜야지. 체스 안 해봤어? 다른 거 아무리 잡아도 킹 잡히면 끝인 거 몰라?”

킹 잡히면 게임 끝나지만 킹만 남아도 못 이긴다는 사실은 모르나? 허스칼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나도 이젠 모르겠다. 돈 바닥나서 더 줄 돈 없으면 이 새끼도 알아서 꺼지겠지. 설마 아무것도 없는 영지에서 사람 가죽이라도 벗겨 먹으려고······.’

허스칼은 이제 그냥 영지의 재산이 바닥나길 바랐다. 그러면 굳이 허석이 여기 더 붙어있을 일도 없을 테니까.

“애들한테 적당히 싸우고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이틀 연속 나간 애들은 내일 출진 빼줘. 애들 너무 굴리지 말고 유동적으로 병력 운용해.”

열심히 싸운다고 진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뭐 영주고 병사고 열심히 할 이유가 있나.

허스칼은 말 위에서 한가롭게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뭔 일 안 생기나.

“끄악!”

비명이다. 누가 무기 휘두르다가 실수로 상대 맞추기라도 했나. 거 살살 좀 하지······.

“끄아악!”

“꺽!”

오늘 뭔 날인가? 왜 이리 실수하는 놈들이 많나? 허스칼은 미간을 찡그리며 비명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뭔가 있었다. 처음엔 약간의 소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병사들이 끅끅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마치 불어오는 바람에 갈대가 쓰러지듯 뭔가 휙휙 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쓰러지고 있었다.

“···저쪽 용병이 움직였나?”

내가 듣기론 플레이어들은 다 같은 나라 출신이라 자기들끼린 안 싸운다던데?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나?

“···뭐야?”

가만히 보니 허석도 이게 뭔 일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상대 쪽 용병을 찾는데 거기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결국 용병 두 명은 둘 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들이 한 짓은 아니다. 그러면 대체 누가?

“도망쳐! 도망치라고!”

“저 새끼 뭐야!”

퇴각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병사들이 도망치고 있다. 원래라면 독전관이든 뭐든 누군가가 도망치는 병사들을 통제해야겠지만 그런 것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봐, 저게 뭔가?”

허스칼이 물었지만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그도 눈이 있으니 봐서 안다.

저기서 웬 남자 하나가 손이며 발을 써서 병사들을 날려버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본다고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저게 대체 뭔데? 어디서 나타나서 왜 저러고 있는 건데?

그 답은 허석도 몰랐다.

“저 새끼 저거 플레이어 같은데 갑자기 왜 깽판 치고 지랄······.”

용병 일 뛰는 플레이어는 일종의 개인 사업자다. 알 거 다 아는 같은 업자끼리, 상도덕도 없이 이게 대체 뭔 지랄인가?

남의 업장에 와서 뭐라도 하나 팔아주고 가진 못할 망정 깽판을 치려 해? 씹새끼, 넌 뒈졌다.

아무리 같은 한국인이라도 이건 선을 넘었지.

“어이!”

그런 생각을 한 건 허석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쪽 영주의 용병이 이쪽을 향해 소리를 치는 걸 보면 같이 협동해서 저 불청객을 몰아낼 생각인 듯했다.

“영주님? 나 저 새끼 좀 잡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괜히 얼쩡거리다가 잡혀서 인질 되면 귀찮아지니까 가만히 있어.”

드디어 이 용병이 제대로 된 돈값을 하려는 것인가? 원하던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망할 용병이 드디어 일이란 걸 하게 되는 건가 하고 허스칼은 감격했다.

“이럇!”

허석이 허리춤의 칼을 뽑으며 말 고삐를 세게 흔들었다. 허스칼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허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영주님, 설마 저 용병도 짜고 치는 한 패인 건 아닐까요?”

부관의 물음이었다.

“짜고 치는 한 패? 왜?”

“아니, 그냥 계속 일 안 하고 있기엔 눈치가 보이니까 한 패를 더 불러서 연기하는 걸 수도······.”

“아냐. 허석 저 새끼 성격상 그럴 일은 없어.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건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늘 식량이나 축내는 놈인데.”

“그러면 저 플레이어는 정말 그냥 온 걸까요? 아무 이유도 없이?”

“뭔 이유든 있겠지. 그런데······.”

허스칼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걸 보고 부관이 이상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어떤 말씀을······.”

“나 허석 저 새끼 졌으면 좋겠어. 쟨 좀 처맞아야 할 필요가 있어.”

부관도 동감이었다. 플레이어라고 죄다 나쁜 놈인 건 아니지만 허석은 특히 비호감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인간 원탁 안에서도 제법 센 놈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우리도 비싼 돈 주고 고용했고요. 게다가 우린 두 명이지 않습니까? 저기 갑자기 나타난 놈이 두 명을 이길 것 같진 않은데요.”

“나도 알아. 아는데, 그냥 좀 처맞았으면 좋겠다고.”

사실 여기서 허석이 져버리면 큰일 나는 것은 허스칼이다.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용병이 제대로 일도 하지 않고 쓰러져버리면 그 손해는 누가 감당하나.

그러나 그는 속으로 허석이 지길 바랬다. 정말 지길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처맞는 모습이 보길 원했다.

“애들한테 퇴각하라고 해. 괜히 저기 껴있다가 험한 꼴 당할라.”

부관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뿔나팔을 불었다. 사실 그 소리를 듣기 전부터 병사들은 이미 후퇴하는 중이었으므로 크게 의미는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허석도 병사들이 후퇴하고 있는 걸 봤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뭐 같이 있어봐야 걸리적거리기만 하니까.”

눈치껏 잘 빠졌다. 사실 그냥 도망친 거지만.

“쟤가 먼저 도착하겠는데.”

용병 둘이 같이 협공할 생각으로 움직인 거지만 위치상 저쪽 용병이 먼저 불청객에게 닿을 듯했다.

사실 누가 먼저 가든 상관은 없었다. 허석은 제법 실력 있는 용병이고 마음만 먹으면 저깟 놈 하나쯤이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간다!”

역시나 저쪽 용병이 먼저 도착했다. 그는 쌍칼을 쓰는 전사였는데 허리의 힘만으로 말 위에 단단히 서서 양손을 쫙 벌리고 있었다.

그대로 돌격하여 불청객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셈이다. 허석도 용병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나? 보아하니 저 불청객 놈은 칼도 뽑지 않고 맨손으로 돌격을 받아내려는 것 같은데······.

“뒈져!”

말발굽이 세차게 대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칼이 휙 하고 공기를 갈랐다.

그때 허석은 칼날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쓰러진 말,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일어나지 못하는 용병, 그리고 멀쩡히 선 불청객.

“···뭐?”

생각했던 대로 승부는 길지 않았다. 다만 결과만이 생각과 달랐을 뿐이다.

“네가 허석이냐?”

자신을 부르는 불청객의 모습에 허석은 움찔했다. 내가 쫄았다고? 순간 수치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너 뭐냐?”

“알 거 없고, 네가 허석이냐고.”

“너 뭐냐고, 새끼야! 대답해!”

빽 소리를 지르면서 등 뒤에 멘 도끼로 손을 뻗었다. 사람 머리통 쪼갤 때 쓰던 도낏자루를 손에 쥐니 그제야 안도감 비슷한 게 들었다.

그래, 나도 사람 머리 제법 쪼개던 놈인데 쫄 게 뭐가 있다고······.

“도끼 내려.”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뒈지기 싫으면, 도끼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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