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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진짜 악마한테 영혼 갖다 바친 거 맞냐.”
괴물은 이쪽을 보면서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그 더러운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악마에게 영혼을 갖다 바친 것 같긴 한데······.
“딱 보면 몰라? 몸에서 수상쩍은 기운이 엄청나게 흘러나오고 있잖아.”
허석의 말대로 괴물의 몸에선 악취와 함께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끔찍한 생김새와 더불어 용병이 정말 악마한테 영혼을 갖다 바쳤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래서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악마를 때려잡아도 모자랄 놈이 왜 악마한테 영혼이나 갖다 바치고 있는 건데?”
김창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저기 있는 게 영주의 병사였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갖다 바쳤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일개 병사 따위가 쉽고 빠르게 강한 힘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바쳐야 하니까.
그러나 플레이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원래부터 강한데 왜 악마한테 영혼을? 물론 플레이어 각각의 강함에는 차이가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굳이?
“난들 알아? 씹, 나도 저 자식이 저런 놈인 줄 몰랐다고.”
허석은 주춤거리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미 김창한테 호되게 얻어맞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더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김창이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야.”
“으, 으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섬뜩해서 허석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설마 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같이 싸우라고 할 셈인가?
그랬다간 진짜 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김창이 말했다.
“원탁에 돌아가면 한석구한테 전해.”
“뭘?”
김창이 뛰었다.
“정당방위였다고.”
휙!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매섭게 질주했다. 괴물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그건 오히려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될 뿐이었다.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던 칼과 괴물은 허공에서 한 번 격돌했다. 두 번은 없었다. 그대로 괴물의 오른손이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크에에엑!”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떤 부위를 단칼에 잘라내는 건 제법 힘든 일이다. 부드러운 가죽 아래에는 질긴 근육은 물론이요 단단한 뼈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 신체를 뭉텅뭉텅 잘라내는 건 사실 과장에 가까운 연출이다.
별로 덩치가 크지도 않은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그럴 진데 하물며 동물은 어떨 것인가? 또 그보다 더 질긴 근육과 두꺼운 뼈를 가진 괴물은?
“오우 씹······.”
허석은 도끼 전사로서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는 얄따란 칼보다 더 큰 도끼를 들고 다니지만 방금 김창이 했던 걸 그대로 따라 할 자신이 없다.
저건 단순히 힘이 세다고 되는 게 아니고 기술이 뛰어나가도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둘 다 뛰어나야만 되는 일이다.
“저 새끼가 칼 뽑았으면 진짜 뒈져겠는데······.”
이쪽은 도끼 들고 저쪽은 맨손이었는데도 호되게 처맞았다. 그럼 둘 다 무기를 뽑았으면 뭔 일이 생겼겠는가?
허석은 목덜미를 움츠리며 김창의 싸움을 지켜봤다.
“크아악!”
용병은 악마와 거래했음에도 그리 강해지지 않았다. 힘이며 맷집 따위는 더 강해졌을지 몰라도 전투 능력 자체는 전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성을 잃었으니 무기를 쓰지도 못할 것이요, 지성이 없으니 학습 능력도 없다. 김창에게 있어서 저건 그냥 거대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크악! 크아아악!”
칼날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두꺼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하나 남은 손을 휘두르지만 그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김창은 침착하게 괴물의 움직임을 확인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 괴물은 그저 본능을 따라 난동을 부릴 뿐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모습이었다. 저따위로 싸울 거라면 대체 왜 악마와 거래했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그냥 싸웠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텐데.
“끄엑!”
비명과 함께 괴물의 왼손도 날아갔다. 그다음에는 재빠르게 몸 위를 훑고 지나가는 칼날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이미 살점을 뭉텅이로 잘려서 근육이며 뼈가 드러나고 있던 괴물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몸을 기우뚱거렸다.
김창이 그 종아리를 세게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괴물은 결국 쿵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 위로 재빠르게 올라탄 김창이 역수로 든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케······.”
“그게 네 유언이냐?”
이미 이성을 잃은 괴물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해봤자 비명뿐이다. 더 들어줄 것도 없어서 김창이 칼로 심장을 내리찍으려는 때였다.
“···샤! 케일라!”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김창은 재빨리 몸을 내던졌다.
“케샤 케일라! 아샤 툼!”
빛이 있었다. 새하얀 빛이 아니라 검붉은 빛. 그건 괴물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모두 새어 나오더니 곧 사방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염병!”
가만히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허석은 다급히 등을 돌렸다. 그러나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씹새끼들, 전부 뒈져라!”
마지막 발악과 함께 이성이 돌아온 것일까. 그간 비명만 지르던 괴물의 목소리가 또렷히 들렸다.
도망치던 허석은 문득 고개를 돌려 김창을 쳐다봤다. 저 새낀 도망도 안 치고 저기서 뭐 하나?
“저 새끼 저거?”
놀랍게도 김창은 칼을 들고 가만히 있었다. 정말 가만히 있던 건 아니고 칼을 든 채로 자신을 향해 질주하는 빛과 마주하고 있었다.
뭔 짓을 하려고? 자기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저런 공격을 칼 한 자루 들고 어쩔 셈인가?
허석은 아연한 얼굴로 도망치던 것도 잊고 김창을 쳐다봤다.
다리는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섰고 칼자루는 굳게 쥐었다. 자세는 낮았으나 안정적이었다. 칼은 쥐고, 시선은 곧고, 몸은 단단했으며 기세는 날카로웠다.
칼날이 반짝였다.
“···어?”
먼 옛날 어떤 선지자가 바다를 가른 적이 있다던가? 지금 쏟아져 오는 것은 빛의 물살이니 성난 바다의 그것과 같다.
그러면 그 바다를 가르고 기적을 행할 자가 누구인가? 칼 든 자다. 그저 칼잡이다.
“어어···?”
칼날이 빛을 갈랐다. 불길한 검붉은 빛을 가르고 그대로 곧게 뻗어나가 괴물의 몸을 토막 냈다.
칼 한 자루 들고 해낸 일치고 굉장했다. 허석은 자신이 과연 뭘 봤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눈에 잿빛을 뿌려대고 있는 칼날이 보였다.
“너 그거······.”
칼날에 저런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으니 빛을 가를 수 있었으리라. 머리로는 알겠는데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오러? 이 세상에선 실력 있는 전사가 저런 능력을 쓸 수 있다고 들은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건 원래부터 이 세상에 살던 요정 검사나 인간 영웅 따위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어느 날 갑자기 게임 속으로 끌려온 칼잡이 따위가 오러를 다루고 칼 한 자루만으로 빛을 갈라버리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무래도 가능한 일인 모양이다. 믿기 힘들지만 눈으로 직접 봤으니 부정할 수도 없다.
허석은 입을 쩍 벌린 채로 김창을 가만히 쳐다봤다.
“뭘 야려.”
그 말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저 새끼 저거 저만큼이나 강한데 왜 오늘 처음 보는 거지? 실력만 보면 원탁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텐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저 정도로 강한 플레이어라면 원탁 안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에 이름이 알려져 있어야 했다.
그만큼 강하면 왕국이나 제국에 스카우트 돼서 귀족 못지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던데 저 자식은 왜 원탁의 심부름이나 하고 있을까.
아니면 뭐 힘숨찐 놀이라도 하고 다니는 건가? 허석은 흘끔 김창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역시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괜히 흘끔거리지 말고 시체 챙겨.”
“시, 시체를 챙기라고?”
김창의 말에 깜짝 놀란 허석이 괴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몸이 세로로 길게 찢겨 죽은 괴물이 보였다.
정확히 말해서 이제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마지막 힘을 짜낸 탓인지, 아니면 그냥 목숨이 끊어져서인지 괴물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으니까.
“저걸 왜 챙겨?”
“가서 한석구한테 보고해야 할 거 아냐.”
“근데 그걸 왜 내가······.”
“그럼 내가 하랴?”
김창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허석은 입을 다물었다. 더 대들어봐야 남는 것도 없었다.
“마차라도 한 대 빌려야겠는데······.”
허석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김창은 영주와 병사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댁이 영주인가?”
허스칼은 잠깐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롬 성 영주 허스칼이오. 그쪽은?”
“김창.”
“원탁에서 보냈소?”
“그래.”
허스칼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도움에 감사하지. 덕분에 이 무익한 싸움을 끝낼 수 있게 됐소.”
김창은 그 무익한 싸움을 시작한 게 너희들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손만 맞잡아 가볍게 흔들 뿐이었다.
“별말씀을.”
“그리고······.”
허스칼은 잠깐 눈치를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허석 저 자식을 흠씬 두들겨 패줘서 고맙소. 내 속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이번엔 김창도 웃었다.
“그거야말로, 별말씀을.”
두 사람은 잠깐 웃더니 곧 웃음을 멈추었다.
“하나 물을 게 있는데.”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악마에 대해서 잘 아나?”
허스칼의 얼굴이 굳었다.
“···글쎄. 남들 아는 만큼은 알지. 달콤한 말로 사람을 유혹해서 그 영혼을 빼먹는 간악한 족속들. 지옥에서 올라온 죽음의 사자들.”
“그러면 플레이어를 하수인으로 부릴 만큼 강력한 악마에 대해서도 아나?”
“대악마라 불리는 자들이 있긴 하지. 하지만 굳이 플레이어가 악마의 하수인으로 타락해야 할 이유는 모르겠는데······.”
악마의 힘을 빌려 쓴 것치고 용병은 너무나도 약했다. 그 정도로 약하니까 악마의 하수인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그 결정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어쩌면 자기 의지로 행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 스스로 타락한 게 아니라 굴복했다던가.”
이 세상엔 플레이어가 아니라도 강자가 있다. 요정 검사나 인간 영웅, 난쟁이 전사 따위가 그러하다.
용 역시 강력하며 대악마의 힘은 그에 비견될 만큼 강하다고 했다. 일개 악마 중에도 충분히 플레이어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존재 중 누군가가 플레이어를 공격했다면 원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탐욕적인 악마라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원탁이 두렵지 않은 건가? 그딴 짓을 했다간 토벌당할 텐데.”
“어쩌면 지금껏 웅크려 지내던 존재들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걸지도 모르니. 그러니 조심하시오. 플레이어라고 해서 불사의 존재는 아닐 테니까.”
“그건 내가 조심해야 할 게 아니야.”
김창은 팔오금 사이에 칼날을 당겨 오물을 닦아냈다.
“죽어 나갈 놈들이 걱정해야지.”
참으로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저 칼잡이는 과연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기야 댁이라면.”
허스칼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린 바로 떠나겠다. 시체를 실어야 하는데 마차 한 대를 빌릴 수 있나?”
김창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허스칼은 부관을 시켜 짐마차 한 대를 내오게 했다.
“허석, 시체 실어. 바로 떠난다.”
“쉬지도 않고 바로 간다고? 나도 솔직히 환자인데······.”
구시렁거리던 허석은 김창이 한 번 쳐다보자 곧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맞은 곳이 쑤시는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마차 짐칸에 시체를 실었다.
“···응?”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창이 물었다.
“또 왜?”
“아니, 이 녀석 말이야. 아깐 몰랐는데 어깨에 문신 같은 게 있네. 문신이 아니라 문장인가?”
“그게 뭐?”
허석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잘 보니까 이거 길드 문장이네. 그 왜 산자인가 뭔가 하는 그 중국인이 있는······.”
그 이름이 또 왜 여기서 나오지.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