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한석구가 다짜고짜 마법을 날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이쪽도 칼을 뽑아야 했을 텐데 아무리 막 나가는 놈이라도 원탁에서 살인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나만 아니라 둘 다 말이야.”
한석구의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찻잔에서 쩍쩍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역시 저 몸으로 마법사가 아니라 전사를 해야 했는데. 아니면 마검사를 하던가. 김창이 남몰래 아쉬워하는 사이에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기어코 하나를 죽여서 데려왔군. 그것도 세로로 쭉 찢어서 말이야. 왜, 칼 잘 쓴다고 광고라도 하는 거냐? 하기야 이런 재주가 있는 칼잡이라면 영주들이 웃돈 주고서라도 데려가려 하겠네.”
잔뜩 비꼬는 걸 보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서 뭔 말을 하든 변명처럼 들렸겠지만 다행히도 김창에겐 한패가 있었다.
“석구 형, 그게 아니라 이번에는 사정이 있었어요.”
허석이 끼어들자 한석구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뭔 사정?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사람 찢어 죽일 만한 사정이 대체 뭔데?”
바깥에선 세상 무서울 게 없는 허석이지만 여긴 원탁 안이었고 한석구는 간부 정도 되는 위치였다.
원래 어디서든 완장 단 놈에게 대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서 허석이 땀을 삐질 흘렸다.
“그게 아니고요······. 이 친구가 원래 몇 대 때려주고 끝내려고 했던 건 맞거든요? 제 얼굴 보이시죠. 저 진짜 호되게 맞았습니다.”
허석의 얼굴은 아직도 멍이 남아 있었다.
“근데?”
“여기 세로로 찢겨 죽은 이 친구한테도 그러려고 했죠. 근데 이 씹새가 기절했다가 일어나더니 갑자기 다시 한번 뜨자고 막 대드는 거 아닙니까? 뭐 그것까지야 그럴 수 있는데······ 싸우다가 밀리니까 웬 주문을 외우더라고요? 그러더니 막 괴물로 변신하는데······.”
거기까지 듣고서 한석구가 미간을 찡그렸다.
“괴물로 변신해? 이 새끼 뭐 변신술사라도 돼?”
“쟤 쌍검 전사인데요?”
“그런데 왜 괴물로 변신해?”
“그거야······.”
허석이 김창을 흘끔 쳐다봤다. 줄곧 입 다물고 있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악마와 거래했으니까. 듣자하니 악마숭배자인 것 같던데.”
“···뭐? 악마숭배자?”
한석구가 그게 뭔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 새낀 뭔데 악마를 숭배해?”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뭐? 짐작 가는 데가 있는 거야?”
“몰라.”
모르는데 뭘 알아봐? 한석구가 쳐다보자 김창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근데 수상쩍은 놈이 있긴 해.”
* * *
산자이는 원탁에서 제법 유명한 플레이어다.
일단 그 외모부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하다. 그도 그럴 게 세상에 몇 없는 요정 플레이어가 아닌가.
게다가 그 출신은 또 어떤가? 외국인, 거기다 작업장 돌리던 중국인이라는 독특한 출신은 확실히 잊기 힘든 개성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원탁에서 제법 많은 시비에 휘말렸다. 그 외모에 혹해 추근거리는 얼간이들,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 드는 사람들.
하지만 그러한 시비는 곧 잠잠해졌다. 압도적인 폭력은 모든 걸 해결하기 때문이다.
“이야, 오랜만이네? 혹시 맘 바뀌어서 왔니?”
산자이는 원탁 안에 있었다. 저번의 그 부하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뭐 물어볼 거 있어서.”
“뭔데? 답해주면 우리 길드 들어올 거야?”
“들어가겠냐.”
“그러면 나도 대답 못 해주지?”
산자이가 싱글거리며 웃고 있자 한석구가 불쑥 말했다.
“산자이.”
“석구 아저씨도 왔네? 다들 뭔 일 있어? 김창? 그쪽은 원래 혼자 다니잖아.”
산자이가 김창을 향해 턱짓하자 그가 말했다.
“원래 그랬는데 지금은 일이 좀 있어서.”
“그래? 그게 뭔 일이실까?”
다시 한석구가 끼어들었다.
“산자이, 이거 댁네 길드 문장 맞지?”
한석구가 종이 한 장을 내밀자 산자이가 그걸 받았다. 거기엔 서로 꼬리를 문 두 마리의 뱀이 그려져 있었다.
“맞는데, 이게 왜? 설마 뭔 트집 잡아서 길드 문 닫게 하려는 건 아니실 테고?”
“대답 여하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 혹시 이장우라고 아나?”
산자이가 웃으며 말했다.
“안다면?”
“이장우 몸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던데.”
“그거야 걔가 우리 길드 애니까 그런 거겠죠? 왜, 모든 플레이어는 원탁 소속인데 자기들끼리 길드 만들어서 친목질하는 게 아니꼬우신······.”
“그럼 그 이장우가 악마숭배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또한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도 했다. 누구든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 것이다.
한석구가 노린 게 바로 그 점이었다. 뭔 말을 하든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산자이라도 이 소리를 듣고도 여전히 웃을 수는······.
“알고 있었어요.”
“···뭐?”
시원한 대답에 당황한 건 오히려 한석구였다. 그는 눈을 몇 번 껌뻑이다 멍청하게 물었다.
“알고 있었다고? 이장우가 악마한테 영혼을 갖다 바쳤다는 사실을? 근데 왜 말 안 했어?”
“왜 말해야 하는데요? 그게 뭔 대수인가? 걔가 악마한테 영혼을 바치던 말던.”
한석구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게 뭔?
“그게 왜 대수가 아니야?”
“대수가 아닌 게 맞죠. 그거 과민반응이야.”
“이게 왜 과민반응이야! 멀쩡한 플레이어가 악마의 하수인으로 타락했는데!”
버럭 화를 내는 한석구를 보며 산자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이 게임에 원래 흑마법사 있는 거 알죠? 네크로맨서도 있고 죽음의 기사도 있고 뭐 이것저것 많잖아. 걔네도 설정상으로는 타락한 플레이어 같은 거 아닌가? 그런데 걔네한테는 아무 말 안 하면서 이장우는 욕하는 건 좀 웃기는 일 아냐?”
“그건 원래부터 그런 직업이었던 거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내가 볼 땐 별로 다를 것도 없어. 흑마법사도 사악한 힘 쓰죠? 네크로맨서도 시체 살려서 나쁜 짓 하는 거 맞고. 죽음의 기사는? 걔네는 뭐 시체 먹으면 더 강해지지 않나? 그에 비하면 악마의 하수인 따위는 얌전한 거 아녜요?”
“야! 걔넨 적어도 자기 의지에 따라서 행동해! 그런데 악마의 하수인은? 악마가 명령하면 어디 마을에 가서 무차별 학살이라도 할지 누가 알아?”
“자기 의지로 그딴 짓 한다는 게 더 악랄한 일인데? 그리고 이장우가 정말 자기 의지란 게 없던가요? 내가 알기론 아닌데. 걔가 정말 악마의 충실한 하수인이 됐다면 용병 일 뛰러 나가서도 한 달 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않았겠죠? 악마한테 제물 바쳐야 한다고 병사들 죄다 죽였을 텐데.”
그건 또 맞는 말이라 한석구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으나 바로 내뱉진 못했다.
“그래도······.”
“석구 아저씨, 원탁의 사람으로서 이번 일에 뭔가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인데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거 원래 게임이잖아? 쌍검 전사가 그냥 2차 전직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인데 뭐가 그리 심각해요?”
“이건 게임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내 장담하는데, 원탁의 플레이어 중 절반 넘게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왜냐면 현실감이 없잖아. 게임에서도 칼 휘두르면 사람이 죽어. 그런데 여기서도 칼 휘두르면 사람이 죽네? 그러면 여기가 게임이랑 다를 게 뭐야?”
한석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살아있잖아. 게임에서도 칼 휘두르면 사람 죽고 여기서도 칼 휘두르면 사람 죽지만, 여기 사람은 진짜 살아있잖아. 죽이면 피 나오고 비명도 지르는데 그게 어떻게 게임이랑 똑같아?”
“게임에서도 공격하면 피 나오고 비명 지르는데?”
“이거 순 미친년 아니야······.”
욕을 먹었음에도 산자이는 웃고 있었다.
줄곧 가만히 있던 김창이 물었다.
“왜 악마와 거래하게 그냥 뒀지?”
“이장우 말이야?”
“그래.”
“그거야 더 강해지라고 그랬지? 아, 물론 내가 억지로 시킨 건 아니야! 자기 선택이었어.”
“그러면 네가 악마와의 거래를 주선했다는 거냐?”
그 말에 산자이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선택이었어.”
“데리고 다니던 따까리들한텐 얘기 안 했나?”
“걔네는 하기 싫대. 나는 부하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상사거든? 하기 싫다는 일은 안 시켜!”
그럼 이장우는 정말 자기 의지로 악마와 거래했다는 소리다. 그런 거라면 산자이를 더 추궁해봐야 나올 것도 없다.
“산자이, 네가 정말 이장우에게 악마와의 거래를 주선한 거라면 그 책임을 져야 할 거다!”
한석구가 으르렁대며 외쳤지만 산자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뭔 책임? 책임은 잘못을 했을 때 지는 거죠? 아까도 말했지만 걔가 악마숭배자로서 대량 학살이라도 벌였으면 몰라, 그것도 아닌데 뭔 책임을 져요? 게다가 내가 뭐 악마숭배자 되라고 목에 칼 겨누고 협박했나? 자기 선택인데 왜 내가 책임을 져?”
너무 당당하니 오히려 할 말도 없었다. 한석구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산자이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글싱글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그리구··· 여긴 현실 아닌 거 알죠? 현실에서야 나쁜 놈 있으면 경찰이 잡아가면 그만이지만 여긴 아니잖아. 자신 있으면 해요.”
“···뭘?”
산자이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것뿐인데 기세가 변했다.
“나 잡아갈 자신 있으면 하라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 한바탕 하려는 것처럼 물러서지 않는 산자이,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는 한석구.
산자이는 물론이고 한석구도 원탁 내에서 한가락 하는 플레이어기에 둘이 싸운다면 확실히 대단한 볼거리일 듯했다.
물론 김창은 관심 없었다.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야, 너 어디 가?”
한석구의 질문에 김창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여관에 방 잡고 쉬러.”
“왜 그냥 가는데!”
“그럼 뭘 해야 하는데?”
김창이 고개만 살짝 돌려 물었다.
“쟤랑 한 판 붙기라도 해야 하나?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마녀라고 목 잘라서 거리에 효수라도 해야 해?”
“오, 붙으려고? 아까도 말했지만 자신 있으면 해.”
산자이가 웃고 있는 걸 보니 한석구는 머리에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문제라면 이미 해결된 거 아닌가? 산자이가 악마와 거래하라고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이번 일로 뭔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악마와 거래했던 이장우는 이미 죽었다. 그러면 거기서 끝난 거지 뭘.”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한석구는 또 말문이 막혀 입을 우물거리다가 곧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그래선 안 돼. 이 문제의 뿌리를 뽑아야지.”
“그러면?”
“악마를 죽여. 이장우와 거래했던 그 악마를 죽이라고. 가서 그 악마에게 원탁의 위엄을 보여. 그 더러운 악마 새끼가 누굴 건드렸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라고.”
김창은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묻지 않았다.
“보수는?”
“충분히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원탁은 돈이 많아.”
“내가 만족할 만한 금액이길 바라지.”
그 말을 끝으로 김창은 또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이번엔 산자이가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
“또 뭐?”
짜증스럽게 쳐다보는 김창에게 산자이가 물었다.
“정말 악마를 죽이려 가려구? 왜? 설마 이장우 복수하려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애초에 네가 죽인 놈이니까.”
“악마 죽이는 데 이유가 있나?”
“설마 성기사 지망생? 사악한 것들은 모두 때려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막 그래?”
“뭔 개소리야.”
김창은 진짜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돈을 받았잖아. 그러면 죽여야지.”
“···정말 돈만 주면 뭐든 죽인다고? 이유도 없이?”
“왜 이유가 없어. 돈을 받았는데. 난 받은 만큼 일해.”
산자이는 잠깐 멍해져 있다가 곧 다시 물었다.
“그러면 누가 돈 주고 나 죽이라고 하면 죽이니?”
김창은 산자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견적이라도 재는 것처럼.
“돈을 좀 많이 줘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김창은 성큼성큼 걸어서 자리를 떠났다. 정말 이대로 곧장 악마를 죽이러 갈 듯한 태도였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산자이는 약간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쟤도 보통 미친놈은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