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5화 (15/200)

15

“자신감이 나쁘지 않구나. 하기야 내 사도가 될 자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겠지. 하지만 너 어리석은 자야. 자신감이 과하면 오만이 되고, 오만이 지나치면 곧 죽음이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내가 너에게 죽음에 대해 알려줘야겠느냐?”

김창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쪽도 물어볼 게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그건 싸움이 끝난 다음에 할 일이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쓸데없이 나불거리는 저 머리를 썰어버리는 것뿐이다.

“반항심이 넘치는 눈이군. 일전에 사도로 삼았던 자는 너무 비굴해서 문제였는데 너는 너무 건방져서 문제로군.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너에게 사도로서의 몸가짐에 대해 알려줄······.”

챙!

빠르게 질주한 칼이 박쥐의 날개와 부딪쳤다. 찌르면 그냥 뚫릴 줄 알았는데 마치 강철과 부딪힌 듯 금속음이 나서 조금 놀랐다.

과연 허접한 악마 따위는 아니라는 건가. 김창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이 건방진 것아, 내가 말하고 있는데 감히······.”

챙!

칼이 또다시 날개 위를 훑고 지나갔다. 이번엔 좀 더 세게 휘둘렀더니 약간의 상처가 남았다.

그대로 연격을 이어나가자 쨍한 금속음이 귀를 때렸다.

“너는 내 이름부터 들어라. 나는 검은 첨탑의 주인이며 또한 칼레온의 군주이니······.”

챙!

공격은 더욱 빨라져서 이제 악마는 날개로 몸을 감싸야 했다. 아까까진 여유롭게 말을 지껄이던 악마는 이젠 다급히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물론 김창은 바짝 따라붙으며 더욱 세차게 칼을 휘둘렀다. 악마가 뭐라 지껄이든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본래 여유롭게 공격을 막으며 자기 할 말을 하던 악마도 이젠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갑옷처럼 자신을 지켜주던 날개가 점차 찢겨나가고 있는 걸 보고서 외눈을 부릅떴다.

“이런 씹!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그만 깝죽거리고 내 이름을 들어라! 나는 아카온!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요, 또한 연옥에서 벼려진 창칼이노라! 이 건방진 놈아, 네 이름은 뭐냐!”

꼭 통성명을 해야 하는 건가? 그것도 저토록 거창한 칭호를 줄줄이 말하면서까지?

기사들이 결투를 할 때 저런 식으로 싸운다는 걸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악마 따위가 그런 법도를 지키려 할 줄은 몰랐다.

고결한 기사도 아니고 그저 칼밥 먹고 사는 칼잡이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굳이 이름을 말해주지 못할 건 없었다.

“김창. 그 뭐냐, 그냥 칼잡이.”

“그래, 칼잡이 김창! 오늘 네게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

아카온이 몸을 감싸고 있던 날개를 세게 휘둘렀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거센 바람이 일면서 김창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그냥 버티기엔 너무 강한 바람이라 김창은 칼을 바닥에 꽂았다. 그 사이에 악마가 후읍 하고 숨을 삼키더니 곧 불꽃과 함께 뱉어냈다.

“뒈져라!”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달궜다. 숨을 한 번 삼키는 것만으로도 목에 큰 무리가 갈 게 분명했다.

김창은 잠깐 숨을 참았다가 왼쪽으로 몸을 내던져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그걸 본 악마가 고개를 돌리자 불꽃도 따라서 방향을 틀었다.

“지옥불의 맛이 어떠냐!”

악마의 공격은 확실히 일반적인 불과 달랐다. 훨씬 뜨겁고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김창은 걱정하지 않았다.

불 뿜는 용도 쉬지 않고 불꽃 숨결을 뿜어낼 수는 없다. 용조차 그런데 악마 따위가 불을 뿜어봤자 얼마나 더 뿜는다고.

“쥐새끼처럼 잽싸구나! 그럼 이것도 피할 수 있는지 볼까!”

생각대로였다. 아카온은 한참 불꽃을 뿜다가 곧 두 손을 휘둘러 허공에서 검은 창 두 자루를 불러냈다.

길이가 길쭉하여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창은 그 끝이 날카롭고 사악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아카온은 그 두 자루의 창을 빙그르르 회전시키더니 곧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 거대한 몸으로도 저리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김창은 칼자루를 고쳐 잡고 공격에 대비했다.

쿵!

분명 창과 칼이 부딪쳤는데 금속음이 아니라 훨씬 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정도로 아카온이 휘두른 창이 묵직했기 때문이다.

김창은 칼을 한 번 받아낼 때마다 손목이 저릿한 걸 느꼈다. 그래, 주제에 악마라고 힘 좀 쓴다 이거지.

한참 무기를 맞대고 있다 보니 이장우가 왜 자존심도 없이 아카온에게 영혼을 갖다 바쳤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녀석 제법 강한데.’

아카온은 강하다. 김창도 지금까지 악마를 몇 마리 죽여봤지만 그건 그냥 게임 속에서부터 존재하던 데이터 쪼가리였을 뿐이다.

그러나 아카온은 그런 가짜 악마 따위가 아니다. 먼 옛날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며 인간의 영혼을 수확하던 사악한 존재.

이장우가 아카온에게 쉽사리 굴복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악마가 두렵기도 하거니와 이런 강력한 존재로부터 힘을 받으면 자신도 좀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뭔 의미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산자이에게 득 될 건 없어 보이는데.’

이장우가 강해진다고 해도 악마의 하수인이 돼버리면 그건 결국 길드의 손실이 아닌가? 산자이는 왜 그런 일을 권했나?

그녀와 아카온이 동맹이라서? 그럼 김창이 악마를 죽이러 가는 걸 막았어야지 왜 가만히 있었나? 덤볐다가 죽을까 봐?

그것도 이유는 되겠지만······.

“뭘 딴생각을 하는 거냐, 건방진 놈!”

챙!

김창이 든 칼은 한 자루뿐이지만 아카온은 창 두 자루를 들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을 막아도 다음 공격이 빠르게 날아왔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탓에 다음 공격에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얼른 몸을 뒤로 당겼지만 왼쪽 손목에 얕게 상처가 남고 말았다.

단지 창날에 베였을 뿐인데 상처 사이로 검은 연기가 솟는 게 보였다. 주제에 악마라고 뭔가 특수한 능력이 있는 모양이지.

김창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자 아카온이 외눈을 부릅떴다.

“뭘―웃―어!”

웃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하나? 참 성격 더러운 악마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아카온이 창 한 자루를 머리 위로 들었다.

두꺼운 근육에 힘줄이 불끈 솟더니 창대가 부러지도록 꽉 쥐는 게 보였다. 뭘 하려는지는 뻔했다.

“꿰뚫어라!”

간결한 외침과 함께 아카온이 창 한 자루를 투척했다.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날아온 창은 검은색 기운에 휩싸이더니 곧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을 가르는 벼락이었다. 빛을 죽이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검은 벼락불이었다.

과연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저런 걸 할 수 있는 상대와 싸우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창은 도망치지 않았다. 싸움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칼 한 자루를 들고서 악마와 대적했을 뿐이다.

“겁이라도 집어먹은 거냐? 왜 가만히······.”

대답은 없었다.

그저 칼이 울었다. 재를 흩뿌리며.

서걱!

날아온 창을 향해 가볍게 칼날을 갖다 댔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성난 기세로 날아오던 창은 창끝부터 시작해서 창대 끝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여전히 날아가던 기세가 남은 창은 두 갈래로 갈라져 허공을 날다가 곧 바닥에 꽂혔다. 원래는 성벽조차 무너트릴 만한 공격이건만 단지 그걸로 끝났다.

“······뭐?”

아카온은 외눈을 끔뻑였다. 그 바보 같은 얼굴을 향해 김창이 말했다.

“왜, 설마 받아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아, 아니······. 그건 받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카온은 슬쩍 눈알을 굴려 김창의 칼날을 봤다. 거기엔 선명하게 보이는 잿빛의 칼날이 있었다.

저게 무엇인가. 오랜 시간을 산 악마조차 몇 보지 못한 재주다.

“오러를 다룰 수 있다고? 네가? 그건 인간 용사나 오래 산 요정 기사 정도는 돼야 다룰 수 있는 건데······.”

“그럼 내가 걔네보다 강한 모양이지.”

무심하게 말한 뒤에 김창은 칼자루를 고쳐잡았다. 이제 저쪽에 남은 무기는 창 한 자루뿐이다. 그새 또 불을 뿜을 것 같진 않으니 금방 끝낼 수 있었다.

탁.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뛰자 아카온이 재빨리 투창 자세를 잡았다. 또 던질 셈인가. 그래봤자 별 의미 없는데.

김창은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저쪽이 학습 능력이 없다면 그냥 아까 했던 걸 반복했을 뿐이다.

날아오는 창을 향해 오러가 넘실거리는 칼을 휘두르기. 아카온에게 격의 차이를 보여주는 건 그걸로 충분했다.

“어어······.”

아카온도 이쯤 되니 깨달은 게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인간들의 영혼을 수집하면서 그들의 언행에 대해 몇 가지 배운 게 있었다. 이럴 땐 뭐라고 하더라?

“좆됐······.”

지금까지 줄곧 무게감 있는 어투를 고수하던 아카온이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그는 허공에서 또 한 번 두 갈래로 갈라진 창을 보고서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사냥꾼으로서 사냥감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사냥감이었나?

깨달음은 늦었으나 도망은 빨라야 했다.

“저리 꺼져라!”

아카온은 날개를 거칠게 휘둘러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창이 잠깐 주춤하는 새에 그대로 날아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끄악!”

날갯짓을 한 번 해보기도 전에 잿빛의 칼날이 번쩍였다. 오른쪽 날개가 잘리더니 그다음은 왼쪽이었다.

순식간에 날개를 모두 잘린 아카온은 대신 주문을 외워 도망치려 했다. 물론 그것도 안 됐다.

“크헥!”

주문을 외우기 전에 날카로운 칼날이 얼굴 위를 크게 긋고 지나갔다. 불타는 듯한 외눈이 닫히고 입술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순간 깜깜해진 시야 때문에 당황하는 사이에 오른쪽 어깨가 날아갔다. 이젠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다음으로 왼쪽 어깨가 날아가더니 곧 허벅지에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아카온은 몹시 굴욕스럽게도 겨우 인간 따위에게 굴복해야 했다.

“내가 졌다······. 네 뜻대로 하라.”

육체는 굴복했으나 정신까지 그러진 않았다. 아카온은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였고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였다.

지상에 현현한 육체가 쓰러진다 해도 영혼만 멀쩡히 도망칠 수 있다면 지옥에서 힘을 길러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굴욕을 감내할 때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 때를 노리면······.

“끄아악!”

아카온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잠시 뒤 김창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질기진 않은데.”

“끄악, 씹새! 뭐 하는 짓거리냐!”

“여긴가? 여길 찌르면 죽나?”

“끅! 끄윽!”

김창은 칼을 들고서 아카온의 몸 곳곳을 찌르고 있었다.

“안 죽네. 더 찔러봐도 되겠어.”

“이 미치광이 놈! 대체 뭐 하는 거냐!”

“뭘 하긴? 마음대로 하라며?”

“그러니까 대체 뭘······.”

“내가 듣기로 악마는 신성력이 없는 공격으로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던데. 그래서 그냥 칼로 찔러 죽여봤자 육체만 사라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떠난다고 하더라고.”

그걸 알고 있었나? 아카온은 당황했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김창은 성직자도 아니요 또한 성기사도 아니다. 그저 칼잡이일 뿐이니 아카온을 진정으로 죽일 방법은 없다.

또한 성직자나 성기사를 데려오기엔 도시까지 너무 멀다. 그러니 아카온은 김창이 뭘 하든 정말 죽을 위험은 없는 것이다.

“크큭······.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니 넌 날 정말 죽일 방법이 없는 것이지. 오늘 네 무용은 정말 대단했다. 내 감탄했노라. 오늘은 이렇게 물러가지만 다음에도 네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 끄아아악! 씹새야! 말 좀 끝까지 들어!”

김창은 시끄럽게 주절거리는 아카온의 배에 칼침을 박은 뒤 반 바퀴 돌려줬다.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널 죽일 방법이 없어서 안 죽이는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살려두는 거지.”

김창이 주머니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그걸 쭉 찢자 허공에 차원문이 열렸다.

“이제부턴 말 잘해야 할 거다. 나보다 더한 새끼가 올 거거든.”

“뭐? 대체 누가 오는······.”

아카온은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가 왔음을 알았다. 훤히 빛나는 태양처럼 강렬한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냐? 우리 애 꼬드겨서 나쁜 물 들인 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