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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6화 (1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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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사 정복자는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자(福子). 말 그대로 복 있는 놈이라는 뜻이다. 할아버지가 대체 왜 손자 이름을 그따위로 지었는지 모르겠고 부모님은 또 왜 안 말렸는지 모르겠다.

원래 인생은 이름 따라 간다고, 이름이 개떡 같으면 인생도 개떡 같다더니 정복자의 인생은 그 반대였다.

복 있는 놈이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났으면서 그의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이름 때문에 어딜 가든 늘 놀림을 받으니 행복할 수가 있나?

그건 감수성 풍부한 청소년에게 있어서 끔찍한 형벌이요, 또한 체면이 중요한 직장인에게도 아주 엿 같은 일이었다.

정복자는 27년을 그 개 같은 이름으로 살았다. 이제 더는 이 수모를 견딜 수 없었기에 27살 생일날 개명 신청을 했다.

그리고 게임 속에 끌려왔다.

결국 개명을 못 했으니 이름은 여전히 정복자고 다시 개명 신청을 할 수도 없으니 영원히 정복자로 살아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정복자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정복자(征服者)가 되었으니까.

“너냐? 우리 애 꼬드겨서 나쁜 물 들인 게?”

정복자는 원탁에서 가장 강한 성기사다. 그의 신성력은 태양처럼 환하고 뜨거워서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주변이 환해진다.

또한 성기사답게 강력한 힘과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져 어지간한 적들은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가 철퇴를 한 번 휘두르면 괴물의 대가리가 수박처럼 으깨진다고 했다.

성기사 정복자는 이 세상에서 모든 악을 정벌하는 존재였다. 이름 그대로 정말 정복자였던 것이다.

“서, 성기사······?”

악마 아카온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여기 있는 칼잡이 김창도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지만 성기사 정복자는 그보다 더했다.

물론 그건 상성의 문제일 뿐, 두 사람 사이의 우열과는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아카온이 엿 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 이만한 신성력은 신의 대전사나 그 화신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인데······. 하지만 새로운 대전사가 나왔다거나 화신이 강림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거야 내가 신의 대전사도 아니고 화신도 아니니까 그런 거지.”

정복자는 신을 믿지 않았다. 성기사인 건 그냥 캐릭터가 그런 거고 신앙심 같은 건 없었다.

누구는 이 세상에서 직접 이적을 일으키니 신앙심이 생길 만도 하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그건 개소리다.

성기사로서 뭔가 신기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마법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손에서 불길을 일으키는 것과 치유의 빛을 뿜어내는 것, 그 둘이 다를 게 뭔가? 마법사가 마법 좀 썼다고 신을 믿던가? 그런 일은 없다.

그러니 성기사도 굳이 신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설령 정복자가 등에서 빛의 날개를 만들어내거나 눈에서 빛을 쏜다고 해도 그건 그가 잘난 거지 신이 어쩌고 할 일은 아니다.

“대전사도 아니고 화신도 아닌데 이런 신성력이라고? 아무리 플레이어라고 해도 이건······.”

정복자는 아카온이 말을 끝맺게 두지 않았다. 자루까지 전부 쇠로 만든 철퇴를 휘둘러 그 다리를 뭉개버렸을 뿐이다.

“끄아아악!”

신성력이 담긴 것도 아니고 그냥 후려친 것뿐인데도 아카온은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입 닥쳐. 누가 너한테 말해도 된다고 했지?”

“씹, 내가 뭘 어쨌다고······.”

악마로서 이런 굴욕은 참기 힘들다. 그러나 안 참으면 또 어쩔 건가? 아카온은 결국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정복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김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엿 같은 면상도 참 오랜만에 보는군.”

김창과 정복자는 구면이었다. 대전이 초반, 뜻 있는 몇 플레이어들이 자경단 활동을 하던 때 만난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 친구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

왜냐하면 김창은 인간쓰레기들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고, 반대로 정복자는 아무리 그래도 같은 한국인인데 죽일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으니까.

목적은 같아도 방식이 달랐으니 서로 힘을 합칠 수는 없었다. 나중엔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서로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은 서로 안부나 묻고 있을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밀면 몰라도.

“아직도 돈 받고 사람 죽이고 다니냐? 하기야 원래 돈 안 받고도 사람 죽이던 놈이니 돈까지 주면 더 열심히 죽이고 다니겠군.”

빈정거리는 걸 보니 웃음만 나온다. 김창은 비뚜름하게 입술을 기울인 채로 말했다.

“나한테 덤볐다가 죽기 직전까지 갔던 놈이 그딴 소리 하니까 우습군. 왜, 빈정거릴 용기는 있어도 다시 덤빌 용기는 없는 모양이지?”

정복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정복자는 김창과 싸운 적이 있었다. 말다툼을 했다는 게 아니라 정말 서로를 죽일 각오로 싸웠다.

그리고 졌다. 정복자도 원탁 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하지만 김창은 그보다 더 강했으니까.

그때 그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한석구의 개입이 없었다면 정말 죽을 뻔했다.

“···씹새야,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지랄이야? 다시 붙으면 내가 이겨.”

“진짜 이길 것 같았으면 덤볐겠지. 자신이 없으니까 안 덤비는 거고.”

정복자가 철퇴를 으스러질 듯 꽉 쥐었다. 투구 속에 가려진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정말 무기를 휘두르진 않았다.

후우 하고 길게 내뱉은 한숨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석구만 아니었으면 넌 뒈졌다.”

“너는 나 못 이겨. 왜인 줄 아나?”

김창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람을 더 잘 죽이니까. 네가 나보다 괴물은 잘 죽일 줄 몰라도 사람은 아닐걸.”

“···개백정도 아니고 사람 잘 죽이는 게 자랑이냐?”

“당연히 자랑이지. 이 개 같은 세상에선 확실히 자랑할 만한 일 아닌가?”

확실히 그랬다. 여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세상이니 사람 잘 죽이는 건 자랑할 만한 일이고 또 훌륭한 재능이었다.

“······엿 같은 새끼. 내 할 일이나 빨리 하고 돌아가야지. 석구 그 새끼 부탁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안 맡는 건데.”

정복자는 짜증을 내면서 아카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김창은 정복자가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었다.

전부 한석구의 부탁 때문이었다.

‘저쪽에서 스크롤 찢으면 이쪽에 반응이 올 거야. 그럼 그때 스크롤 찢으면 차원문이 열릴 거고 바로 그쪽으로 이동할 수 있어.’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원탁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 생겼으니까······.’

단지 악마에게서 정보를 뜯어내고 그 뒤처리를 하는 거라면 꼭 정복자가 아니어도 됐을 것이다. 원탁엔 그 말고도 다른 성기사가 몇 있으니까.

그런데 굳이 정복자를 보낸 이유가 뭔가? 그거야 뻔하다. 둘이 화해하고 잘 좀 지내보라는 거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군.’

한석구는 원탁을 지키는 게 자기 의무쯤 되는 줄 아는 인간이다. 그는 모든 플레이어가 원탁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굳이 칼라드에 자리를 잡고 자유민들에게 돈을 뜯어내면서까지 원탁을 세웠겠는가? 그곳을 플레이어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만들어 그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다.

그런데 김창은 원탁 바깥에서 떠돌며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한석구 입장에선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원탁에 안 들어오는 게 정복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바보 같은 생각이라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김창이 원탁에 안 들어간 건 그냥 귀찮아서다. 권리는 항상 같은 무게의 의무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이가 없는 건 일단 둘이 같이 붙여두면 화해를 할 거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거 딱 초등학교 교사가 서로 싸운 애들 억지로 악수시키고 사진도 한 장 찍으면 다 해결될 거로 믿는 수준의 얕은 생각인데.’

화해라는 게 남이 시킨다고 되는 일인가? 서로 진심으로 화해할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게 화해 아닌가.

게다가 싸움에서 진 건 정복자고 이긴 건 김창인데 승자가 왜 패자의 눈치를 보나?

한 번 싸운 것 때문에 원탁을 떠난 거라면 김창이 아니라 정복자가 떠났어야 맞는 게 아닌가······.

“끄아악!”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데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아카온의 것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정복자가 신성력으로 아카온의 몸을 지지고 있었다.

“말해라. 네 이름이 뭐냐?”

“끄악! 아카온, 아카온이다! 칼레온의 군주이자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

“칼레온은 뭐지? 지옥의 여덟 기수는 또 뭐냐?”

“끄으윽! 칼레온은 내가 다스리는 영지의 이름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쭉 가면··· 끄아악! 씹,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

“빨리 대답해. 아니면 내가 네 몸을 전부 지져야 하나?”

“크읍······. 여덟 기수는 대악마를 섬기는 자들을 말한다. 두 명의 기수가 한 명의 대악마를 섬기지.”

“이것 봐라? 뭔 설정이 자꾸만 나오네. 왜 아주 마왕도 있다고 그러지.”

정복자는 빈정거렸지만 김창은 그러지 않았다.

아카온의 말이 진짜라면 여덟 기수가 네 명의 대악마를 섬긴다는 소리였다. 굳이 대악마라고 불리는 걸 보면 아카온보다 훨씬 더 강할 텐데 그럼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일까.

김창은 문득 허스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껏 웅크려 지내던 존재들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니 조심하시오. 플레이어라고 해서 불사의 존재는 아닐 테니까.’

그때 자신은 뭐라고 했더라?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 죽어 나갈 놈들이나 걱정해야 한다고도 했고.

그 말대로였다. 만약 정말 대악마나 용, 그 외의 다른 강력한 존재들이 플레이어를 공격하려 든다 해도 김창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도 김창처럼 여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면 정복자나 한석구가 그들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을걸.

“흐흐흐······. 이 빌어먹을 성기사야. 네가 날 죽일 수는 있어도 그걸로 끝은 아닐 것이다. 내 주인께서 널 쫓아 벌하려 들 테니 너는 매일 밤 신에게 기도를 올려야 하리라.”

“난 신 안 믿어, 이 새끼야.”

“하지만 이제부턴 믿어야 할걸······.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신의 대전사도 아니고 화신도 아니라면 대악마의 진정한 힘을 받아낼 수는 없을 테니.”

정복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너처럼 깝죽거리던 놈들은 전부 다 내 철퇴에 대가리가 깨졌지. 네 주인이 얼마나 강하든 똑같을 거다.”

“죽음이 올 거다. 거대한 죽음이······.”

콰직!

정복자는 더 듣기 싫다는 듯 철퇴로 아카온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머리뼈가 부서지고 그 안에 든 질척한 것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신성력을 두르고 후려쳤기에 아카온의 몸은 물론이고 그 영혼까지 완전히 소멸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재를 보면서 정복자가 말했다.

“···저 새끼 말이 사실인 것 같냐?”

“뭔 말? 여덟 기수가 대악마를 섬긴다는 말? 아니면 죽음이 다가온다는 말?”

“둘 다.”

“왜, 겁나나? 아까는 온갖 가오 다 잡았으면서 이제는 또 겁이 나는 모양이지?”

정복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들이 죽을 거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게 겁이 안 나면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하여튼 쓸데없이 성실한 새끼. 악마 대가리는 잘 깨부숴도 사람 죽는 건 또 못 보는 놈.

김창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누가 죽기 전에 대악마를 죄다 잡아 죽이면 되겠군.”

“뭔 수로? 아카온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면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텐데.”

김창이 칼자루 위에 손을 올렸다.

“대악마는 배에 칼 안 들어가나? 칼 찌르면 다 죽어.”

그게 대책이냐? 정복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김창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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