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왜, 감격스러워서 말도 안 나오나? 하기야 너 같은 천한 것이 남작님의 부름을 받을 기회가 흔치 않긴 하지. 따라와라, 남작님께 안내할 테니.”
김창은 저 얍삽하게 생긴 놈의 수염을 뽑아버리려다 참았다. 그래, 당장 할 것도 없는데 또 뭔 개소리를 지껄일지 들어나 보자.
“길 막지 말고 다들 비켜라! 비켜!”
남자가 휙휙 손을 내젓자 전장에서 적의 수급을 챙기고 있던 병사들이 구시렁대며 길을 텄다.
“이쪽이다.”
남작의 거처는 커다란 천막이었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안전한 성내에 있지 않고 직접 출정한 모양이었다.
“남작님, 그 용병 놈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얼른 들어오게.”
“네, 알겠습니다.”
남자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남작님께 무례하게 굴지 마라.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남작님이 턱짓 한 번만 해도 네 목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마음만 먹으면 턱짓하기도 전에 그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을걸. 김창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어이? 내가 네 친구냐?”
남자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김창은 자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까 요정 검사 놈 썰어 죽이는 거 봤나?”
남자는 요정 몸을 칼 한 자루로 썰어버리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잠깐 몸을 떨었다.
“봐, 봤는데? 뭐 어쩌라고?”
그걸 보고도 깝죽거리나? 김창이 남자의 어깨를 꽉 쥐었다.
“끄아악!”
순간 어깨가 부러질 듯한 엄청난 악력에 남자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 소리에 놀라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끄, 끄으읍!”
뿌드득!
분명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깨가 아주 으스러지진 않았어도 아마 며칠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김창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너 한 번 살려주는 거야. 다음에는 그러지 마.”
그러면서 어깨를 놔주는데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또 깝죽거렸다가 이번에는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남자는 용병 따위에게 굴복했다는 수치심과 또 그 무심한 눈빛에 두려움을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때 김창이 불렀다.
“야.”
대답해도 되나? 괜히 또 처맞는 거 아닌가? 남자가 고민하는 사이에 김창이 또 말했다.
“내가 살려줬다고 했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남자는 이젠 저 미친놈이 뭔 짓을 할지 두려울 정도였다.
“고맙다고 해야지.”
“고, 고맙······. 아니, 감사합니다······.”
남자는 얍삽한 얼굴만큼 눈치가 빨랐다. 거기서 고맙다고 말했으면 또 꼬투리를 잡힐지도 모르니 얼른 감사하다고 말을 바꿨다.
다행히도 그건 정답이었다. 김창이 무심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 내 눈에 다신 띄지 말고.”
남자가 후다닥 달아났다. 김창은 몸을 돌려 천막 입구의 천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바깥에서 뭔 일 있었나?”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덩치 큰 남자가 있었다. 나이는 사십쯤 됐을까.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반지 낀 손가락은 통통하다.
그 전형적인 생김새를 보며 김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이 새낀 뭔데 용병이 반말을 하지? 남작의 눈에 그런 의문이 깃들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남작의 어깨를 부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런데 자네는 뭐 칼 장수라도 되나? 뭔 칼을 그리 많이 들고 다니지?”
“내 거 아냐. 오다 주웠어.”
“전리품? 많이도 주웠군······.”
원래 영주의 거처엔 무기를 들고 갈 수 없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김창이 말했다.
“그것보다 날 찾았다던데.”
“아, 그래. 내가 널 찾았지. 오늘 전장에서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더군. 덕분에 이 전쟁을 수월하게 끝낼 수 있겠어. 왜 전쟁이 벌어졌는진 들었나? 광산 때문이야. 몇 달 전에 내 영지 근처에서 금 광산 하나를 발견했지. 지금이야 들어간 돈에 비해 수익이 나오질 않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 아니겠나. 그런데 진짜 문제는, 어떤 염치없는 놈이 내 물건에 손을 대려 한다는 사실이야. 그게 누구냐면 헤르디라는 놈인데 아주 씹새끼야. 가는 곳마다 온갖 말썽을 다 일으키고 다니지. 하여튼 역병 같은 놈. 그런 놈이 있으니까 세상이 혼란스러운······.”
가만히 두면 이야기가 길어지다 못해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 같았다. 김창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서 그 헤르디라는 놈이 상대 쪽 영지 주인인가?”
“아니? 헤르디는 그냥 용병대 대장일 뿐이야. 건달 놈이 출세했지.”
“다른 영지랑 전쟁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고작 용병대랑 싸우고 있었다고?”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용병대의 세가 아무리 강해도 한 영지를 넘볼 정도는 아니지. 내 적은 어떤 가문이야. 아주 부유하고 욕심 많은 가문.”
“어떤 가문이지?”
“아신카. 그러니까 어떤 난쟁이 가문일세.”
난쟁이라고 하면 단순히 키 작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런 종족의 이름일 뿐이다.
키가 작으나 강철 같은 육체를 가진 그들은 모두 날 때부터 전사거나 광부, 또는 대장장이다.
“아신카 가문? 난쟁이 가문이라면 직접 싸우면 될 텐데 왜 용병을 고용했지?”
“그거야 자기네 가문의 피를 흘리기 싫으니까 그런 거겠지. 하여튼 멍청한 놈들, 피 흘리지 않은 금에는 가치가 없다는 걸 모르나?”
남작이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쟁이들은 지하에 도시를 만든다는 걸 알고 있겠지? 아신카 가문도 마찬가지야. 그 두더지 놈들은 원래 지하 도시에서 생활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광산에서 나타나더군. 밑에서부터 굴을 뚫어서 거기로 나온 거지. 그러더니 대뜸 여긴 우리 광산이니 썩 꺼지라던데, 완전히 미친놈들 아닌가? 거긴 내 광산이야. 그런데 자기들이 뭔데 나가라 마라야? 나가려면 자기들이 나가야지.”
김창은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물었다.
“그거 댁네 영지 안에 있는 광산 맞나?”
“아니? 내 영지 안에 광산이 있었으면 진작 다 털어먹었지.”
그럼 그게 왜 자기 건데. 김창이 헛웃음을 흘리자 남작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신카 가문의 지하 도시 안에 있던 광산도 아니지.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그건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뜻이야. 그리고 그 광산은 내가 먼저 찾았으니 내게 맞아.”
그런 거라면 남작이 광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완전히 억지는 아니었다. 정말로 누가 먼저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굳이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나?”
“이유? 있지. 내가 용병 놈 불러서 뭘 시키겠나?”
“헤르디라는 놈을 죽여달라고?”
아신카 가문은 황금을 뿌려 용병들에게 대신 싸움을 시키고 있다. 수많은 용병이 모였을 것이고 그 중심엔 헤르디가 있을 테니 그를 죽이기만 해도 결속은 쉽사리 무너지리라.
하지만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깟 놈이야 우리가 죽일 수 있어. 원래 그 아샤라는 귀쟁이가 좀 성가셨는데 그놈은 자네가 죽이지 않았나? 그러니 이젠 숫자로 우리가 몰아붙일 수 있다네. 그러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럼 칼잡이를 불러서 뭘 시키려는 걸까. 김창이 물었다.
“아직 날 부른 목적을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정말 날 부하로 삼으려고 그러나?”
“···아니. 그건 아니야. 아까 자넨 바깥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내 비서가 호되게 혼난 모양이지? 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지 않겠나.”
생긴 건 탐욕스러운 귀족인데 의외로 상식적으로 행동한다. 김창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별일 아니었어.”
“내 비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어쨌거나 내가 자네를 부른 건··· 그래, 처음엔 칼 좀 잘 쓰길래 부하로 삼으려고 했던 게 맞아. 그런데 이젠 아니야. 자넨 용병이니까 돈 주면 일하지?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그러니까 뭔 부탁?”
“아신카 가문이 헤르디에게 전쟁을 맡겨두고 뭘 하고 있는지 아나? 광산을 점거하고 제멋대로 채굴을 시작하고 있지. 내 금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 광산으로 가.”
가서 뭐 어쩌라고? 김창이 미간을 좁히자 남작이 말했다.
“가서 아신카 가문의 주인을 죽이게. 그러면 다 끝나.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머리를 잃고서 날뛸 수는 없는 법이야. 그들은 복수하겠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 그들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려 한다면 그땐 내가 처바른 황금의 위력을 보여주면 될 일이야.”
“나 혼자서 그게 되리라 생각하나?”
제정신인 영주라면 아무리 칼 잘 쓰는 용병이 있더라도 가서 가문의 주인을 암살하라고 시키진 않는다.
그게 될 것 같으면 전쟁은 왜 하고 병사는 왜 키우나? 그냥 칼잡이 보내서 서로의 머리만 노리지.
남작은 작게 웃더니 말했다.
“당연히 될 거라고 믿네. 왜냐고? 자네 플레이어잖나.”
김창은 부정하지 않았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남작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남작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플레이어는 말이야, 숨기려고 해도 티가 나. 왜냐면 자네들은 이방인이잖나.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사람들. 그러니 숨으려 해도 숨을 수가 없지. 아무리 잘 숨어도 결국은 드러나게 돼 있어. 그런 운명이야.”
남작은 생긴 건 탐욕스러운 귀족인데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갔다. 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대단하군. 그런데 내가 플레이어인 걸 알면서도 부하로 삼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나?”
“그건 오해야. 내가 자네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니까. 난 그저 비서에게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고 그때까진 자네가 플레이어라는 걸 몰랐어.”
그런 거라면야 이해할 수 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뢰는 받아들이지. 다만 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은 떠벌리고 다니지 마라.”
“내 물론이지. 그래서 보수는 뭘로 주면 되겠나? 역시 황금이겠지?”
“가능하다면.”
“곧 광산을 얻게 될 텐데 황금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그런데······.”
남작이 말끝을 흐리는 걸 보고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또 왜?”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칼 말이야, 그거 자세히 보니 귀쟁이 놈이 쓰던 거 아닌가? 막 날아다니는 칼을 조종하는 마법검.”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거 나한테 팔지 않겠나? 난 옛날부터 아티팩트를 가지는 게 소원이었지. 물론 자잘한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야 구하기 쉽겠지만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걸린 건 구하기가 쉽지 않아.”
김창은 자기 손에 들린 네 자루의 칼과 이제 다시 하나가 된 칼 한 자루를 쳐다봤다. 확실히 날아다니는 칼은 위협적이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이런 걸 가질 수 있다면 금화를 궤짝 채로 낼 사람도 많을 것이다. 김창도 이 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그 요정 놈이 이걸 어디서 났냐는 것이다.
일개 용병 따위가 가지고 있기엔 너무 값진 물건이다. 어디서 훔쳤나? 아니면 유적이라도 발견했나?
김창은 문득 칼자루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했다.
뭔 가문의 문장인 것 같은데······.
“어떤가? 값은 넉넉하게 쳐주지.”
남작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깼다.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지.”
김창은 애초에 이 칼을 직접 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날아다니는 칼이 없더라도 상대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그냥 신기한 물건이기에 어디 팔면 돈 좀 될 것 같아서 주워온 것뿐이다. 애초부터 어딘가에 팔아버릴 생각이었으니 좋은 거래처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될 터였다.
“좋아. 그러면 물건값은 일을 끝내고 오면 보수와 함께 줘도 되겠나? 금화를 좀 많이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마음대로 해.”
설마 남작이 돈을 떼먹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목이 날아갈 테니까.
김창이 남작에게 마법검을 건넸다. 남작은 날아다니는 네 자루의 칼은 바닥에 두고 칼들을 조종하는 칼 한 자루를 손에 들었다.
그의 얼굴이 황홀감으로 물들었다.
“이거야······. 내가 줄곧 갖고 싶었던 아티팩트가. 햐, 정말 매끄러운 칼날이군. 그러니까 이걸···. 이걸······.”
남작이 낑낑 소리를 내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어딜 눌러야 쪼개지는 거지······.”
김창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저거 아까 싸울 때 충격으로 마법 풀린 것 같던데.
“아니, 잠깐만. 자네 혹시 이거 고장 난 거 아닌가? 아무리 해도 쪼개지지도 않고 칼이 날지도 않는데······.”
김창은 항의하는 남작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환불 안 돼.”
이거 순 사기꾼 아니야? 남작이 나직이 욕설을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