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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0화 (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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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도 용이 뭔지 안다. 거대한 몸과 두꺼운 비늘, 입에서 뿜는 뜨거운 불길과 자유자재로 다루는 강력한 마법을 가진 존재.

긴 세월을 살아온 용은 반신과 다름없다. 치열한 투쟁과 위대한 업적으로 신성을 얻은 진짜 반신과 다르게 용은 그저 날 때부터 반신적 존재이다.

세상에 용과 싸우려는 자는 없다. 섬기려는 자는 있어도. 바로 저 난쟁이처럼.

“용을 섬긴다고?”

“그래, 내 주인께선 지금 내 눈을 통해 널 보고 있으니 말을 조심해야 할 거다. 네겐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지만 그래도 타죽긴 싫을 것 아니냐?”

김창은 칼자루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난쟁이가 용의 하수인 취급을 받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왜 소설이나 만화, 또는 영화에도 자주 나오지 않는가.

욕심 많은 용이 난쟁이들을 괴롭혀 온갖 귀한 물건들을 바치게 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 나오는 난쟁이들은 대개 용을 싫어했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죽이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자랑스럽게 용의 하수인임을 밝히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런데 이 난쟁이는 용의 하수인인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이게 그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하는 그건가? 괴롭힘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용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러나?

설마 그러려고. 김창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뭘 받기로 했지?”

테레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 말이냐?”

“자발적으로 용을 섬기는 걸 보니 뭔가를 받기로 한 거 아닌가? 설마 진심으로 용을 섬기는 건 아닐 거 아냐.”

테레모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몸속에 들어온 용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잠깐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님에 대한 내 진심을 의심하는군.”

“네 진심에 대해선 조금도 안 궁금해. 난 그냥 네가 뭘 받기로 한 건지가 궁금할 뿐이야. 용이 뭘 주기로 했기에 네 가문까지 동원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냐?”

“뭘 받기로 했냐고?”

테레모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회색 수염이 흔들리더니 곧 멈추었다.

“뭘 받겠나? 용한테 대체 뭘 받겠어?”

“글쎄, 힘?”

“불꽃이다.”

테레모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거기서 불꽃이 타올랐다. 난쟁이 따위가 보여줄 만한 재주는 아니었다.

“세상을 태울 불꽃이지. 나는 산과 들에 불을 지르고 도시를 무너트리며 사람들을 산 채로 태워죽일 것이다.”

방화광인가? 김창은 뭔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난쟁이 놈을 보고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

“장난 같나? 나한텐 그럴 만한 힘이 있어.”

손에서 불 좀 나온다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기껏해야 사람 한둘 정도 태워죽이는 게 다가 아닐까.

김창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만 묻자. 뭐 때문에 그딴 짓을 하지?”

테레모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다. 번들거리는 눈 안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황금의 불이었다.

“옛 왕국을 위해서지. 우리의 고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요정 놈들의 간악한 술수에 휘말려 덧없이 사라지고 만 황금의 왕국.”

“그게 뭔데.”

“말하면 아나? 너 같은 애송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진 왕국인데.”

땅딸보 놈이 너무 깝죽거리는데. 김창은 그냥 당장 달려가서 죽일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왕국을 재건하려고 용의 하수인이 된 거냐? 네 선조가 들었으면 깜짝 놀라겠는데.”

“입 닥쳐라.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모르지. 아무것도 말 안 해줬는데. 김창은 이제 슬슬 이 잡담을 끝내야 함을 알았다.

“용한테는 뭘 바쳤나. 네 가문? 네 영혼?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테레모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랑거리가 생긴 아이처럼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먼 옛날에 천상의 신성을 훔쳐 온 용이 있었다. 그는 그걸 삼켜 제 것으로 만들려 했지만 신성의 주인들이 보낸 대전사와 화신들에 의해 죽음을 맞았지. 그가 죽기 전 뱉어낸 신성은 몇 조각으로 갈라져 대륙 각지에 떨어졌으니 그게 곧 형체 없는 유물이다.”

“네 주인이 그걸 왜 찾지? 더 강해지려고?”

“용은 반신적 존재일 뿐 진정 반신은 아니다. 신성이 없으니 반쪽짜리 신조차 될 수 없지. 또한 신을 믿지 않으니 신성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 진짜 신이 되려면 훔쳐 온 신성을 삼켜야만 한다.”

그걸 삼켜서 뭘 하게? 새로운 신이라도 되려고?

새롭게 신격을 얻어 신이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김창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싹 다 불태우고 멸망한 나라를 되찾겠다는 난쟁이나 신성을 얻어 승천하겠다는 용이나,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군. 그게 되겠냐?”

“그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김창은 칼을 들고서 난쟁이를 겨누었다.

“긴말 안 한다. 덤벼.”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럼 과연 날 이길 수 있을지 볼까!”

테레모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손에 들었다. 인간이 들었다면 조금 짧았겠지만 난쟁이에겐 딱 맞는 길이의 검이었다.

멀리서 불꽃이나 날릴 줄 알았는데 직접 검을 들고 달려들 줄은 몰라서 김창은 호오 하고 소리를 냈다.

“네 영혼을 바쳐라!”

챙!

난쟁이는 키가 작았지만 덩치까지 작지는 않았다. 바위처럼 단단한 육체는 흔들림이 없었고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김창은 테레모와 몇 번 무기를 맞대고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봤다. 이 정도면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나쁘지 않은 실력이다.

요정 검사 아샤가 그랬던 것처럼 테레모 역시 어중간한 플레이어 하나쯤은 충분히 죽일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검술 실력만 해도 그런데 여기에 용의 권능이 더해지면?

“제법 싸우는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한참 무기를 맞대고 싸우던 테레모가 뒤로 훌쩍 뛰더니 두 눈을 부릅떴다. 들고 있던 검에서 불길이 휘몰아쳤다.

검을 감싼 불길은 천장에 닿을 듯 쭉쭉 길어져서 그 길이가 3미터쯤은 될 듯했다. 테레모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곧 힘껏 불꽃의 검을 휘둘렀다.

휙!

길이가 길어진 만큼 공격 범위가 늘어났다. 그냥 한 번 휘두르는 것뿐인데 도망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정면에서 받아주기로 했다.

“하하하! 내가 얻은 권능이 어떠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모든 것을 태워버릴 내 힘을 똑똑히······.”

지이잉.

칼날이 울리더니 곧 잿빛이 감돌았다. 우중충한 색깔의 칼날이 빠르게 쇄도하는 불꽃의 칼날과 부딪쳤다.

“···어어?”

세상에 불꽃을 자를 수 있는 칼이 있을까? 테레모는 우수한 대장장이지만 그런 무기 따윈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거기에 마법이라도 걸면 모를까, 그냥 쇳덩어리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 넘치는 재능과 끝없는 수련, 그 두 가지 조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발현하는 힘.

사람들은 그걸 오러라고 부른다.

“오러? 이런 씹! 그게 뭔 동네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이딴 놈이 왜······.”

김창은 당황하는 테레모를 향해 뛰었다.

거대한 불꽃의 칼날이 어마어마한 거리를 모두 불태우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불길 속을 뚫고 달리면 뜨거운 열기가 옷 위를 스멀스멀 기어갔다.

몸 곳곳에 불씨가 일었다가 그을음이 생기길 반복했으나 무시했다. 뜨겁다고 멈추면 저 불꽃이 다음에 태울 것은 내 몸이다.

“오냐, 와라! 죽여주마!”

테레모가 거대한 불꽃의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힘껏 내리쳤다. 칼날이 가르고 지나간 공기가 달아오르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주변을 감쌌다.

머리 위로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지만 김창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빠르게 질주한 칼날이 불꽃을 베었다.

“뭐냐!”

불꽃이 흩어졌다. 공중에선 붉게 달아오른 칼 조각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저걸 잘랐다고? 테레모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됐다.

“이 미친 새끼!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왜 안 돼. 칼질 좀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씹, 지껄인다고 다 말인가? 테레모가 욕설을 지껄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다, 무기가 없어도 내겐 불꽃이 남았으니······.

“내 영혼을 원한다고 했지.”

불꽃을 꺼낼 새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김창이 또 한 번 칼을 휘둘렀다.

“크악!”

비명과 함께 오른손이 날아갔다. 어찌나 깔끔하게 잘랐는지 고통을 느낄 참도 없었다.

“네 주인에게 전해라.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고.”

“건방진 새끼!”

테레모가 벌컥 화를 내자 오른손이 잘려 나간 손목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그리고 곧 주먹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 새끼 뭐야? 김창은 미간을 찡그렸다.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나는 테레모 아신카! 위대한 자의 청지기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김창은 헛웃음을 흘리며 테레모의 왼쪽 어깨를 잘랐다. 그러자 거기서도 불꽃이 치솟았다.

뭐야, 이거? 다 자르면 몸 전부가 불꽃으로 변하기라도 하나?

김창은 쉬지 않고 칼을 휘둘러 테레모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럴 때마다 불꽃으로 변하는 몸의 부위가 점차 늘어났다.

“나는 진정 불꽃으로 화하노라! 모든 걸 태워버리고 내리는 재 속에서 내 왕국을 세우리라······.”

호기심에 잘게 잘라봤는데 이제 테레모의 몸은 절반 이상이 불꽃이었다. 저러면 남은 부위가 뜨겁지 않을까?

김창이 혼자 생각하는 가운데 테레모가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이제 장난은 끝이다! 내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단검을 든 손이 심장을 겨누었다. 김창이 뭔가를 할 새도 없이 단검이 테레모의 심장을 강하게 찔렀다.

“나···는······ 불꽃이노라······.”

화르륵!

심장을 찔린 테레모의 목소리는 흐릿해졌으나 그 눈만은 더욱 또렷해졌다. 불꽃은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를 장작 삼아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심장을 중심으로 사지말단까지 거칠고 빠르게 불꽃이 질주하는 게 보였다. 테레모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화염 속에서 다시 태어나 진정 불꽃으로 화할 것이다.

“으하하! 힘이 넘치는구나! 너, 건방진 칼잡이야! 곧 내가 너에게 진정한 분노가 무엇인지 가르쳐······ 켁!”

김창이 칼을 휘둘러 테레모의 목을 잘랐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머리가 제법 우스웠다.

“씨발······ 변신하고 있을 때 공격하는 새끼가 어딨어······.”

그럼 등신처럼 그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나? 김창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병신이냐? 그걸 왜 기다려 주는데?”

테레모는 말이 없었다. 머리가 잘린 채로 살 수 있는 생물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어이.”

테레모는 죽었다. 하지만 김창은 그 죽은 머리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분명히 말해서 테레모는 죽었다.

하지만 저 너머에 있는 자는 아직 살아있지 않나.

“용인지 뭔지 하는 도마뱀 놈.”

“으흐흐······.”

테레모가 웃음소리를 흘리자 입안에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빛을 잃고 감겼던 두 눈에서 다시 새로운 빛이 떠올랐다.

“과연, 강하구나. 하기야 이깟 놈이 널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이딴 짓을 하나?”

“뭐 어떠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뭐든 하는 게 이 세상 이치가 아니겠나?”

“정말 신이라도 되려고?”

“글쎄······.”

저 멀리 있는 용이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네 목적이 뭐든 내가 무슨 상관이냐. 또 깝죽거리면 배에 칼 좀 꽂아주면 될 일인데.”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대개 칼로 찌르면 죽는다. 용이라고 다를까? 비늘이 좀 단단하긴 하겠지만 그러면 여러 번 찔러주면 된다.

용의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세상 바깥에서 온 이방인아.”

저 용은 김창이 플레이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용의 통찰력일까 아니면 그냥 조사를 한 걸까.

“우린 다시 보게 될 거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들과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네 운명에 물어라. 넌 그냥 그런 운명이야. 내 하수인과 싸웠던 것처럼 온갖 위험과 고난이 도사리는 불구덩이 속에 몸을 내던져야 할 운명.”

그게 뭔 염병할 소리야. 김창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다음엔 직접 와라. 그래야 네 배에 칼을 꽂아줄 수 있을 테니까.”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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