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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1화 (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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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이제 싸늘한 주검이 된 테레모를 가만히 쳐다봤다. 용의 힘도 완전히 떠나버린 것인지 다시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그 몸을 뒤져보는데 딱히 대단한 건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는 건 기껏해야 금화나 은화, 그리고 잡동사니 몇 개뿐이었다.

생각해보니 테레모는 용의 유물에는 형체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기야 유물의 정체는 용이 훔쳤던 신성이니 형체가 있다고 하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걸 과연 유물이라고 할 수 있나? 애초에 이 난쟁이는 형체도 없는 걸 무슨 수로 제 주인에게 전달하려고 했나?

시체는 아무런 말이 없고 물어도 대답할 일이 없다. 김창은 테레모의 시체를 빤히 바라봤다.

스스로 단검으로 찔렀던 심장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김창은 살면서 신성하다는 말을 몇 번 써본 적이 없었다. 써야 할 때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건 신성했다. 신성이었다.

“이건 또 뭔······.”

신성이 번쩍였다. 알을 깨고 나오는 어린 새처럼, 신성은 심장을 뚫고 나와 비로소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신성은 천상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상에 묻혀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던 빛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김창을 택했다.

돈 받고 사람이나 죽이던 칼잡이가 신성을 얻게 되었다. 이게 뭘 뜻하느냐? 아무것도 뜻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성을 얻었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뭔가 새로운 힘을 얻은 것도 아니요, 또한 신성한 이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된 것도 아니다. 분명 용이 훔쳤던 신성의 한 조각을 얻게 됐음에도 별다른 변화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너무 오래전에 훔쳐 온 거라 상했나? 그러면 용은 멍청하게도 이따위 것을 얻기 위해 헛수고를 한 셈인가?

아니다. 육체의 변화는 없을지언정 한 가지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있었다.

승천의 자격이다.

“별 쓸모도 없는······.”

신성이 없는 자는 승천할 수 없다지만 신성이 있다고 해서 전부 승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몇 조각으로 쪼개진 신성을 가지고 승천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새로운 신이 몇 명이나 더 탄생했어야 맞지 않나?

그런데 새롭게 승천한 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이깟 쥐꼬리만 한 신성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신이 되면 뭘 하나? 그 힘을 써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나? 굳이 돌아갈 이유가 있는지는 둘째치고 과연 할 수 있긴 하나?

그러니 이깟 일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김창은 이제 대륙에 몇 없는 승천할 자가 되었지만 그건 그냥 게임 속 칭호와 다를 게 없다는 소리다.

“도마뱀 놈이 날 찾겠군.”

자신이 가졌어야 할 신성을 대신 가로챘으니 당연한 일이다.

김창은 누군가 용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하길 기대했다. 그럼 정말 용을 죽이러 갈 명분이 생길 테니까.

그때까진 또 어디 싸움에 껴서 칼이나 휘두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림은 아닐 것 같았다.

대전이 이후로 조용했던 세상에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태양을 모독하고 그 빛을 앗아갈 새까만 어둠.

그러면 그걸 몰아낼 자는 누구인가? 이 세상에 다시 빛을 돌려줄 자는 누구인가?

일단 나는 아니다. 김창은 혼자 중얼거리며 테레모의 머리를 챙겼다. 갱도를 오르고 올라 다시 위쪽까지 도착하자 주변에서 불안감에 떠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어 있던 난쟁이들이었다. 그들은 몸 곳곳이 그을리고 손에 웬 머리를 든 김창을 보고서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직감했다.

테레모 아신카가 죽었다. 그러면 우리는? 머리 잃은 가문은 대체 뭘 해야 하나?

“충고하는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나직한 목소리는 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숨어 있던 난쟁이들 모두가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김창은 겁도 없이 뛰쳐나오는 놈이 있다면 그 머리에 칼을 꽂아줄 생각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굴욕적인 침묵은 무시무시한 살육자가 광산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김창은 말을 타고 다시 남작을 찾아 떠났다.

비가 점차 그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이젠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새까만 밤하늘과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그리고 은은하게 빛을 뿌려대는 달을 보면서 몸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았나. 김창은 큼 하고 코를 훌쩍였다. 저 멀리 야영지의 횃불이 보였다.

야영지로 돌아온 그는 곧장 남작의 거처로 향했다.

“난쟁이 놈 죽였다. 확인해 봐라.”

흙발로 남작의 거처로 들어온 무례를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휙 하고 더러운 머리를 던지는 걸 욕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정말이군. 일 처리가 아주 빨라.”

남작은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서 자기 발밑까지 다가온 테레모의 머리를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플레이어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벌써 머리를 잘라 올 줄이야. 그는 왠지 모를 선득함에 목이 말랐다.

만약 이 의뢰를 맡긴 게 자신이 아니라 테레모였다면? 그럼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던 건 자신이었을 테지.

단 한 명에 의해 전장의 결과가 변한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남작은 침을 한 번 삼킨 뒤에 말했다.

“너무 빨리 와서 보수를 마련할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해결했네. 이게 약속한 보수일세.”

남작이 목함 하나를 건넸다. 그 안이 전부 황금으로 꽉 찬 걸 보고서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돈 떼먹을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난 공짜 일은 싫어하거든.”

미친놈. 남작은 속으로 욕을 하며 말했다.

“내 의뢰를 훌륭하게 완수해주어서 고맙네. 덕분에 이 전쟁을 더 끌지 않고 끝낼 수 있게 됐어. 그런데 혹시 아신카 가문의 난쟁이가 뭔 말은 하지 않던가?”

김창은 광산 안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네 욕을 하긴 하던데.”

“하긴 그럴 테지. 그 욕심 많은 땅딸보 놈, 욕심이 과하면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너무 설쳤어.”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거나 수고했네. 며칠 뒤에 승전 축하 연회를 열 생각인데 참가하겠나? 자넨 그럴 자격이 있어.”

“일없다. 하루만 머물고 곧장 떠날 거야.”

“참 급하시군. 어디 가야 할 곳이라도 있나?”

“그야 있지.”

“그게 어디인가?”

김창이 먼 곳을 보며 대답했다.

“원탁.”

* * *

김창이 떠나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돌레아 남작은 드디어 전쟁의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신카 가문은 테레모의 죽음으로 황급히 광산을 떠났고, 고용주를 잃은 헤르디는 용병대를 이끌고 재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이제 남은 것은 광산을 차지하고 신나게 황금을 캐내는 것뿐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기쁜 일이라 남작은 요즘 들어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오늘 웬 불청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 웃음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을 것이다.

“네가 돌레아의 영주냐?”

영주에게 그런 불경한 어투를 쓰는 것은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죄였다.

하지만 남작은 당돌하게 말을 내뱉은 여자에게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시원하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냐. 그럼 소개하마. 나는 일곱 요정 대가문 중 하나, 별 쫓는 자의 후손, 어머니 나무의 자손, 위대한 딜루키둠 가문의 베르고니아다. 또한 나는 전사로서 딜루키둠의 깃발을 드는 자이니 너는 나를 만난 것을 영광으로 알고 머리를 조아려라.”

왜냐하면 자신을 찾아온 불청객이 요정이었고 뒤엔 실력 있는 전사들을 열댓 명이나 대동했기 때문이다.

요정은 여자였는데 남자만큼이나 키고 어깨가 넓었으나 어째서인지 과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머리카락은 녹음의 색이었고 눈은 별처럼 빛났다. 얼굴은 가무잡잡했으나 그게 또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베르고니아는 얇은 옷에 가죽 갑옷을 걸치고 등 뒤에 활을 멨다. 그건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냥하는 건 짐승만이 아닐 터였다.

“나는 돌레아의 영주요. 만나서 별로 반갑지 않긴 한데, 뭔 일이요?”

“너, 열등종의 군주야. 네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느냐?”

내가 또 뭘? 남작은 베르고니아의 시선에 내장이 꼬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럴 때 김창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가 있었다면 당장 저 귀쟁이 놈의 머리통에 칼을 꽂아달라고 했을 텐데.

“기수(旗手)님.”

베르고니아의 뒤쪽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요정이 입을 열었다.

“신록 회의에서 내린 결정에 따르면 열등종은 종족 차별적 발언입니다. 용어를 정정해주시지요.”

“그랬더냐? 그럼 뭐라고 부르지?”

요정이 공손히 대답했다.

“단명종입니다.”

그것도 차별 발언이야, 이 귀쟁이 새끼들아. 남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저 거만한 놈들.

“그래, 그럼 너 단명종의 군주야. 내게 좀 더 공손하게 구는 게 좋을 거다. 널 위해서 하는 충고야.”

그 말대로 안 하면 뭐 목이라도 딸 건가? 남작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 온 목적이 뭐요? 딜루키둠의 요정 나리가 일개 영주 따위를 만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그래, 원래라면 너 따위를 만나러 내가 직접 여기에 올 일은 없지. 그런데 굳이 내가 널 찾아온 것은 찾는 사람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누굴 찾으시는데?”

“아샤리온이라는 요정을 알고 있나?”

“처음 듣는데.”

“내게 감히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니겠지.”

베르고니아의 두 눈이 사납게 빛났다. 사냥꾼의 눈은 일개 영주 따위가 받아내기 어려운 것이라 남작의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오? 아샤리온?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고 요정은 더더욱······.”

잠깐, 아샤리온? 요정? 남작의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그 요정 혹시 이름이 아샤 아니오? 그 왜 마법검을 쓰는······.”

“아샤? 그런 가명을 쓰고 다녔나. 마법검이라면 하늘을 나는 네 자루의 칼을 말하는 거겠지?”

“맞소. 이거 아니오?”

남작은 김창에게 사기를 당해서 산 마법검을 가져 나왔다. 그걸 본 베르고니아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너, 단명종의 군주야. 이걸 왜 너 따위가 가지고 있지?”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능력이다. 남작은 몸을 떨지 않도록 노력하며 대답했다.

“···사기 당해서 산 거요.”

“뭔 사기?”

“보면 모르시오? 그거 이제 마법도 안 걸려 있고 그냥 날 좀 잘 드는 칼일 뿐이오. 그거 사려고 내가 황금을 얼마나 썼는지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군.”

베르고니아가 미간을 좁혔다.

“네가 이걸 샀다고? 누구한테?”

“그것보다 댁네 사정이나 좀 이야기해보시오. 아샤리온은 왜 찾고 다니시는데?”

잠깐의 침묵 후에 베르고니아가 입을 열었다.

“아샤리온은 딜루키둠의 배신자다. 가문의 창고에서 마법검을 훔쳐 달아났지. 나는 가문의 기수로서 배신자를 벌할 의무가 있기에 여기까지 온 거다. 그런데 아샤리온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마법검은 마법을 잃은 채로 너에게 있구나.”

남작은 긴장했다. 혹시나 이 요정이 괜히 나에게 화를 내진 않겠지.

“설마 아샤리온이 이걸 너에게 팔진 않았겠지. 설령 마법을 잃었다고 해도 보물은 보물. 이걸 단명종 따위에게 팔 만큼 멍청하진 않을 테니. 그런데도 이게 너한테 있다는 건 아샤리온은 죽었다는 소리로구나.”

베르고니아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왜 이 검이 남작에게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녹색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나는 배신자를 벌하기 위해 여기에 왔지만 이젠 그 목적을 바꿔야겠다. 말해라, 누가 아샤리온을 죽였지? 설령 배신자라고 할지라도 내겐 일족의 복수를 할 의무가 있다.”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긴 한데······.”

생각해보니 남작은 그 무시무시한 칼잡이의 이름을 몰랐다. 그래서 얼른 알려주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던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 말해라.”

“이름은 모르오. 인상착의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그런데··· 안 찾는 게 나을걸.”

“닥치고 말해.”

혹시 일부러 아샤리온을 죽인 범인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남작은 그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칼잡이의 인상착의에 대해 설명했다.

그제야 베르고니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은 우리 가문의 것이니 가져가겠다.”

저 마법검이 마법을 잃어서 다행이다. 물건을 뺏기더라도 덜 억울하니까.

“그런데 진짜 가시려고? 내 감히 충고하는데 그러지 마시오. 애초에 배신자가 죽은 거잖아? 누가 대신 처치해줬다고 생각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쇼.”

“내겐 복수의 의무가 있다. 이제 더 지껄이지 마라. 단명종의 군주야, 내가 네 목숨을 살려주는 걸 감사히 여겨.”

“아니, 그, 가면 안 된다니까······.”

베르고니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부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남작이 혼자 중얼거렸다.

“등신도 아니고 똥인지 아닌지 꼭 먹어 봐야 아나? 하기야 저 새끼들 대갈통 쪼개지든 말든 내 알 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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