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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4화 (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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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걸어. 날 저물기 전엔 도착해야 하니까.”

산에선 날이 빨리 저무는 법이다. 게다가 여긴 새하얀 눈이 쏟아지는 설원이니 괜히 꿈지럭대다간 조난의 위험이 있었다.

“짐이나 좀 같이 들어주고 그런 말 하던가······.”

뒤에서 이안이 투덜거렸지만 김창은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을 한참 걸었다.

원래는 여덟 명이 출발한 여정이었는데 이젠 둘만 남은 탓인지 추위가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이안은 처음에는 쉴 새 없이 욕과 불만을 지껄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용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놀리는 건 자기 체력만 갉아먹는 일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참 묵묵히 걷던 중에 김창이 말했다.

“야.”

“···야? 지금 나 부른 거냐?”

“그럼 누구 불렀겠냐.”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별말은 하지 못했다. 괜히 대들었다가 또 뺨이라도 맞으면 이번에는 정말 이가 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왜 부른 거냐?”

“잘 따라오고 있는지 보려고.”

김창은 이안이 아직 멀쩡한 걸 보고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런 귀족 출신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뻗어버리는 게 보통인데 이안은 달랐다.

등에 짐을 진 채로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김창의 뒤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모든 북부인은 전사라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지만 그건 그가 못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어떤 강건한 전사를 데려와도 이런 환경에선 쉽사리 지칠 테니까.

“저기서 잠깐 쉬었다 가자.”

이런 상황에서 휴식은 가능한 자제하는 게 옳지만 한 번도 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김창은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고 거기서 식사를 하며 잠깐 휴식하기로 했다.

“씹,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짐을 지고 오던 병사들이 다 죽은 탓에 직접 짐을 지고 왔던 이안이 반색했다. 두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하고, 삼십 분 정도 쉰 뒤에 다시 움직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 속에서 먹을 걸 꺼냈다. 이런 곳에서 요깃거리라고 해봐야 말린 고기와 독한 술뿐이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던데.”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넘기고 술로 입안을 헹구던 이안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중간에 뻗을 줄 알았냐?”

“귀족 놈들은 대개 허약하길래 그런 줄 알았지. 형보다 못한 아우라더니 아주 그런 건 아닌 모양이지.”

“씹, 그건 아르덴 그 새끼가 너무 잘난 거지 내가 못난 게 아니야. 나도 보통 이상은 한다고.”

하기야 그런 건 상대적인 거니까.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씹었다.

“그런데 아까 시체 놈들이 하던 말 기억하나?”

“뭔 말? 베르사는 서리군주의 영토라던 말?”

“그거 뭔 소리냐? 베르사는 이 산 이름이겠고, 그럼 서리군주는 뭔데?”

이안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은은한 단맛 끝에 휘몰아치는 뜨거움이 그의 목구멍과 위장을 두들겼다.

“난들 아냐? 그냥 시체 군단을 지배하는 미치광이 마법사의 자칭 정도 되겠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또 술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하여튼 별 이상한 일이 다 일어난다니까. 요새 또 악마 따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며? 한동안 조용하더니 왜 또 지랄이래? 북부는 추위 때문인지 그런 놈들이 잘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젠 또 여기까지 올라올지도 모르겠어.”

이젠 북부에서 일을 자주 받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김창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씹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이만 가지.”

“에휴, 내가 여기서 왜 이딴 고생을······. 원래 같았으면 성에서 따뜻한 술이나 들이키고 있어야 하는데.”

“닥치고 좀 따라와.”

“······.”

두 사람은 동굴을 나와 다시 설원 속으로 향했다. 이안은 이 넓은 설산 속에서 시체 군단의 근거지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걱정했지만 그건 확실히 기우였다.

“저기 보이나?”

“···보이는군.”

시체 군단의 주인은 자기 세력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더는 숨을 필요 없이 충분한 세력을 키웠다고 생각하는지 시체들이 주변을 떠돌아다니게 두었다.

아마 시체들을 이용해 자기 영역을 순찰하고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함이리라. 보통 여행자들에겐 위험한 일이었지만 김창에겐 아니었다.

그는 생각보다 빨리 시체 군단과 마주한 걸 보고 만족했다.

“일이 빨리 끝나겠는데.”

“그럴 것 같네. 시체 군단의 근거지도 찾았겠다, 대충 주변 좀 둘러보고 돌아가지?”

이안은 시체 전사가 설원을 떠도는 것을 보고 몸을 약간 떨었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김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지.”

“뭐? 너 미쳤냐? 더 안쪽으로 들어가겠다고? 씨발, 죽으려면 너 혼자 죽을 것이지 나는 왜······.”

“왜, 가기 싫나?”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럼 돌아가.”

김창이 돌아가도 된다고 선선히 말하는 걸 보고서 이안이 당황했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가도 되나?”

“가도 돼.”

“그럼 나는 돌아가겠······.”

“가도 되는데, 내가 일 끝나고 돌아가면 넌 나한테 죽는다.”

염병, 그럼 가면 안 되는 거잖아. 이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씹. 그래, 여기까지 온 거 가보자. 가보자고.”

“돌아가도 되는데.”

미친놈인가? 이안이 아연한 얼굴로 김창을 쳐다봤다.

“뭘 야려? 간다.”

김창이 칼을 뽑았다. 이안도 자기 무기를 들고 시체 전사들을 습격할 준비를 하는데 주변을 떠돌던 시체 전사들이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이쪽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챘나? 그렇다기엔 그들이 몸을 돌린 방향이 달랐다. 그들은 김창과 이안을 등지고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것들 다 어디 가?”

“글쎄. 제 주인이 부른 모양이지.”

이안도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싸울 일 없이 뒤따라가면 되겠군. 좋아, 어쩌면 위험한 일 없이 금방 끝나겠는데?”

정말 그럴까? 김창은 픽 웃으며 시체 전사들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멀리도 가는데······. 서리군주의 영역이 얼마나 되는 거야?”

한참 걸었는데 아직 본거지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서 걷고 있는 시체 전사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게다가 그 종류도 더욱 다양해져서 이젠 머리 없는 말을 탄 기사나 중무장한 살덩이 괴물 같은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다룰 수 있는 시체 전사의 종류가 많다는 건 그만큼 서리군주의 힘이 강력하다는 걸 의미했다.

길을 가면 갈수록 이안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는 북부의 대영주인 테리얀 가문의 차남으로서 이번 일이 심각하다고 여겼다.

시체 군단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규모와 위세가 생각 이상이다. 만약 저 병력이 저대로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려온다면?

아무리 튼튼한 성벽과 강인한 전사들이 있어도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이거 진짜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안을 향해 김창이 말했다.

“위험하겠지. 그러니까 내가 온 거고.”

“실력에 자신 있는 모양이지?”

“자신이 있으니까 네 뺨도 갈기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

하기야 그 말이 맞았다. 아무리 플레어이라고 해도 어중이떠중이라면 감히 귀족의 뺨을 갈기진 않을 테니까.

“···협곡이로군.”

한참 걷다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협곡 위였다. 저 아래엔 수많은 시체가 한데 모여 각자의 무기를 든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잘 훈련된 군대의 질서정연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살아있는 군대에는 없는 스산한 기운만은 있었다.

먹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의 군단. 한 번이라도 전쟁을 해본 자라면 저 거대한 군세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바로 알 수 있으리라.

“숫자가 상당해. 천? 이천? 시체 기사나 살덩이 괴물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사실상 삼천은 넘는 군세로군. 그 외에 다른 괴물들을 되살린 것도 있고. 위험해······. 저런 게 일시에 쏟아져 나오면 아무리 테리얀이라도 버티기 힘들어.”

시체 군단의 무서운 점은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히려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안의 얼굴은 이제 창백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김창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적의 규모는 확인했으니 그냥 돌아가?”

놀랍게도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서리군주인가 하는 놈의 얼굴은 보고 가야지. 그래야 대책을 세울 거 아냐.”

“의외인데. 당장이라도 돌아가자고 반색을 할 줄 알았더니.”

“넌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김창이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형에게 밀려난 얼치기, 아버지의 후광에만 기대고 있던 얼간이, 징징거릴 줄만 아는 멍청이. 더 불러줘야 하나?”

모욕을 당한 이안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씹새. 오늘 처음 만난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그래, 네가 보기엔 내가 그런 병신일지 몰라도 난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뭔데?”

이안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당당히 대답했다.

“뭐긴 뭐야? 탈리얀 가문의 차남으로서 내 의무를 다하는 거지. 나는 형 새끼를 싫어하는 거지 내 가문을 싫어하는 게 아니야. 에르단 놈만 뒈지는 거면 만만세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일단 가문부터 지키고 봐야 할 거 아냐.”

이 새끼, 생각보다 강단 있네. 이런 말도 할 줄 알면서 왜 처음엔 그토록 징징거렸대? 김창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게 허세가 아니길 빈다.”

“···솔직히 좀 쫄리긴 해. 그냥 돌아갈까?”

“장난하냐? 그딴 말 해놓고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따라와.”

김창은 이안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갔다.

“아니, 또 어디로 가게?”

“서리군주 찾겠다며. 그 자식이 저 협곡 안에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찾으러 가야지.”

“어디 있는지 알고?”

“글쎄, 내가 서리군주라면 저쯤에 자기 거처를 마련할 것 같군.”

김창이 손을 뻗어 협곡 반대쪽에 뚫린 굴을 가리켰다.

“저길 어떻게 가?”

“아까 돌아서 가는 길 봐뒀어. 따라와.”

설마 협곡을 뛰어서 가자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안은 안도하며 김창의 뒤를 따랐다.

“···여기로 가자고?”

“그럼 뭐 다른 방법 있나?”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반대쪽 협곡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뻥 뚫린 구멍 하나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여기로 뛰어내리면 곧장 굴 안으로 들어가기야 하겠지만 그랬다간 다리 하나 부러질 것 같은데.”

“안 부러지니까 얼른 뛰어.”

“네가 먼저 뛰면 안 되나?”

“왜, 내가 밑에서 받아주기라도 하랴?”

“그래주면 고맙··· 으악!”

김창이 뭉그적거리는 이안의 등을 발로 찼다.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진 이안은 꽥 소리를 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씹새······ 진짜 플레이어만 아니었어도······.”

“플레이어만 아니면 뭐?”

뒤따라 뛰어내린 김창이 날렵하게 착지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이안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여기 누워서 자면 입 돌아간다.”

“내가 지금 자려고 여기 누웠냐? 하여튼 말하는 거······.”

짜증을 내던 이안의 입이 멈췄다. 그의 눈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빛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쌍이었던 빛은 곧 수십 개로 늘어났다.

“어······.”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은 수십 기는 되어 보이는 해골 병사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텅 빈 눈구멍 속에서 푸른 빛을 스산하게 빛내고 있었다.

“이거 망한 것 같은데······.”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들켜버리다니? 이안이 당황하며 김창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 칼 가지고 있어.”

“뭐?”

이제부터 싸워야 하는데 칼은 왜 주나? 이안이 당황하며 쳐다보자 김창이 다시 말했다.

“칼 가지고 있으라고.”

“아니, 칼 없이 어떻게 싸우게?”

“쟤넨 해골이라 칼보다 다른 거 드는 게 더 나아.”

“그러면 뭘 들고 싸울 건데? 주먹?”

김창이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나무 막대를 하나 집어 들었다. 아마 굴 안에서 공사를 할 때 쓰려고 들고 가다가 시체 전사 중 누군가가 떨어트린 것이리라.

적당한 길이에 적당한 굵기. 새 무기가 마음에 든 것인지 김창이 막대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 몽둥이. 말 안 통하는 새끼들은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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