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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안은 몽둥이 하나 들고 적들을 향해 다가가는 김창을 보고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확실히 해골 병사들을 상대로는 칼보단 몽둥이 같은 둔기가 더 낫긴 하겠지만 겨우 저거 하나 가지고 저 숫자를 감당할 수 있나?
김창은 귀족도 칼 맞으면 죽는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 그리고 그 말대로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칼에 맞으면 죽는다.
그런데 저 숫자를 혼자서? 아무리 귀족 뺨 후려치는 미친놈이라도 저건······.
이안이 결심을 굳혔다.
“나도 돕겠다.”
“염병하지 말고 거기 있어. 너 뒈지면 나도 기분 찝찝하니까.”
“······.”
이안은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에 해골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살과 근육이 없어 더욱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들은 각자 창칼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시체 주제에 무기 관리라도 하는 것인지 날이 제법 날카로웠다.
김창은 그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다가 가까이 다가온 적을 향해 몽둥이를 크게 휘둘렀다.
빡!
단단한 뼈가 부러져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김창은 목뼈가 부러져 땅에 떨어진 머리뼈를 발로 밟아 으깨며 바로 다음 적을 향해 뛰었다.
그가 몽둥이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뼛조각이 튀었다. 사람의 뼈 자체는 단단하지만 쉽게 부러지는 부분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을 죽여온 김창은 그게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고 단단한 뼈를 몽둥이 하나만으로 손쉽게 부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적들 역시 격렬하게 반격했다. 등 뒤에서 적 하나가 날카로운 창을 내지르자 김창은 겨드랑이로 창대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곧장 창대를 붙잡아 힘껏 휘둘러 적들을 향해 내던졌다.
쿵!
해골 병사들끼리 부딪혀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 한꺼번에 넘어졌다. 김창은 넘어진 적의 목뼈를 발로 밟아 부순 후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다른 놈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한참 격렬하게 싸우다 보니 몽둥이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절반으로 뚝 부러졌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부러진 한쪽을 적의 눈구덩이에 박아넣고 다른 하나로는 갈비뼈를 후려쳐 모두 박살 냈다.
이제 맨손이 된 김창은 주먹으로 적 하나를 날려버린 후에 나직이 말했다.
“칼.”
“어, 어어?”
“새끼야, 칼. 얼타지 말고 칼집 채로 던져.”
싸움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칼을 던졌다. 김창은 칼을 공중에서 잡아채더니 그대로 칼집 채로 휘둘러 적들을 마저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김창은 마지막 적의 가슴뼈를 박살 내고선 몸에 묻은 뼛조각을 무심히 털어냈다.
“···칼집으로 그냥 다 후려쳐도 됐겠는데 몽둥이는 왜 들었어?”
이안의 질문에 김창이 눈을 흘겼다.
“칼집에 흠집 나잖아.”
“하기야······.”
주변에는 몸이 박살 나서 죽은 적들로 가득했다. 이안이 그걸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이거 또 살아나려나?”
“서리군주가 되살리면 살아나겠지. 그런데 굳이 살리진 않을걸.”
“왜?”
김창이 걸으며 대답했다.
“저딴 걸로는 내 상대가 안 되다는 걸 알게 됐을 테니까. 시간 끌기도 안 될 텐데 뭐하러 되살려?”
이안은 김창이 혼자서 수십 명의 적을 다 때려 부수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굳이 되살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서리군주도 우리가 여기 들어왔다는 걸 안다는 소리군?”
“장님 아닌 이상에야 알겠지. 왜, 겁나냐?”
“겁이 안 날 수가 있나? 서리군주가 설마 침입자들을 그냥 보내줄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가문의 안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김창이 말했다.
“그럼 보내주게 만들어야지.”
“···저 많은 군세와 싸우겠다고? 아무리 네가 강해도 그건 불가능해.”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칼잡이가 아무리 칼을 잘 쓴다고 해도 군대를 쓸어버릴 수는 없지 않겠나.
직업이 칼잡이가 아니라 마법사였다면 이야기가 또 달랐겠지만 여기서 갑자기 직업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안의 지적은 합당하다. 이게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확실히 그랬다.
“굳이 다 죽일 필요 있나? 그냥 서리군주 하나만 죽이면 되는데.”
시체 군단의 존속은 서리군주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서리군주만 죽이면 저 거대한 군세도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게 분명했다.
“말이야 쉽지만······ 그게 되겠어?”
서리군주가 얼마나 강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거대한 군세를 부리는 자이니 어떤 사악한 힘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
만약 그가 시체 군단 없이도 성 하나를 무너트릴 수 있는 사악한 마법사라면? 그러면 승산이 있나?
이안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반면 문득 쳐다본 김창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그거야 해봐야 알지.”
김창은 그 말만 하고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이안도 그 뒷모습을 가만히 걷다가 곧 욕설을 내뱉으며 뒤따랐다.
“그래, 씨발. 해봐야 아는 거지. 안 해보면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
새끼, 볼수록 재밌는 놈이네. 김창이 작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아마 서리군주가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공간을 확장했을 것이다.
벽에 붙은 횃불이나 다듬어진 길을 보면 확실히 그랬다. 둘은 그 길을 따라서 한참을 걸었는데 이상하게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리군주가 침입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아까부터 적이 쏟아져 나왔어야 맞다. 그래야 침입자를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아직껏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뭔가?
“우리가 심부까지 오길 바라는 모양이군.”
김창의 말에 이안이 얼굴을 구겼다.
“그러면 처음에는 왜 공격했는데?”
“우리가 얼치기인 줄 알았나 보지. 그런데 싸우는 걸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테고.”
“아니, 얼치기가 아닌 걸 알았는데 왜 자기가 있는 곳까지 오길 바라는 거냐?”
“제 손으로 날 직접 죽이길 원하는 모양이지. 아니면 뭔가를 제안하거나.”
“제안이라면··· 자기 쪽에 붙으라는 건가?”
“글쎄.”
서리군주가 강력한 힘을 가진 리치라면 위대한 전사를 탐낼 만도 하다. 그런 전사의 시체로 죽음의 기사를 만든다면 가공할 만한 전적을 낼 테니까.
어느 쪽이 목적이든 김창의 목숨을 원한다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김창이 해야 할 일도 똑같았다.
“저쪽이군.”
동굴의 가장 안쪽은 마치 신전의 입구처럼 꾸며져 있었다. 아마 서리군주가 제 부하들을 시켜서 만든 것이리라.
그러면 저 안에는 죽음으로 가는 제단이 있는 걸까? 제물의 목숨을 불태워 새로운 전사로 만들어내는 사악한 제단.
김창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 안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확 하고 얼굴에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칼잡이야. 그리고··· 그 짐꾼아.”
스산한 목소리가 몸을 휘감았다. 목소리에는 힘이 있어서 그 자체로 냉기를 불러 일으켰다. 똑같이 목소리를 들은 이안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몸을 덜덜 떨었다.
“저, 저거······.”
제단을 기대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대신 얼음으로 만든 옥좌는 있었다. 서리군주라는 이명에 걸맞게 시체 군단의 주인은 얼음 옥좌 위에서 김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아주 컸다. 죽음의 냄새가 나는 갑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새까만 투구를 썼다. 건틀릿 낀 왼손은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고 오른손은 두꺼운 철퇴를 들고 있었다.
저걸 휘두른다면 사람 머리통은 그냥 으깨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철퇴에 얼룩이 잔뜩 묻은 걸 보면 실제로 머리통 몇 개는 깼을 터다.
또한 등 뒤에 두른 망토는 뭔 가죽인지 몰라도 화살도 막을 듯 두꺼웠는데 누가 봐도 중무장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생김새에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리치가 아니었잖아?”
“리치? 감히 그따위 것과 비교하지 마라. 나는 그깟 삿된 것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았으며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니. 들어라, 나는 서리군주다. 모든 북부인이 복종해야 할 존재지.”
서리군주는 묻지도 않은 걸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칼잡이야, 너는 서리군주에 대해 아느냐? 나는 북부 설산의 지배자이며 또한 죽음의 군주다. 또한 인간 학살자, 난쟁이 도살자, 요정 살해자, 만티코어 효수자, 린트부름 참수자, 거인 셋과 싸워 세 번 이긴 자, 바실리스크의 눈을 뽑은 자, 지옥불의 악마와 싸워 승리한 자이니 그 외에도 수많은 위업을······.”
새끼, 말이 많네. 김창이 말허리를 툭 잘랐다.
“모르니까 좀 닥쳐.”
서리군주가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날 몰라? 그래, 너는 이방인일 테니 모르겠지. 하지만 거기 짐꾼아, 너도 북부인이라면 내 이름에 대해 들어봤겠지?”
이안이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처음 듣는데······.”
“······처음 들어?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자존감이 비대한 녀석이군. 왜 북부인이라면 자기 이름에 대해 다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김창이 비웃음을 흘리는 사이에 서리군주가 다급히 말했다.
“요즘 북부인은 책을 안 읽나? 서리군주를 모른다고? 정말로?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느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책이랑 별로 안 친하긴 한데, 진짜 몰라. 북부의 전설이라면 벼락을 뿌리는 광전사나 불 먹는 뱀 같은 게 유명하지 않나······.”
“이런 씹! 그 광전사 놈은 나랑 다섯 번 싸워서 다섯 번 진 놈이고, 불 먹는 뱀 새낀 내가 가죽을 벗겨서 허리띠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새끼들 전설은 유명한데 이 서리군주를 몰라? 그게 말이 돼!”
“댁이 벼락을 뿌리는 광전사랑 불 먹는 뱀이랑 싸워서 이겼다고? 아니, 근데 진짜 들어본 적 없는데······.”
“이건 음모다! 음모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딴 일이 어찌······.”
서리군주의 투구에서 스산한 빛이 일렁였다. 빛은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성난 불길과 같은 모습이었다.
“너희는 내가 수백 년 전 북부 전역을 두려움에 떨게 했음을 모르느냐? 나는 검을 휘둘러 수십 명의 사람을 죽이고 또한 사술을 부려 수십 명의 사람을 되살렸다! 나는 베르사의 적법한 주인으로서 설산의 공작이었으며 동시에 몰락의 인도자였노라! 수많은 성이 무너졌고 그 자리에는 죽음만이 감돌았다! 이래도 나를 몰―라!”
서리군주가 쿵 하고 발을 구르며 함성을 토해내자 벽이 떨리고 횃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난 칼바람이 몰아치며 산 자의 체온을 휩쓸어갔다.
쿵!
육중한 갑옷을 입은 서리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음 옥좌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가 건틀릿 낀 손으로 팔걸이를 부러트리며 시퍼런 안광을 사납게 빛냈다.
“모두가 날 잊었다면 다시 기억나게 해주겠다! 다시는 날 잊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기억해라, 북부인들아! 나는 서리군주 모레이다! 너희는 죽어서도 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인제 보니 이거 그냥 관심병 환자였나? 김창이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