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김창이 칼을 뽑자 서리군주 모레이가 반쯤 부서진 얼음 옥좌를 철퇴로 후려쳤다. 쾅 소리가 나며 사방으로 튀는 얼음 조각이 제법 매서웠다.
“너, 건방진 칼잡이야! 널 죽이고 네 배를 갈라 창자로 목을 조르겠다! 주제도 모르고 지껄이는 그 혓바닥은 잘라서 개 먹이로 주고 눈깔은 뽑아서 짓뭉개주마! 너에겐 내 부하로 종군할 영광조차 없으리라!”
그게 왜 영광이냐. 김창은 비웃음을 흘리며 뛰쳐나갈 자세를 잡았다.
“이안.”
“어?”
“거기 있어. 괜히 끼어들었다가 죽으면 넌 내 손에 죽는다.”
“···말 좀 곱게 하면 안 되나?”
어쨌거나 저게 자신을 신경 써주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안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자세를 낮추고 한 발자국 내디딜 때였다.
“북부의 진정한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얼치기 놈아!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아니면 네 귀는 숨 쉬려고 뚫은 숨구멍이냐? 너는 살 가치가 없다! 네게도 합당한 징벌을 내려야겠구나!”
일어나라! 모레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자 바닥이 쿠구궁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흙바닥도 아니고 딱딱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인데 그게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더니 곧 그 안에서 뭔가가 기어 올라왔다.
탁. 건틀릿 낀 손이 바닥을 부여잡고 밀며 위쪽으로 껑충 뛰었다. 갈라진 바닥에서 나온 것은 검은색 갑옷을 입은 죽음의 기사였다.
생전에 제법 이름 좀 날렸을 것 같은 기사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자신의 적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안은 왠지 그 투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먼 옛날에는 북부의 모두가 위대한 전사였지. 하지만 다시 돌아온 내가 보기에 지금의 북부인들은 전부 전사 흉내나 내는 얼치기더구나.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일단 무기부터 들이밀던 게 북부인이었는데 이젠 악수를 해? 통성명을 해? 그게 북부인이냐!”
저 새낀 북부인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김창이 어이가 없어 하는 사이에 모레이의 말이 이어졌다.
“이 시대엔 전부 한심한 놈들뿐이지만 그래도 제법 써먹을 만한 놈이 있더군. 며칠 전에 눈더미 속에서 발견한 시체로 만든 죽음의 기사다. 짐꾼 놈을 벌하기엔 충분한 실력이지.”
“잠깐, 눈더미 속에서 발견해? 그것도 며칠 전에?”
이안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모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법 관록 있는 전사 같더군. 주변에 시체가 제법 있던데 그 녀석들도 전부 내 부하로 만들었다.”
눈더미 속에서 발견한 시체, 관록 있는 전사,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이안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런 씨발.”
이안이 주먹을 꽉 쥐고서 자기 무기를 손에 들었다. 그는 김창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기사는 내가 맡겠다. 끼어들면 죽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끼어들어야겠어.”
김창도 대충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이안을 막지 않았다.
“죽지 마라.”
“억울해서라도 여기선 못 죽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가볍게 웃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전투가 멀지 않았다.
“덤벼라, 이 불경한 놈들아!”
모레이가 함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죽음의 기사가 달렸다.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아마 사악한 힘으로 강화된 것이겠지.
이안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김창은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선 자신의 적을 향해 뛰었다.
“와라, 칼잡이야!”
서리군주 모레이는 과연 리치 따위와 달랐다. 보통 사령술사라면 부하들을 일으켜 숫자로 밀어붙이는 전법을 택할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육중한 철갑을 입고 손에는 무시무시한 철퇴를 든 서리군주는 자기 손으로 직접 적을 처단하길 바랐다.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부하를 불러내서 여기에 새롭게 소환할 여력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하기야 저 죽음의 기사을 불러내려면 기력을 제법 소모해야 할 테니.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별 상관없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항상 하나로 귀결된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 사실은 모레이도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죽어본 몸이니 더더욱.
그가 철퇴를 들지 않은 손으로 김창을 가리키자 서늘한 냉기가 발사됐다. 화살처럼 날아간 냉기가 부딪치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자 가뜩이나 낮던 온도가 더욱 낮아졌다.
사령술을 빼면 단순히 철퇴 휘두르는 전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칼로 후려쳐 깨트렸다.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쳐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공중에서 연달아 쨍그랑 소리가 울리며 사방으로 얼음 조각이 튀었다. 그 조각조차 하나의 마법이라 허공에서 휙 돌아서 다시 김창을 노렸다.
아무리 뛰어난 칼잡이라도 그 많은 걸 전부 쳐낼 수는 없었다. 맞으면 위험한 것은 쳐내고 아닌 것은 그냥 맞았다.
그런 식으로 얼음 폭풍 속을 뚫고 달리니 어느새 옷이 너덜너덜해졌다.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흐르는 곳도 있었고 자잘한 얼음 조각이 박힌 곳도 있었다.
슬쩍 눈알을 굴려 자기 몸 상태를 살펴보니 저런 걸 몇 번 더 당하면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기 전에 과다출혈로 죽을 것 같았다.
원래 싸울 때 저 멀리서 화살만 날리는 놈만큼 비겁한 게 없는데 저건 명색이 서리군주라는 놈이 저러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정당당하게 무기 들고 붙자고 할 테지만 김창은 그러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건 누가 정하고 비겁한 건 또 누가 정하나?
몇 년간 사람 썰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승리는 언제나 수단의 정당함보다 우선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서리군주 모레이가 정말 자신을 죽인다면 김창은 그 대단함에 박수를 쳐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이게 다냐?”
“···뭐?”
김창은 얼음 조각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한 무심한 얼굴이었다.
“시체 좀 부리고, 얼음 좀 날리고, 갑옷 입고 무게 잡기, 할 줄 아는 게 그게 다냐고.”
모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두꺼운 투구로 가려져 있었지만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그건 얼어붙은 불꽃이자 타오르는 냉기였다.
“나는 서리의 지배자요!”
쿠구궁!
바닥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얼음 사슬이 솟구쳤다. 열 개도 넘는 사슬이 마치 뱀처럼 김창을 잡으려 날뛰었다.
“또한 몰락의 인도자이니!”
싸늘하게 몰아치는 바람은 그 자체로 칼날이 되어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었다. 동굴 안이 떨렸다. 천장에 달렸던 고드름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 그 자체다!”
일개 마법사 따위가 감히 보여줄 수 없는 강력함이었다. 저 두꺼운 얼음 사슬은 커다란 거인조차 붙잡을 것이요, 또한 싸늘한 칼바람은 용의 비늘조차 잘라버릴 것이다.
서리군주는 감히 이 설산의 지배자를 칭할 만한 힘이 있었다. 일신의 강함만으로도 그러할진대 사령을 다루는 힘까지 더해진다면 과연 어떨 것인가?
북부가 서리군주의 발밑에 굴복할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또한 끝나지 않는 겨울을 지새우는 법을 깨닫게 되리라.
“원탁에 마법사가 한 명 있다.”
그랬어야 했다. 원래라면 그랬어야만 했다.
“생긴 건 전사 같이 생겼는데 마법을 제법 잘 쓰지. 난 걔랑 두 번 붙어서 전부 이겼다. 이게 뭔 뜻인지 알겠냐?”
“······죽기 전에 정신이 나갔나? 갑자기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김창이 칼날에 정신을 집중했다. 으스스한 떨림과 함께 잿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넌 걔부터 이기고 와야 한다는 소리다, 씹새야.”
모레이는 뭔 헛소리냐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헛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걱!
칼날이 공기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얼음 사슬이 잘려 나가고 불어오던 칼바람이 흩어졌다. 오러가 맺힌 칼날은 마법을 베고 찢어발겼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칼날이 모레이의 심장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서리군주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날렸으나 곧 그게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빠르게 갈려 나가는 얼음은 모레이의 마력이 쓸데없이 버려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젠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너, 칼잡이! 와―라!”
모레이가 철퇴의 자루를 세게 움켜쥐었다. 건틀릿과 자루가 부딪쳐 절그럭 소리를 냈다.
사람의 머리 정도는 손쉽게 으깨버릴 수 있는 철퇴가 스산하게 빛났다. 서리의 힘이 담긴 철퇴에는 싸늘한 냉기가 흘렀고 힘은 점차 증폭되어 이젠 하나의 마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웅웅 소리를 내며 응축된 서리가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레이가 머리 위로 철퇴를 크게 들었다.
부웅!
서리를 휘감은 철퇴가 묵직하게 낙하했다. 공기를 얼리고 겨울을 불러오는 일격이 작렬했다.
모레이는 자신이 보인 일격에 만족했다. 아무리 잘난 칼잡이라도 이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싸늘한 냉기가 모든 걸 얼리고 묵직한 철퇴가 그 머리통을 으깨버릴 테니까.
그러니 내가 이겼다. 그리 확실할 때, 이상하게 몸이 기우뚱했다.
“···뭐?”
착각인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왼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모레이는 자기 왼 다리가 잘린 것을 보았다.
언제? 정답을 알아내기도 전에 철퇴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들고 있어야 할 오른 어깨가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뭔? 모레이는 마치 환각에라도 빠진 것 같았다. 칼잡이가 칼을 너무 잘 쓰면 그걸로 남을 현혹할 수도 있나?
그럴 리가······.
“내가 물었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섬뜩했다. 언제 뒤로 돌아갔나? 그걸 모를 만큼 저 칼잡이와 내가 실력 차이가 난단 말인가?
그냥 자존심 다 버리고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숫자로 밀어 붙었어야 했나? 모레이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몸을 돌리려 했다.
왼쪽만 남은 손을 휘둘러 마지막 일격을 짜냈다. 싸늘한 냉기가 하나의 줄기가 되어 날아갔지만 칼날에 쪼개졌다.
“이게 다냐고.”
칼날이 쇄도했다. 단단한 갑옷 안을 젖은 흙 찌르듯 가볍게 밀고 들어왔다. 그 안은 본래 텅 비어 있었으나 심장이 있는 곳만은 달랐다.
거기엔 서리의 힘이 있었다. 수백 년 전 죽었던 모레이를 되살린 사악한 힘. 그것이 칼날에 찔려 괴로운 듯 날뛰었다.
“이 내가 겨우 인간 따위에게······.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모레이의 갑옷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형체가 무너진 갑옷이 바닥에 부딪히자 텅텅 소리가 났다.
육중한 갑옷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싸늘한 냉기뿐이었으나 그것은 추운 겨울날 입김이 흩어지듯 빠르게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투구만은 빛을 잃지 않았다. 새파란 불꽃은 기세가 저물긴 했어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곧 꺼질 테지만 아직 사라지진 않았다. 김창은 투구를 향해 칼을 겨누며 말했다.
“유언이 있으면 말해봐라. 들어는 줄 건데, 바라는 대로 해주진 않을 거야.”
“···아, 죽음으로부터 돌아왔거늘 결국 또 죽음인가? 먼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건만 결국 부질없는 짓거리였구나.”
투구가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새로운 힘을 주겠다고, 날 북부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이 너무나 달콤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얌전히 무덤 속에나 묻혀 있을 것을.”
가만히 듣던 김창이 말했다.
“누가 널 되살린 거냐? 누가 너한테 그런 제안을 했지?”
“만네르헤임. 지옥의 처형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리군주 정도 되는 자를 되살릴 만한 존재라면 혹시 대악마가 아닐까.
김창이 생각하는 사이에 투구의 혼잣말은 이어졌다.
“아, 참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마셔선 안 되는 건데. 더 심한 갈증이 내 목을 조를 걸 몰랐어. 내 탓이지. 내 과오며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나는 내 영혼을 저당 잡혔으니 이젠 어디도 가지 못해······.”
뭔 혼잣말이 저토록 많나? 김창은 이제 슬슬 듣기 지루해져서 칼을 거꾸로 쥐었다.
“이제 끝내도 되나? 유언이 너무 긴데.”
“끝내도 되냐고? 아니, 끝나지 않는다. 서리군주는 끝나지 않아.”
“염병 그만 떨고 죽어라.”
더 들어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김창이 칼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쳐 투구를 쪼갰다. 아직껏 남아 있던 서리의 힘이 쪼개진 투구 사이로 빠져나오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엔 그저 조금 날뛰다 그치리라 생각했는데 쏟아져 나오는 서리의 힘은 점차 늘어났다.
저 투구 속에서 저만한 힘이 잠들어 있었나? 김창이 저도 모르게 쪼개진 투구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서늘한 빛이 그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칼잡이야, 서리군주가 되어라! 내 주인께서 널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