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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7화 (2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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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마치 추위에 얼어붙은 호수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목구멍이 콱 막혔다.

서리군주의 힘이 멋대로 몸 안에 침입한 가운데, 김창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졌던 갑옷의 각 부분이 덜덜 떨리며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꾸물꾸물 기어서 김창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서리군주의 갑옷은 영혼의 속박이며 또한 자격의 증명이었다. 속박된 영혼은 갑옷 속에 갇힐 것이며 자격을 증명한 자는 무한한 힘을 얻게 되리라.

“야! 이게 대체 뭔······.”

죽음의 기사와 한창 싸우고 있던 이안도 김창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봤다.

서리군주 모레이가 쓰러진 탓인지 죽음의 기사는 움직임을 멈췄지만 다시 시체로 돌아가진 않았다.

그걸 보면 서리군주가 완전히 소멸하진 않았다는 소리인데, 그러면 김창이 정말 새로운 서리군주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야! 야! 정신 차려! 야!”

그래선 안 된다. 이안은 김창이 서리군주가 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돈을 받고 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김창은 탈리얀 가문을 위해 싸워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탈리얀 가문의 차남으로서 그가 타락하게 둘 수는 없었다.

또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서리군주 모레이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결국에는 한 칼잡이에게 패배했다.

그러면 그 칼잡이가 다시 서리군주가 된다면 그건 또 얼마나 거대한 악이 될 것인가?

탈리얀의 안위를 위해서, 그리고 북부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건 결코 두고 봐선 안 될 일이었다.

이안은 결심을 굳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서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나.

“흡!”

이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미 죽음의 기사와 싸우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다리는 천근처럼 무겁고 어깨는 뻐근하지만 그런 고통은 무시하고 달렸다.

다행히도 김창은 여전히 우뚝 선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이안은 천천히 달라붙고 있는 갑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악!”

차갑다. 그냥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만지는 순간 체온을 빼앗는데 손은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마법 걸린 갑옷은 원래 다 저런가? 이안은 이를 악물면서 김창의 몸에서 갑옷을 벗겨내려고 했다.

“크으윽!”

너무 차가우면 오히려 뜨겁게 느껴진다던가? 이안은 가죽 장갑을 꼈지만 그게 별 도움이 안 될 만큼의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서 일단 어깨에 붙은 견갑을 꽉 쥐었다. 일단 만만한 이거라도 떼야······.

“그만해라.”

스산한 목소리. 이안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서리군주인지 뭔지 하는 씹새야! 뒈졌으면 곱게 지옥이나 갈 것이지 웬 행패야!”

“그만하라고.”

“닥쳐!”

이안은 필사적으로 갑옷을 벗겨내려고 했다. 용을 쓴 게 효과가 있던 걸까? 끙끙대며 잡아당겼던 견갑이 덜컥 떨어졌다.

“됐다! 야! 내가 너 구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뭔 헛소리야. 나 멀쩡하니까 그만하라는 건데.”

텅!

바닥으로 떨어진 건틀릿이 맑은 소리를 냈다. 그 뒤로 반대쪽 건틀릿도 바닥에 떨어졌고 이안이 아직 떼지 않은 견갑도 툭 하고 떨어졌다.

이게 뭔? 이안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김창이 말했다.

“뭘 봐.”

“아니, 너······. 서리군주한테 잡아먹힌 거 아니었나?”

“잡아먹히긴 뭘 잡아먹혀.”

김창의 목소리는 서늘하긴 했어도 싸늘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저 인간은 원래 저런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했다.

이안은 당황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이게 설마 서리군주의 연기라면? 자신을 방심시켜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다면?

아주 허황된 의심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김창은 아직 저 투구를 쓰고 있지 않나? 중요한 건 저 투구고 나머지 갑옷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봐야······.

“답답해서 못 쓰고 있겠군.”

텅!

투구가 쉽사리 벗겨져 바닥을 굴렀다. 얼굴을 드러낸 김창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겼다.

“···진짜 멀쩡했던 거냐?”

“왜, 내가 안 멀쩡하길 기대했나 보지.”

미쳤나? 내가 뭐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이안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뭘 웃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멀쩡한 거지? 서리군주의 힘이 분명 널 삼켰는데······.”

“증오스러운 칼잡이야······.”

아주 소멸한 줄 알았던 서리군주의 힘이 아직 남았던 걸까. 내던져진 투구가 또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살아있었나? 그 정도 했으면 그만 지옥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지옥으로 갈 수조차 없다. 내 영혼은 저당 잡혔고 내 영혼의 주인은 내가 쉬는 걸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 만네르하임인가 하는 놈? 걔가 지옥에서 끗발 좀 날리는 모양이지.”

“끗발 좀 날리냐고? 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 누가 감히 서리군주를 부하로 삼을 수 있겠느냐? 그 누가 감히 이 모레이를 버리는 패로 쓰겠어? 만네르헤임만이 그럴 수 있다. 그와 같은 대악마만이 그럴 수 있다.”

역시 대악마였나? 이젠 정말 지옥 속에 숨어 살던 악의 족속들이 이 세상에 머리를 들이밀 작정인 듯했다.

일거리가 많아져서 좋겠군. 김창은 가만히 생각했다.

“너에게도 내 고통을 나눠줄 생각이었다. 이 개 같은 갑옷 속에 갇혀 끝나지 않는 투쟁을 계속하길 바랐다. 그런데··· 죄를 짊어져야 하는 건 나 혼자였구나.”

“네 잘못인데 그걸 왜 내가 같이 짊어져.”

“넌 어째서 만네르헤임의 유혹으로부터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서리군주의 힘이 탐나지 않더냐? 그 어떤 강인한 전사라도 쉽사리 견뎌낼 수 없을 텐데······.”

“글쎄.”

“너······.”

투구에는 표정이 없다. 만약 있다면 지금 서리군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 너, 신성의 조각을 가졌구나. 승천의 자격을 갖추었나. 그러니 대악마의 유혹이 통하지 않을 만도 하지.”

신성에 그런 효과가 있나? 이게 뭐 게임도 아니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으니 김창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냥 서리군주의 힘이 별거 아니라서 안 통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 승천할 자야. 모두가 네가 가진 승천의 자격을 노릴 것이다. 악마든 용이든, 그도 아니면 같은 인간이든.”

“내 걱정해주는 거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오만하구나. 하기야 내 젊을 때도 그랬지. 몰락의 인도자로서 성과 마을을 불태우고 시체를 일으키던 그때. 아, 그때 너무 설치진 말았어야 했는데······.”

옛이야기에는 관심 없다. 김창이 반쯤 쪼개진 투구를 향해 칼을 겨눴다.

“이제 진짜 끝내도 되나?”

“내게 끝은 없다. 이 투구가 깨져도 내 영혼은 만네르헤임의 손아귀에 갇혀 있으니.”

“그러면 네 주인한테 가서 전해라.”

“뭘?”

역수로 든 칼끝이 빛났다.

“날 원하면 돈 가지고 오라고. 대악마든 뭐든 잘 죽이니까 마음에 안 드는 놈 있으면 죽여달라고 해.”

“······미쳤나?”

김창이 웃었다. 흔치 않은 웃음이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쿡!

힘껏 내려친 칼이 투구의 쪼개진 틈을 파고들었다. 이미 한 번 힘을 쏟아낸 투구는 이젠 얌전히 쪼개졌다.

아깐 서리의 힘이 솟구쳤으나 이번에는 새하얀 연기 한 줄기만이 피었다가 곧 사라질 뿐이었다.

“···끝인가?”

이안은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된 서리군주의 갑옷을 쳐다봤다. 정황상 정말 끝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끝이지. 칼 맞았는데 움직이는 놈이 어디 있어.”

“하기야······.”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서리군주가 죽었으니 남은 일은 아버지의 시체를 가지고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조금 있으면 날이 저물 테니 여기서 밤을 보냈다가 아침 일찍 돌아가면 딱 맞을 듯했다.

“아버지, 곧 가문으로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용맹한 전사의 죽음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죽은 자가 있어야 할 곳은 무덤이지 전장이 아니니까.

이안이 우뚝 선 죽음의 기사를 향해 다가갈 때였다. 서리군주가 죽음으로써 움직임이 멈췄던 갑옷이 갑작스럽게 철컥 소리를 냈다.

“···어?”

이미 다 끝났다고 방심한 탓일까. 이안은 죽음의 기사의 움직임에 얼른 반응하지 못했다.

빠르게 날아오는 칼날은 곧장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목이 날아갈 판이라 부랴부랴 무기를 꺼내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늦은 행동이었다.

이안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가운데 귓가에 쨍 하고 금속음이 울렸다.

“멍하니 있지 말고 물러나.”

어느새 달려든 김창이 죽음의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더니 곧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죽음의 기사와 몇 번 칼을 맞대는가 싶더니 빠르게 연격을 몰아쳐 갑옷의 심장 부분을 세게 찔렀다.

이미 죽은 자는 비명을 지를 수 없기에 죽음의 기사는 아주 조용히 쓰러졌다. 그의 투구 속에서 흰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는 게 보였는데 아마 그것은 속박에서 해방된 탈리얀 대공의 영혼이리라.

“시체 챙겨.”

이안은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김창이 제 아버지를 또 죽인 셈이 됐지만 거기에 항의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이게 대체······. 서리군주는 죽은 거 아니었어?”

“모레이만 죽여서 끝날 일이 아닌 모양이지.”

“설마 그 만네르헤임 놈이 죽어야 한다는 거냐?”

서리군주는 만네르헤임의 힘을 받아서 부활했다. 그러니 그가 부리는 시체 군단은 달리 보면 만네르헤임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바깥의 그 시체 군단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깥으로 움직였다. 이안도 얼른 시체를 질질 끌며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씹······.”

바깥으로 나가자 협곡의 시체 군단이 진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병력이 다 어디로 갈까?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지옥의 만네르헤임에게 가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저들이 가야 할 곳은 탈리얀 가문의 영지다.

“제기랄! 빨리 가서 에르단에게 알려야 해!”

이안은 다급했으나 김창은 아니었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널 데리고, 그것도 시체까지 데리고 빨리 가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면 어쩌라고!”

“넌 여기 있어라. 시체 군단은 이미 진군했고 서리군주도 죽었으니 여기 숨은 널 노릴 녀석은 없겠지. 나 혼자 카셀로 돌아간다.”

“뭐? 하지만······.”

“더 지체하면 너무 늦어.”

이안은 입술을 짓씹으면 고민했지만 결국 김창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면 잘 숨어있기나 해. 돌아왔는데 죽어 있으면 그것도 웃기니까.”

김창은 그 말을 하고서 협곡 아래로 훌쩍 뛰었다. 아무리 플레이어가 초인이라고 해도 여기서? 이안이 깜짝 놀랐지만 김창은 별로 다치지 않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선 곧장 카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마치 성난 말과 같았는데 인간이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심지어 여긴 눈밭 위가 아닌가?

김창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이안이 질린 듯 감탄했다.

“저게 같은 인간이 맞긴 한 거냐고······.”

저 멀리까지 가버린 김창은 그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그는 눈밭 위를 달리면서 시체 군단과 충돌하지 않도록 조금 외곽을 돌았다.

그러면 시간이 좀 지체될 테지만 상관은 없었다. 시체 군단은 시체로 이루어진 만큼 기동성이 느렸고 또 원체 숫자가 많아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혼자였고 아주 빨랐으니 저들보다 먼저 도착할 게 분명했다. 쉬지 않고 산 위를 달려 내려온 김창은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을 보며 입김을 내뿜었다.

한바탕 달리느라 몸이 뜨거웠다. 그는 이제 닫히려는 성문을 빠르게 통과해 곧장 영주궁으로 뛰었다.

갑작스럽게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 김창을 감히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영주의 집무실까지 들어갔다.

탈리얀 대공이 죽었으니 그 방은 비어 있어야 하건만 거기엔 에르단이 있었다. 마치 이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듯.

“자네···?”

당황한 에르단의 목소리를 듣던 김창은 이 방엔 그 말고도 누가 또 있는 걸 발견했다.

“······굳이 찾으러 갈 것도 없이 직접 왔군. 됐다, 단명종의 군주야. 수고를 덜었다.”

여자 요정이었다. 키가 아주 크고 잘 싸우게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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