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30화 (30/200)

30

베르고니아는 황당해서 입만 뻥긋거렸다. 왼쪽 어깨가 잘려 나갔는데 그 고통이 얼른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창이 잿빛으로 반짝이는 칼을 겨눴다.

“또 막아. 이번에는 진짜 죽인다.”

저 새까만 눈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베르고니아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플레이어란 놈들은 원래 다 저런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들이 얼마나 천박하고 막무가내인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저건 천박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개백정이 아닌가? 저런 걸 보면 왜 칼잡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다.

“기수님!”

요정 기수의 어깨가 날아간 걸 보고 요정 부대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열 명도 넘는 적에게 둘러싸였지만 김창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막아, 빨리.”

요정 부대가 위협하든 말든 기어코 자신을 죽일 셈이다. 그걸 보고서 베르고니아는 이번에도 끼어들지 말라고 외칠 수 없었다. 저 새까만 눈을 보니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어깨가 한쪽 날아간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을까? 전사로서의 위신도 결국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물러서······.”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물러서.”

“하지만 기수님!”

정정당당한 결투를 위해서 물러나라는 게 아니다. 베르고니아는 부하들이 전부 덤벼 든다고 해서 저 칼잡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인데 기어코 저 괴물 같은 놈의 칼날에 모두가 목 잘려 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너희는 차원문을 열어 도망쳐라. 그리고 가주에게 가.”

김창은 그 이야기를 무심히 듣고 있었다. 이거 웃기는 놈이군. 그런 이야기를 나 들으라고 여기서 하나?

“내가 그러도록 둘 것 같나?”

“안 그러겠지. 그러니 내가 널 막을 거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눈물 나는 희생이긴 한데, 애초에 이거 너희가 먼저 시작한 일이다. 뭘 비장한 척이냐?”

베르고니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괜히 덤볐어······.”

그러더니 곧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요정 기수로서 당당하게 죽을 것이니!”

한쪽 어깨가 날아갔는데도 대단한 기세다. 확실히 그 용맹함은 칭찬해줄 만해서 김창이 가볍게 감탄했다.

베르고니아는 창백한 얼굴로 창대를 꽉 쥐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 오러를 일으켰다.

“나는 딜루키둠의 베르고니아! 별 보는 자의 후손이며 또한 어머니 나무의 자손! 오늘 여기서 전사로서 싸우다 죽겠······ 켁!”

끝까지 말하지 못한 건 누가 갑자기 뒤에서 목덜미를 확 잡아챘기 때문이다.

“기수님! 여긴 저희가 맡지요! 기수님은 얼른 가문으로 돌아가십시오!”

“차원문 열었습니다! 기수님을 이쪽으로!”

요정 세 명이 베르고니아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억지로 차원문 쪽으로 끌고 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베르고니아는 그들의 손아귀를 감히 뿌리치지 못했다.

“놔! 놔라! 지금 감히 기수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냐!”

“기수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하지만 기수님은 살아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놔라, 이 멍청한 놈들아! 오러도 쓰지 못하는 너희가 어찌 저 칼잡이를 감당하겠다고······.”

“기수님, 가십시오!”

미친놈들, 아주 영화를 찍고 있네. 김창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기들이 먼저 시비 건 주제에 다 뒈질 것 같으니까 질질 짜면서 신파극이라도 하는 건가?

웃기는 새끼들. 봐주면서 하니까 사람이 아주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이젠 화가 날 지경이다. 김창이 부득 이를 갈았다.

“기수님, 커억!”

김창은 이제 더 기다리지 않았다. 차원문이 닫히기 전에 베르고니아를 쫓아가 그 머리를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그가 잿빛의 칼날을 휘두르며 빠르게 전진했다. 요정 전사들이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칼 몇 번 맞대지도 못하고 전부 목이 잘렸다.

“가! 기수님을 데리고 가!”

순식간에 요정 네 명이 죽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명의 요정이 죽었다. 이제 남은 요정은 몇 없었으나 베르고니아의 몸은 거의 절반쯤 차원문 속에 들어가 있었다.

씹새, 그냥 가게 둘 줄 알고. 김창은 자신을 방해하는 요정을 또 한 명 찔러 죽인 후에 바닥에 떨어진 창날을 집었다.

“막아!”

막긴 뭘 막아. 김창은 소리치는 요정의 목을 잘라버린 후에 그 틈으로 손에 들고 있던 창날을 힘껏 던졌다.

날아간 창날은 곧 공기를 찢으며 질주했고 어떤 요정 하나가 손을 뻗어 그걸 잡아채려 했으나 애꿎은 손바닥에 구멍만 날 뿐이었다.

결국 창날은 그대로 베르고니아의 오른쪽 어깨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차원문이 닫히더니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피를 토하는 걸 봤으니 치명상이긴 했을 텐데 정말 죽었을지는 모르겠다. 김창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마지막 요정을 죽였다.

“자기들 멋대로 시비 걸었다가 자기들 멋대로 도망치는군, 씹새들.”

하여튼 엿 같은 새끼들이다. 김창은 죽은 요정의 몸에 퉤 하고 침을 뱉은 후에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에르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세상에, 김창! 요정 부대와 함께 사라졌다기에 뭔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게 대체 뭔 일이오?”

“보는 대로지.”

“요정 부대를 전부 죽인 거요? 세상에, 지금 이게 무슨······.”

“별거 아니었어.”

별거 아니긴? 이 무시무시한 칼잡이는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나머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걸까?

에르단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요정 대가문이 움직일 거요. 딜루키둠이 당신을 노릴 거란 말이오.”

“그거 고맙군. 찾아갈 수고를 덜었어.”

“이보시오······.”

김창은 더 이야기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했다.

“가서 몸 씻을 따뜻한 물과 새 옷이나 준비해. 설마 그 정도 부탁도 안 들어주진 않겠지.”

“그거야 들어줄 수 있지만······.”

“그리고 산에 가서 네 동생 찾아와. 조만간 얼어 죽을지도 모르니까.”

* * *

베르고니아는 딱딱한 돌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얀 돌보다 더 창백해서 핏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정신은 꺼질 듯 가물가물했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쳐다보니 아는 곳이었다.

일곱 요정 대가문 중 하나인 딜루키둠의 대저택 안이다. 차원문을 통해 도망치는 건 성공한 모양이지만 이 상태로는 곧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면 대체 내 부하들의 희생은 뭐가 되나······. 베르고니아는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점차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머니 나무의 이슬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베르고니아의 입을 벌려 그 안에 액체를 흘려보냈다.

뭔가 입 안에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꿀꺽 삼켰던 베르고니아는 꺼질 듯 가물거리는 의식이 점차 또렷해지는 걸 느꼈다.

정신을 괴롭히던 끔찍한 고통도 점차 잦아들어서 이젠 눈꺼풀을 들어 올릴 만한 힘이 생겼다.

그 상태로 잠깐 숨을 헐떡이고 있자 곧 몸에 힘이 돌아왔다. 모든 요정이 숭배하는 어머니 나무에서 채취한 이슬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주 나은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나무의 이슬은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곧 죽을 사람까지 되살릴 수는 없었다.

이건 단순히 죽음에 대한 유보다. 베르고니아는 잠깐의 시간 동안 세상과 작별할 시간을 얻었을 뿐이다.

“당신은······.”

“돌아왔구나, 내 기수야.”

흐릿한 시야가 명확해졌다. 베르고니아는 다른 요정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가주님······. 면목 없습니다, 딜루키둠의 기수로서 이 추태······.”

“너는 충분히 노력했다, 기수야.”

“아라비타스 님······.”

황금의 아라비타스. 그는 태양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요정으로서 딜루키둠의 주인이었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불어온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녹보석처럼 반짝이는 외눈이 패배한 기수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눈은 감겨 있었으나 나머지 한쪽 눈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저는 부끄럽습니다. 기수로서 제 의무조차 다하지 못하고 일족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목숨만 건져온 저 자신이. 그러니 아라비타스 님, 저를 그냥 두십시오. 편안한 죽음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죽게 두십시오.”

“내 말했지, 너는 충분히 노력했다고. 그런데 어찌 너에게 벌을 주겠느냐?”

베르고니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나를 살리려고 제 부하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게 죄가 아니라면 무엇이 죄겠습니까?”

“그래, 오늘의 싸움으로 나는 많은 일족을 잃었다. 아주 슬픈 일이지. 마땅히 복수해야 하는 일이나 나는 그러지 않겠다.”

“아리바타스 님? 복수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아라비타스의 녹색의 눈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뭔가 저 멀리 있는 걸 보는 것처럼 잠깐 조용히 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신탁이 있었다.”

“신탁? 천상의 신역에 오른 승천자의 말씀입니까?”

아주 오래전, 요정의 몸으로 신성을 얻어 승천한 자가 있었다. 그 역시 어머니 나무와 같이 요정들의 숭배 대상이었다.

승천자는 때때로 신탁을 내려 그 뜻을 전하곤 했다.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가장 마지막 신탁은 수백 년 전의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위대한 신. 승천한 자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던 신.”

아라비타스가 말했다.

“태양신께서 말씀하셨다. 어둠이 오리니, 너희는 긴 밤을 지새우게 되리라고.”

“어둠이라면······.”

“뭐겠느냐? 지옥에 처박혀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던 멍청한 대악마들이나 또는 자기가 진짜 반신이나 되는 줄 아는 덜떨어진 날개 달린 도마뱀, 또는 어둠 속에 숨어서 헛짓거리나 하는 구역질 나는 족속들이겠지.”

베르고니아가 억지로 자세를 바로 했다.

“위대한 요정 대가문이 나서야 할 차례로군요. 단명종의 수호자이자 그들의 목자로서.”

아라비타스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따스하진 않았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느냐? 왜 우리가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지?”

“···아라비타스 님?”

“나는 칠백 년의 시간을 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많은 전투를 치렀고 또 수많은 목숨을 구했지. 내 눈이 보이느냐?”

아라비타스가 감긴 눈을 억지로 떴다. 그 안에는 빛을 잃은 흰 구슬이 담겨 있었다.

“내가 단명종을 위해 입은 상처다. 이뿐인 줄 아느냐? 내 너에게 보여주진 못해도 이 몸뚱이는 상처투성이다. 베이고, 찢기고, 부러지고, 또 갈라졌지.”

아라비타스는 가주가 되기 전에 딜루키둠의 기수 역할을 했다. 그가 칠백 년의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는지 베르고니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의무 아닙니까?”

“그 의무는 우리 스스로 짊어진 굴레일 뿐이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 단명종을 보아라. 그들이 우리를 숭배하더냐?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또 경외하느냐?”

베르고니아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요정은 단명종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나 그들은 그걸 감사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너무 많이 흘렸지. 이젠 그래서 안 된다. 요정의 목숨은 저깟 단명종의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무거우니까.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버려선 안 돼.”

“하지만······.”

“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렇다고 악과 싸우는 걸 멈춰선 안 된다는 소리겠지. 그 말이 옳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세상은 악에 물들 것이고 그건 결국 우리 스스로 목에 칼을 겨누는 일이 될 테니.”

아라비타스가 하지만 하고 말을 이었다.

“이젠 굳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단명종은 나약하나 몇몇 이방인은 특출나지 않느냐?”

“아라비타스 님, 설마······.”

아라비타스의 따스한 미소가 황금처럼 빛났다. 웃음은 아름다웠으나 목소리는 스산했다.

“티샬레.”

부름과 함께 기둥 뒤에서 여자 요정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베르고니아의 뒤를 이을 다음 기수로 가장 유력한 젊은 전사였다.

“네, 아라비타스 님.”

“오늘 내 기수의 팔을 자른 이방인을 찾아내라. 그리고 그가 악의 대적자라고 믿게 만들어.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끝없는 황금으로 정신을 어지럽혀라. 그래서 결국 그 칼잡이가 악을 완전히 몰아내고 나면······.”

베르고니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그러면 그를 죽여.”

안 돼, 그래선 안 돼. 베르고니아는 이제야 돌레아 남작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칼잡이를 쫓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베르고니아는 확신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아라비타스는 죽을 것이다. 칼잡이의 손에. 티샬레도, 어쩌면 더 나아가 이 가문까지도······.

말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더는 죽음을 미룰 수 없었고 이별의 시간은 성큼 찾아왔다. 베르고니아는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에 저항하려 했으나 무의미한 짓일 뿐이었다.

“아라비타스 님, 제 가치를 증명하지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티샬레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