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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거대한 탑 위에 매달린 종은 도시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굵직한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자 위대한 전사였던 탈리얀 대공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울리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서리군주는 죽었고 영지를 노리던 시체 군단도 소멸했다.
탈리얀 가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한 복수가 대공의 마음에 들길 바랐다. 그리고 그 영혼이 북부의 신앙대로 전쟁신의 신역에 도달하길 기원했다.
장례는 길게 이어졌으나 그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북부의 대영주가 죽었다. 이젠 새로운 대영주가 북부의 왕에 도전할 차례였다.
“이안, 너는 이번에 네 가치를 훌륭하게 증명했다.”
배다른 형의 칭찬에 이안은 팽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설산에 너무 오래 숨어있던 탓에 감기 기운이 있었다.
이런 거야 독한 술을 데워서 한 잔 마시면 금방 낫는다지만 지금은 애도 기간이라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다.
아무리 대공의 아들이라고 해도, 오히려 대공의 아들이기에 금주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안이 코를 훌쩍이며 자기 형을 쳐다봤다.
“네 덕분에 아버지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시체도 없이 장례를 치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에르단은 대공의 집무실에 있었다. 거기가 자기 자리인 것처럼 앉아 있는 걸 보니 배알이 꼴렸다.
“나는 솔직히 네가 아버지의 후광만 믿고 설치는 얼치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군. 너는 훌륭한 전사다. 내가 인정하지.”
북부인의 대화에서는 술이 빠지는 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에르단은 따끈한 차 한 모금으로 대신했다.
“이안, 너와 나는 같은 씨를 받아 태어났다. 비록 어머니가 다르다고 해도 형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우리는 위대한 탈리얀 대공의 아들로서 가문을 지키고 영지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북부를 통일할 생각이다. 나 혼자서 하기엔 너무 큰 위업이지. 그러니 이안, 내 동생으로서, 북부인으로서, 또한 전사로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에르단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안은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곧 콧방귀를 뀌었다.
“염병할 소리를 하는군. 난 댁이 내 형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씹, 댁은 뭔데 벌써부터 자기가 탈리얀 대공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거요? 아버지는 다음 대공을 명확히 지목하지 않으셨지. 그러니 나도 염치없이 그 자리가 내 거라고 주장하진 않겠어. 대신 댁도 그러면 안 되지.”
“···뭐?”
설마 화해의 손길을 걷어 차버릴 줄은 몰랐다. 에르단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이안이 말했다.
“난 대공 자리 포기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댁도 헛바람 들어서 개소리하지 말라 이거요.”
“이안, 너!”
에르단이 벌컥 화를 냈지만 이안은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문이 쾅 하고 닫히자 방 안에서 에르단이 욕설을 지껄이는 게 들렸다.
이안은 그대로 복도를 지나쳐 가려 했다.
“괜찮겠냐.”
“···뭐가?”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창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네 형 말이야. 혹시 죽여주랴?”
“···그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그러긴 싫군.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간 날 따르던 놈들도 떠나버릴 테니까.”
굳이 자기 실력으로 대공 자리를 쟁취하겠다는데 김창이 뭐라고 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탈리얀 가문이 두 개로 쪼개질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정말 북부의 왕은 몇십 년 동안 탄생하지 않겠는데. 김창이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그게 내 알 바인가.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일거리가 많아지는 법이니 북부의 통일이 멀어진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은 일이다.
“그러면 나도 이제 슬슬 떠나볼까. 받을 돈도 다 받았으니까.”
에르단은 약속했던 대로 김창에게 후한 보상을 내렸다. 대공 가문의 장남이라 그런지 확실히 통이 컸다.
“바로 떠나나? 좀 더 머물다 가지 않고?”
“여기 더 머물 이유가 없는데 뭐하러.”
“왜 머물 이유가 없어? 여기까지 왔으니 관광이라도 좀 하다 가지 그래? 내가 여기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라 카셀은 제법 괜찮은 도시야.”
“여기 놀러 왔나? 돈 벌려고 왔지. 이제 또 딴 데 가서 돈 벌어야 해.”
그 말에 이안이 묘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이번에 돈 많이 번 걸로 아는데, 아닌가?”
정확히 얼마를 줬는진 몰라도 에르단이 섭섭지 않게 넣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돈이면 여기 카셀에서 며칠을 진탕 놀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김창 정도의 실력자라면 돈도 금방 벌 테니 그 돈 좀 쓴다고 별로 아깝지는 않을 텐데.
“제법 벌었지, 왜?”
“내 듣기로 그쪽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한다면서?”
“그래. 뭐 일 시킬 거라도 있나? 형 안 죽인다더니 마음이 바뀌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궁금해서.”
“뭐가?”
이안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가 보니까 그쪽은 돈 버는데 열심인 것치고 딱히 그 돈 가지고 뭘 하진 않아. 사람들이 왜 돈을 버나? 쓸 데가 있으니까 버는 거 아냐. 그런데 안 쓸 거라면 돈은 왜 벌어? 뭐하러 위험한 일에 굳이 머리 들이밀며 칼질하고 다니냐고.”
이안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김창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고 많은 돈을 벌었다. 이젠 몇 년 동안 일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가진 돈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돈이 떨어지더라도 금방 또 벌어들일 수 있어서 열심히 일할 필요는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왜 칼질하며 돌아다니나?
김창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보람을 느끼려고.”
“···뭔 보람?”
“게임 해본 적 있나? 없겠지. 게임에서는 말이야, 적을 죽이면 경험치가 올라.”
이안은 뭔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김창은 이방인이니 그가 살던 세상에서 쓰던 말이겠지 대강 짐작할 뿐이었다.
“경험치가 오르면 또 레벨이 오르지.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가 수치로 보인다는 소리야.”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경험치가 오르고 레벨이 오르면 더 강해지는 건가?”
“내가 아니라 게임 캐릭터가 강해지는 거긴 한데, 대충 비슷해. 나는 원래 세상에서 일할 때 말고는 늘 게임만 했어.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람이라는 게 없는데 게임은 아니거든.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가 눈에 보이고 랭킹이 오르니까 뿌듯함을 느껴.”
“그래서?”
“근데 여긴 사람 죽인다고 경험치가 오르지 않고 경험치가 없으니 레벨이 오르지도 않지. 그러면 내가 여기서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남기나? 돈이야. 금고에 쌓이는 금화만이 나를 보람차게 만들어. 그건 하나의 지표고 또한 증거야. 확실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김창은 단순히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왜?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는 굳이 그런 것 말고도 충분히 남길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허망한 짓을?
이안은 문득 김창의 눈을 보았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거기엔 공허함이 있었다. 저 칼잡이는 그런 방법 외엔 보람을 느낄 줄 모르는 것이다.
“···널 이해하긴 힘들 것 같군. 플레이어들은 다 그러나?”
“정신 이상한 놈들이 많긴 한데, 다 나랑 같은 생각인진 모르겠군. 아마 아닐걸.”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떠나겠다는 사람을 굳이 붙잡아둘 수는 없지. 나중에 또 만날 일이 있을까?”
“네가 날 고용하거나, 아니면 에르단이 날 고용한다면 또 볼 수 있겠지. 이왕이면 네가 고용하면 좋겠는데.”
“···왜? 내가 대공이 되면 바라서?”
“그래도 같이 고생하던 사이인데 에르단보다는 네가 나랑 더 친하지 않겠냐.”
그 말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무정한 칼잡이인 줄 알았는데 제법 농담도 할 줄 알았다.
“조심히 가라. 어디로 가는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너도 괜히 형한테 깝죽거리다가 죽지 마라.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보고.”
김창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복도를 떠났다. 이안도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제 갈 길을 갔다.
“바람이 쌀쌀하군.”
탈리얀 가문의 저택을 나온 김창은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로 그의 일상은 대개 그랬다.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일을 받고, 일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기.
이왕 북부에 왔으니 다른 도시에 가서도 일을 좀 받아볼까. 통일된 왕국이 없는 북부는 언제나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일거리가 떨어질 일은 없겠군. 김창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카셀을 떠났다.
떠돌이 생활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그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속에서 몇 개의 일을 받았고 또 몇 명의 사람을 죽였다.
때때로는 설산의 괴물을 죽여달라는 의뢰도 있었는데 의외로 북부에서는 사람 죽여달라는 의뢰보다 그런 종류의 것이 더 많았다.
날 때부터 전사인 북부인들에게 있어서 남의 손을 빌려 복수하는 건 치욕적인 일이라고 여겨지는 탓이다.
덕분에 김창은 한 달 동안 사람보다 괴물을 더 많이 죽이고 다녔다. 한 사람이 그토록 많은 괴물을 죽이고 다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서 그에 대한 소문이 알게 모르게 북부 전역에 퍼졌다.
김창으로선 곤란한 일이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관심이 싫어서 원탁에도 잘 들리지 않던 사람이다.
명성이 오른다는 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본다는 거고 그건 곧 귀찮은 일이 더 많이 생긴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면 더 많은 의뢰를 받을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유명해지면 거만한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이 와서 자기 의뢰부터 받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놈들 머리에 칼침 놔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늘 뒤처리가 귀찮아진다. 특히 북부인이라면 너무 호전적이라서 가문 전체가 칼 들고 쫓아올 수도 있었다.
그럼 또 싹 다 죽여야 할 텐데 그랬다간 또 다른 복수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죽이진 말고 협박만 해서 돌려보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야 했다.
“여기 있었군, 이국의 칼잡이. 나는 오샤르 백작 각하의 대리인이자 그 오른팔인······.”
“나는 기사 도리안이다. 네 명성은 익히 들었다. 내 주인께서 네게 시킬 일이 있으니······.”
김창은 어느 여관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귀찮게 하는 놈들이 몇 있어서 잘 타일러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주먹으로 때려서 반병신으로 만들긴 했지만 결국 죽이진 않았으니 심부름꾼의 주인도 김창의 뜻을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원래 이런 건 정말 죽이는 것보다 험한 꼴을 만들어서 보내는 게 더 효과적이다.
아침부터 푸닥거리를 몇 번 한 게 효과가 있긴 했다. 이젠 그에게 겁도 없이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졌으니까.
대신 여기 있다는 걸 들켰으니 또 다른 곳으로 금방 이동해야 할 것이다. 오늘 하루만 머물고 내일 떠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독한 술을 한 모금 들이킬 때였다.
“···드디어 뵙는군요, 김 선생님.”
또 어떤 놈이 겁도 없이 말을 거나? 김창이 반쯤 감았던 눈을 뜨자 웬 키 작은 마법사 하나가 보였다.
흰 얼굴은 상당히 심약해 보였다. 저런 얼굴을 한 주제에 나한테 말 걸 강단은 있는 모양이지.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물었다.
“넌 또 누군데 나한테 선생이라고 하는 거냐.”
“저보다 잘나면 다 선생님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심민우라고 합니다.”
플레이어였나?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김창이 술병을 기울이며 물었다.
“나한테 용건 있나?”
“물론 있지요.”
“누구 죽일 사람 있나 보지? 근데 그런 거라면 직접 하지 그러냐.”
“하하, 농담도······.”
“농담 아닌데.”
심민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할 말 있으면 해라. 먼 길 와서 목마른 거면 한 잔 마시고 하던지.”
“아, 그럼 감사히.”
심민우가 술잔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가 곧 켁켁 소리를 냈다.
“···혹시 독극물을 먹는 취미가 있으십니까?”
“술이야, 인마. 여관 주인이 직접 주조한 건데 들으면 슬퍼할 소리 하지 마라.”
“아, 죄송합니다. 뭐 이딴 걸 드시나 해서······.”
얼굴은 심약해 보이는 놈이 말은 또 막 지껄이는 게 우습다. 김창이 안주로 시킨 소시지를 먹으며 말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슬슬 용건을 말하지 그러냐.”
심민우가 굳은 얼굴 그대로 말했다.
“제가 듣기로 김 선생님은 원탁 내에서도 손꼽힐 만한 강자라고 하더군요. 어째서 김 선생님에 대한 소문이 나지 않았는진 모르겠지만······. 김 선생님의 위업에 대해선 의장님께 익히 들었습니다. 대전이 초반의 혼란을 수습하고 수많은 악을 물리쳤으며 얼마 전에는 대악마의 여덟 기수 중 하나인 아카온을, 이곳 북부에서는 서리군주 모레이를 죽여 많은 사람을 구하셨죠.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업적이······.”
팅. 탁자에 박힌 포크가 부르르 떨렸다.
“용건만 말하라고.”
“···나 좀 살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