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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이런······. 우웁!”
심민우가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건 사람 여러 번 죽여본 김창도 얼굴을 찡그릴 만한 일인데 저 심약한 마법사라면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한 일이다.
“저쪽으로 가서 물이나 마시고 있어.”
“우윽, 가, 감사합니다······.”
심민우는 창백한 얼굴로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김창은 동굴 천장에 매달린 시체를 바닥으로 내리고 그 상태를 확인했다.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걸 보면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어쩌면 저 안의 악마도 상처를 입고 휴식 중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좀 더 서둘러야 했나. 그랬으면 이 사람들도 안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내 책임이랄 건 없지만 그래도······.
괜히 감상적인 생각이 드는 건 그들이 죽은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자신이야 사람 죽이는 게 일이니 어떤 식으로 죽어 있든 이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이왕 사람 죽일 거라면 좀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낫지 않나. 이건 뭐 슬래셔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고······.
“난 이제부터 저 안에 들어갈 건데.”
심민우가 잘게 떨리는 고개를 들어 김창을 쳐다봤다.
“같이 갈 거냐?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내 의뢰주고 나는 돈 받은 만큼 확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어.”
“···가아죠.”
한 박자 쉬고 말하긴 했지만 거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김창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굳이 가겠다고?”
“네, 제 잘못이니까요. 제가 호기심에 악마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저 두 사람도 죽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건 제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아니, 제가 죽인 겁니다······.”
김창은 심민우의 눈가에서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그새 찔끔 운 모양이지.
그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사람 죽여본 적 있나?”
“···없는데요.”
“그래,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그런 소리? 내가 뭔 말을 했는데요?”
약간 도전적인 목소리였다. 감정이 격해진 탓일 것이다.
“넌 네가 저 두 사람을 죽인 거라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누구 한 사람의 목숨을 끝장낸다는 건, 내 손으로 직접 그 숨통을 끊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집행관들이 너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죽인 건 아니야. 죽인다는 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그건 너 같은 애송이가 말할 게 아니야.”
심민우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죠? 어떻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어요?”
나도 시체 보고 눈을 찡그리긴 했는데. 김창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죽여봤으니까.”
“···그러면 나도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되면 당신처럼 되는 걸까요? 다른 플레이어들이 필요하다면 살인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걸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난···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군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아무리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목소리가 울적했다. 심민우는 이 세상의 생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죽일 자신이 없는 주제에 죽을 자신도 없다.
“모든 일에는 재능과 기술이 필요하지. 내가 볼 땐 넌 재능도 없고 기술도 없어. 그러니까 넌 이런 거 하지 마라.”
“···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사람도 죽여본 놈이 잘 죽여. 사람 죽일 일 생기면 괜히 헛짓거리하지 말고 나 같은 놈한테 시켜라.”
심민우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애초에 사람 죽일 일이 없거든요?”
“내가 이 개 같은 세상에서 살아보니까 사람 죽일 일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다. 너도 언젠가는 뭔 이유든 사람 죽일 일이 생기겠지. 그러면 그땐 나 같은 놈한테 시켜. 손 더럽히 일은 이미 더러운 놈이 하는 게 맞아.”
심민우는 김창과 대화하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목소리가 덤덤해서 그런가? 뭔가 개소리만 지껄이는 것 같긴 한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니까 오히려 진정이 되나?
“가자.”
김창이 움직이자 심민우도 얼른 뒤를 따랐다. 우울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했으니까.
“이 방향으로 쭉 가면 되나?”
“잠시만요.”
심민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뭔가 주문을 외우자 빛의 화살이 떠올랐다. 그게 허공을 떠다니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목하는 듯했다.
“그건 또 뭔 마법이냐?”
“길 찾기 마법이요. 조금 응용하면 잃어버린 물건도 찾을 수 있어요. 이 마법만 있다면 리모컨을 잃어버려도 안심이라는 말씀.”
이 세상에는 리모컨이 없는데. 김창은 별 이상한 마법을 쓰는 심민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원래 게임 속에는 저런 마법이 없었을 테니 저건 여기 와서 배운 것이리라.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굳이 새 마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특이한 놈이다.
“저쪽이에요.”
동굴 안은 어두웠지만 빛의 화살이 떠다니며 방향을 제시하는 덕에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동굴 안을 걸었다. 천장에서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 악마 놈은 대체 얼마나 안쪽에 숨은 거냐?”
족히 한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악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집행관 둘을 죽일 정도의 악마라면 상당한 강자일 테니 마력이 느껴질 법도 한데 그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 여기보다 훨씬 더 안에 있다는 소리인데 대체 왜 그렇게 안쪽에 숨어 있나? 혹시 너무 다쳐서?
그 정도로 다쳤으면 애초에 저 안쪽까지 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다 온 것 같습니다. 화살이 반짝이고 있어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걸 알리듯 화살이 반짝거렸다. 내가 배우긴 싫지만 누군가 배워두면 확실히 편리한 마법이다.
“나 혼자 간다. 넌 여기서 기다려.”
심민우는 공격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한다. 불꽃 정도야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걸로는 쥐새끼나 겨우 죽일 것이다.
남을 지켜가며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기에 두고 가려고 했는데 심민우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죠. 제 잘못이니까.”
“사람 지키면서 싸우기 싫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저, 싸울 줄은 몰라도 도망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어요. 제가 장담하는데, 이 세상에 저보다 점멸 마법을 잘 쓰는 사람은 없을걸요?”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다. 하기야 심민우는 공격 마법을 안 배우는 대신에 다른 것에 투자했으니 점멸 마법도 잘 쓸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야.”
“감사합니다. 절대 붙잡히지 않을게요.”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마가 숨어 있는 곳 안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단지 한 걸음, 거리로 치면 그리 멀지도 않은데 확실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미 어둠 속에 있는데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다. 공기는 탁하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퀴퀴한 짐승 냄새가 난다.
“···내 분명히 경고했지.”
스산한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글 모르는 무지렁이가 와도 내 뜻을 알 수 있도록 친절히 경고해두지 않았느냐? 내가 그런 경고를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도 모르고 감히 내 거처에 숨어들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마치 짐승의 것만 같다. 약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누린내를 생각하면 정말 짐승일지도 모른다.
“원래 같으면 너희 같은 불손한 침입자들을 벌해야 하겠지만······. 그냥 돌아가라. 살려줄 테니 돌아가.”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느껴진다. 숨소리가 거칠지 않은 걸 보면 집행관들과 싸우면서 전혀 다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 새끼들 강하다면서? 슬쩍 심민우를 쳐다보자 그가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혼니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그리고 네 죗값을 치러!”
“···넌 또 뭐냐?”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고 있다. 약간 잠기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심민우가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날 몰라? 널 소환한 마법사다, 이 멍청아!”
“멍청이? 이 건방진 마법사 놈이······.”
원래 악마라면 당장 화를 내면서 덤벼 들었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이상하다. 정말 다쳤나? 그런 것치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던데.
김창이 흐음 소리를 내며 물었다.
“혼니르라고 했나? 네가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라던데 정말이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흠, 이름이 뭐 중요한가. 난 혼니르다. 넌 이름이 뭐냐, 칼잡이야.”
“김창.”
“···플레이어로군.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플레이어한테 여덟 기수 중 하나가 죽었다고 하던데, 누구더라.”
“아카온 아닌가?”
“그런 이름이었나? 뭐 이미 죽은 놈인데 이름이야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이 새낀 뭔데 이렇게 의욕이 없어? 칼로 찌르면 그제야 비명 지르면서 날뛸까? 김창이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거 죽인 게 나다. 물론 정확히 말해서 반죽음 만든 게 나고 진짜 죽인 놈은 따로 있는데 그거야말로 무슨 상관이겠냐.”
“그래서?”
“뭘 그래서야? 덤비라고, 씹새야.”
한숨이 길게 울렸다. 저 악마는 정말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김창인지 씹창인지 하는 칼잡이 놈아. 내가 아까 말했지, 살려줄 테니까 돌아가라고. 왜 자기 목숨을 그냥 내버리려고 하는 거냐?”
“돈 받았으면 일을 해야 하니까. 너야말로 왜 자꾸 날 살려주겠다는 거냐? 악마면 악마답게 당장 일어나서 덤벼.”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하나 말해주지, 난 싸우기 싫다. 나는 싸움 자체를 싫어해.”
사람 두 명을 내장으로 목 졸라 죽인 놈이 그런 소리를 하나? 싸움 싫어하는 놈이 그딴 짓을 하면 싸움을 좋아하는 놈은 대체 뭔 짓을 하는 건가.
심민우가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뭔 개소리야! 싸움 싫어하는 악마가 어디 있어! 아주 그냥 입만 열면 개소리를······.”
“거기 너 조그만 마법사야. 내가 왜 너 따위의 한심한 놈의 소환을 거절하지 않았는지 아느냐?”
혼니르가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하기 싫어서야. 지옥에 있으면 대악마인지 뭔지 하는 씹새가 자꾸 일을 시켜. 막 영혼을 고문하라느니, 지옥의 용광로 온도를 더 올리라느니, 가서 더 많은 영혼을 잡아 오라느니 그런 일을 시킨단 말이야. 근데 난 일하기가 싫다. 가능하다면 그냥 어디 숨어서 잠이나 잤으면 해.”
이건 또 뭔? 김창과 심민우가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건 말건 혼니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옥에 있으면 대악마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지. 그리고 나처럼 강한 악마는 이곳에 직접 현현할 수 없다. 오직 누군가의 부름이 있어야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어떤 미친놈이 지옥의 여덟 기수를 부르겠나? 재물이나 신비한 힘이 필요하다면 그냥 적당한 놈을 부르면 되는데. 황금을 뿌리는 건 그냥 아무 잡놈이나 가능해. 난 너무 강해서 불러봤자 돌아오는 건 파멸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난 이곳에 현현하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 부르는 미친놈이 있긴 있더라고. 그건 확실히 재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인 만큼 일단은 칭찬해주마, 건방진 마법사야.”
심민우가 큼 소리를 냈다. 김창은 이제 슬슬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말했다.
“그래서, 싸울 거냐 말 거냐?”
“하아, 죽는 게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어둠 속에서 거구가 일어났다. 이제 슬슬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그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간단하게 내장을 좀 주물러주마. 걱정할 건 없다. 죽이고 나서 꺼낼 거니까 그리 고통스럽진··· 크악!”
김창은 일단 칼부터 찌르고 봤다. 씹새가 주절주절 뭔 말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