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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36화 (3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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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 같은 자식아! 지금 내가 말하고 있지 않으냐!”

분명 칼로 찔렀는데 일격에 죽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악마는 악마다. 김창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악마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불 좀 켜봐.”

나직이 말하자 심민우가 얼른 빛을 만들어냈다. 새하얀 빛이 어둠을 걷어내자 그 속에 숨어 있던 악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리가 약간 굽은 듯 구부정한 자세로 선 악마는 염소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다리 역시 염소의 것이었는데 근육이 얼마나 두꺼우며 또 단단한지 날붙이가 전혀 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세 개의 손가락을 가진 손에는 길게 뻗은 손톱이 있었다. 빛을 흡수하는 듯 짙은 검은색을 가진 손톱은 몹시도 길어서 손톱이라기보다는 마치 칼날처럼 보였다.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악마의 몸 위를 쓸고 지나갔다. 빳빳한 털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짐승의 누린내가 났다. 또한 짙은 살기도.

혼니르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김창이 말했다.

“뭐야, 이 염소 대가리는.”

“까―불―어!”

혼니르가 고함을 지르며 김창에게 달려들었다. 쿵쿵 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모습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죽어라!”

휙!

마치 칼처럼 생긴 손톱이 공기를 갈랐다. 김창은 칼을 들어서 그 공격을 정면에서 막았다. 챙 소리가 나면서 묵직한 충격이 손목에 전해졌다.

이 녀석은 얼마나 강할까. 같은 여덟 기수 중 하나라고 해도 분명 서열이 있을 테고 강함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너, 아카온보다 강하냐?”

“당연한 걸 묻는군! 아카온은 여덟 기수 중에서도 가장 약해빠진 놈이다!”

그러면 아카온보다 혼니르가 더 강하다는 것일까. 칼 몇 번 맞대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진짜 네가 더 강한 거 맞냐? 걘 날개도 있던데 넌 없잖아.”

“이런 씹! 날개가 무슨 상관이야! 잘 싸우는 놈이 더 강한 거지, 날개 있는 놈이 더 강한 거냐!”

왜 상관이 없지? 날개가 있으면 날 수 있잖아? 김창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칼을 휘둘렀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 불티가 어지럽게 튀었다.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심민우는 눈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구나! 이 정도면 요정 전사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혼니르는 나름 칭찬한다고 한 소리겠지만 김창은 별 감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요정 전사 따위는 손쉽게 학살할 수 있는 실력자요, 또 얼마 전에는 요정 대가문의 기수까지 죽이지 않았나?

“그딴 걸 지금 칭찬이라고 하는 거냐.”

“음? 인간 따위가 요정 전사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말해줬는데 당연히 칭찬이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자루를 고쳐잡았다. 칼날이 울며 잿빛에 휘감겼다.

“그래, 네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건 알겠다.”

순간 혼니르의 눈이 커졌다. 눈동자가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이게 뭔? 인간 따위가 오러를?”

“아까부터 인간 무시하는데, 오늘 그 인간한테 한번 죽어봐라.”

김창이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오러에 놀라 당황하고 있던 혼니르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악마는 긴 세월을 살았고,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다. 혼니르는 날 때부터 강한 악마였으나 여덟 기수 중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러한 전투 경험의 덕이 컸다.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이자 칼날의 짐승이라 불리는 혼니르는 김창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인간 따위가 오러를 다루는 건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일 뿐 아닌가? 그 나약한 종족에겐 난쟁이 전사와 같은 괴력이 없고 요정 기사와 같은 민첩함이 없다.

오러를 다루는 자라면 이미 몇 번이나 죽여본 적이 있다. 싸우면서 제법 다치긴 했지만 결국 모두 이겼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혼니르는 다리 근육을 긴장시키며 자신의 손톱에 사악한 힘이 깃들게 했다. 어둠보다 더 새까만 색으로 음습하게 빛나는 암흑은 바위와 강철을 종잇장처럼 잘라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기서 날뛰는 건방진 인간조차도······.

“뭘 야려.”

잿빛의 칼날이 다가온다. 그에 맞서 새까만 손톱이 움직였다.

서로의 목숨을 끝장낼 수 있는 두 개의 무기가 공중에서 부딪쳤다. 본래라면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어야 할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오러와 마기, 두 가지의 힘이 부딪쳐서 지잉 소리를 냈다. 상반된 두 힘은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부딪힐 때마다 불티가 튀었지만 이젠 불씨가 줄줄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다.

두 무기가 부딪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공중에서 불씨가 비가 되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동굴 안에서 격한 전투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처음의 소리가 흩어지기도 전에 다음 소리가 울리고, 또 그 소리가 흩어지기 전에 다음 소리가 울려 소리가 소리를 잡아먹고 더욱 커졌다.

공방은 쉴 새 없이 이어졌으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혼니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뭘?”

김창의 태도는 여상하다. 잠깐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목이 날아갈 듯한 살벌한 싸움 속에서도 별로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토록 격렬하게 움직였는데 숨 한 번 헐떡이는 기색이 없다. 혼니르는 괴물을 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날 상대로 그렇게 싸울 수 있냔 말이다. 요정 대가문의 기수도 너처럼 싸울 수는 없을 텐데······.”

“미안한데 그 요정 대가문의 기수 중 하나가 나한테 거의 뒈질 뻔했다. 어쩌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네가 나중에 알아보고.”

“요정 대가문의 기수가? 설마 그럴 리가······.”

“진짜인지 궁금하냐? 그러면 내가 확인시켜주지.”

감정을 알 수 없는 저 검은색 눈.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면서도 조금의 흥분도 보이지 않고 긴장을 하는 기색도 없다.

마치 늘 하던 일을 하는 것처럼 무심히 휘두르는 칼. 저런 것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이며 괴물을 죄다 썰어 버리는 놈을?

내 알기로 지옥의 대악마조차도 저렇게 사무적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을 텐데······.

“지옥으로 보내주마.”

몇 번 더 무기를 맞대고 나서 혼니르는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자랑이자 별명의 이유였던 검은색 손톱이 하나둘씩 부러지는 걸 보고서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저 칼잡이는 강하다.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소름 끼치게 강하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씹, 이제 알 게 아니라 처음에 다짜고짜 칼부터 찌르고 볼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 새끼 저거 따지고 보면 대악마보다도 더 위험한 놈 아닌가?

“···내가 졌다.”

혼니르는 여섯 개의 손톱이 전부 잘리고 오른쪽 어깨까지 내주고 나서 항복을 선언했다. 더 싸워봤자 승산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심민우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지만 김창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가 칼을 휘둘러 왼쪽 어깨를 잘랐다.

“끄아악! 항복했잖아, 씹새야!”

“악마의 말을 믿는 놈도 있나? 네가 또 뭔 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 일단 무력화는 시켜야지.”

혼니르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말도 사실 틀린 건 아니라서 일단 조용히 있었다.

“저 새끼 저거 뭔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요? 순순히 항복하는 게 뭔가 이상한데요? 일단 고문 좀 해보죠?”

험악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 심민우다. 혼니르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놈이 집행관을 둘이나 죽여? 그것도 그리 끔찍한 모습으로!”

“말을 똑바로 해야지, 건방진 마법사야. 그건 그 녀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그런 거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만든 건 또 다른 침입자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일 뿐이고. 네가 날 소환했으니 알겠지. 내가 언제 무고한 자를 죽인 적이 있더냐?”

심민우가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혼니르는 자기를 먼저 공격한 집행관 둘 말고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여긴 악마의 거처고 집행관들은 침입자였으니 그건 정당방위라고 해도 될 것이다.

“저 녀석의 말도 틀린 건 없지.”

김창이 혼니르의 말에 동의하자 심민우가 다급히 외쳤다.

“하,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나도 딱히 이 녀석을 살려둘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의 생각이야 뻔하지. 여기서 죽어봤자 완전히 소멸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이 상황만 모면하려고 하는 거잖아.”

혼니르가 호오 소리를 냈다.

“똑똑하군. 그래, 맞다. 난 죽어도 지옥으로 돌아갈 뿐,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야. 물론 거기 돌아가면 내 주인에게 또 개 같이 부려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뭐 어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넌 지옥에서 굴러야 하잖아. 김창이 그 말을 목구멍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끝내자.”

“흐흐흐, 날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모습이 재밌구나. 그래, 너는 확실히 강하다. 아카온은 물론이고 나보다 강하지. 하지만······.”

“하지만 뭐? 다른 악마는 너보다 더 강할 거라고? 대악마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할 테니 조심해야 할 거라고? 씹, 너흰 뭐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냐? 웬 용을 섬기는 난쟁이도 제 주인이 강하다고 염병을 떨더니 아카온도 그랬지. 그리고 서리군주인가 하는 얼치기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더니 이젠 너까지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혼니르가 입만 뻥긋거리는 가운데 김창이 이어서 말했다.

“악마라는 놈이 하는 짓은 어디 가서 얻어맞고 형한테 이른다고 하는 동네 애새끼랑 다를 게 없군.”

“···추한 짓인지는 알지만 내 주인께서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혼니르는 기어코 그 말을 했다. 김창이 쯧쯧 혀를 차며 칼자루를 고쳐잡았다. 날카로운 칼끝이 악마의 심장을 겨누었다.

“죽여주마.”

“하, 너는 날 죽일 수 없어. 내 육신을 거꾸러트릴 수는 있겠지만 내 영혼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뭘 잘했다고 비장한 척이지? 김창은 코웃음을 치며 악마의 심장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쿡!

잿빛의 칼날은 악마의 단단한 근육을 종잇장처럼 가르며 심장의 정중앙에 단단히 박혔다. 혼니르가 크억 소리를 내며 피를 줄줄 토했다.

“다음에··· 또 보진··· 말자··· 칼잡이야······.”

울컥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혼니르는 웃고 있었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칼잡이로부터 도망치는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지옥으로 돌아가 제 주인의 구박을 받으며 또 끝없는 노동을 해야 할 테지만 그게 내 일인데 뭐 어쩌겠나.

요 얼마간의 휴식은 잠깐의 여흥이었다고 생각하자. 아, 돌아가서 다시 일할 생각에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구나······.

“음······?”

혼니르는 당황했다. 나른한 기분으로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을 즐기고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기운이 빠져? 그건 단순히 기분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지옥으로 돌아가야 할 영혼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칼잡이야!”

“내가 하긴 뭘 해? 그냥 심장에 칼침 좀 놔줬을 뿐인데.”

혼니르는 덜컥 겁이 났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지옥으로 돌아가야 할 영혼이 흩어져 완전한 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저 마법사가 뭔가 수작을 부렸나? 그게 아니라면······.

“너 설마!”

“설마 뭐.”

김창은 칼을 바닥에 꽂고 칼자루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그 여유로운 자세를 보고서 혼니르는 빛을 발견했다.

그건 눈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껴야 하는 빛이었다. 어둠을 걷어내고 여명을 끌어오는 찬란한 빛.

“더럽고 추악한, 이 끔찍한 힘······.”

악마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신성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성기사와 사제, 신을 섬기는 자들은 신으로부터 신성력을 빌려올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저 칼잡이는 어떻게 내 영혼을 부쉈나? 신을 믿는 것 아니면서 대체 무슨 수로?

방법은 하나뿐이다.

“승천할 자가 오리라······.”

가장 순수한 신성을 얻어 승천의 자격을 갖추는 것, 반신이 되어 필멸의 운명을 초월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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