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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우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자신은 단지 원탁에 이번 사건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러 갔을 뿐인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여러 명의 마법사가 바닥을 구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고 수십 명의 사람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그 상황에서 한석구는 사장 나오라고 윽박지르고 있으니 이건 뭐 깡패가 깽판 치러 온 거랑 다를 게 뭔가?
“의장님, 이러지 말고 대화로 좀······.”
“지금 대화하고 있잖아? 내가 뭐 사람이라도 하나 죽였니?”
당당하게 말하는 한석구를 보며 김창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새끼 저번에 산자이가 여긴 게임인데 사람 좀 죽이는 게 뭐 어떠냐고 했을 땐 어이없어하더니 정작 자기는 다짜고짜 사람부터 때려눕히고 있네.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사람 뼈 한둘쯤 부러져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고 여기나?
하기야 죽이는 것보다 낫긴 하겠지. 김창이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심민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망했어요···.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요. 차라리 우리끼리 마탑에 가는 게 더 나을 뻔했어요. 그럼 다쳐도 저 혼자 다쳤겠죠.”
“그건 아닐걸. 만약 네가 마탑의 처벌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한석구가 당장 달려와서 마탑에 불을 질렀을 건데, 그럼 오히려 그게 더 큰 피해를 냈을 거다.”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무슨 깡패입니까? 우르르 몰려가서 사람들 괜히 괴롭히고 핍박하는 게 대체 뭔······.”
“우리 깡패 맞아.”
“···뭐라고요?”
김창이 무심히 대답했다.
“깡패 맞다고.”
플레이어라는 건 애초부터 태생이 깡패일 수밖에 없다.
한번 생각해 보라. 법과 도덕이 힘 앞에서 무력한 세상인데 칼 잘 쓰고 마법 잘 쓰는 놈이 있다. 그러면 뭐가 되겠는가? 깡패가 된다.
애초에 인간은 그런 족속이다. 힘이 있으면 휘두르고 싶어하고 그걸 뽐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법이니 별 새삼스러운 것도 없다.
그러면 그런 놈들이 모이면 뭐가 되나? 집단이 된다. 지금의 원탁을 보라. 깡패인 플레이어들이 모여 어엿한 깡패 집단이 되지 않았나?
모두가 두려워하고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폭력 집단. 이걸 뭐라고 하던가? 조직폭력배 아닌가.
따라서 플레이어는 깡패고 원탁은 깡패 조직이다. 자기들 딴에는 나름대로 규율도 있고 선도 지킨다고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폭력조직일 뿐이다.
김창은 그런 설명을 심민우에게 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심민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아니, 말이야 맞는 말 같은데······.”
“근데.”
“그걸 김 선생님이 하니까 좀 이상해서요.”
김창이 웃었다. 크게 웃은 건 아니고 웃음소리를 약간 흘린 것뿐이지만 워낙 잘 웃지 않는 사람이 그러니 심민우가 긴장했다.
혹시 기분이 상했나?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김창이 말했다.
“원래 깡패에 대해서 잘 아는 건 같은 깡패 아니냐. 그러니 내가 깡패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
심민우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석구 쪽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삼 초 지난 것 같은데 마탑의 마스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군요. 설마 삼 초 지났다고 또 난리 치진 않겠죠?”
“설마 그러려고. 애초에 쟤도 정말 삼 초 안에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을 텐데.”
“하기야 그렇겠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홀 중앙의 계단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녹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건 집행관의 것과 같았다. 새롭게 나타난 집행관들의 시선이 한석구에게 모였다.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울 만도 하건만 한석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집행관들도 눈싸움을 하려는 것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날 찾았다고 들었소.”
집행관들의 중앙에 선 중년의 남자가 계단 아래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러나 그 발은 계단을 밟지 않았다.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날아서 계단 아래까지 비행하는 모습은 신비하다 못해 우아했다. 항상 사람 죽이는 마법만 보던 김창도 그 실력에 대해선 확실히 감탄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마탑주인 모양이지. 김창이 혼자 추측하는 가운데 한석구가 입을 열었다.
“마탑주?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원탁의 대마법사, 그대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 같은 길을 걷는 자로서 대화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내 기꺼이 대화에 응했을 텐데.”
마탑주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석구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말했다.
“흠, 이건 확실히 과했군. 이럴 것까진 없었는데 화가 나서 그만. 그래요, 미안합니다.”
순순히 사과하는 게 오히려 더 무섭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웬 미치광이를 보는 것처럼 한석구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일단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그래도 되겠소?”
“물론.”
“그 전에 망자의 넋부터 달랬으면 하는데, 괜찮겠소?”
한석구가 토드와 아레스의 시체를 슬쩍 쳐다보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 그러시던지. 그쪽 마음대로 하세요.”
여기저기서 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태도에 집행관들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감히 덤벼드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마탑주의 의사를 존중했다. 여기서 멋대로 행동하는 건 제 주인을 욕보이는 짓이었다.
마탑주가 나직이 말했다.
“토드, 그리고 아레스 집행관의 시체를 옮기게. 그리고 자네들은 나와 함께 가지.”
마탑주가 몸을 돌리자 한석구와 그 일행이 뒤를 따랐다. 뒤쪽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반응하진 않았다.
“이쪽일세.”
마탑주는 손님들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보통 이럴 땐 응접실로 안내하지 않나. 김창이 흠 소리를 내는 가운데 마탑주가 마법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손짓으로 문의 걸쇠까지 채웠다. 굳이 왜? 손님맞이를 할 생각이라면 하녀를 시켜서 차라도 내와야 할 텐데 문은 왜 잠그나?
설마 플레이어 셋을 한 번에 상대할 생각인데?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한석구가 잠긴 문을 한 번 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로에라 시날레아.”
심민우는 마탑의 마법사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마법사 플레이어만 못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딱 한 명, 마탑주라 불리는 남자만은 달랐다. 그는 마법사 플레이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름은 로에라 시날레아였다.
마법의 달인이자 마탑의 주인, 또한 뭇 마법사의 우러름을 받는 존재가 입을 열었다.
“이런 제기랄, 자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음? 심민우는 순간 당황했다. 방금까지의 근엄함은 다 어디다 갖다 버리고 저딴 말을?
더 놀라운 건 한석구의 태도다. 그는 마치 자기 자리인 것처럼 로에라의 책상에 앉더니 그 위에 다리를 올렸다.
“이봐요, 아저씨. 사정 다 듣고 왔을 거 아니야? 근데 뭘 모르는 척을 하시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면 좀 알게 해드려?”
“···아니, 사정이야 알고 있지. 민우 저 친구가 악마를 소환했고 집행관들이 그 뒤를 쫓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거 아닌가? 미리 말하지만 그건 집행관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야.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정치하는 놈들이 대개 그러지. 나는 모릅니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근데 모르고 기억이 안 나면 책임이 없어져? 아저씨, 알 만한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로에라가 한숨처럼 말했다.
“···내 사과하지. 이번 일에 대해서 분명히 사과하겠네.”
“당연히 사과해야지. 아저씬 아까 집행관들이 멋대로 벌인 일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럴 리가 있나? 그랬으면 당장 다시 돌아오라고 했어야 말이 맞는 거 아니요? 그치들이야 우리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친다지만 아저씨는 아니잖아.”
“이봐, 한석구. 나는 마탑의 주인이야. 누가 봐도 민우 저 친구가 잘못한 게 뻔한 상황에서 원탁이 무섭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되겠어? 응? 내 위신이 어떻게 되고 내 체면은 또 어떻게 되겠나?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도 잘 알잖나······.”
한석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 물론 잘 알지. 애초에 그 자리 올려준 게 나잖아요.”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심민우가 깜짝 놀라고 김창이 호오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뭔가 뒷거래가 있던 모양이지.
“지난번 마탑주 선거 때 돈 풀어서 민심 잡았던 것도 나고, 성가신 경쟁 상대 묻어버린 것도 나요. 그러니 아저씨가 얼마나 고생해서 그 자리에 올랐는지 내가 모를 턱이 있나? 알지, 잘 알지. 나도 알고 아저씨도 알아.”
로에라가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한석구가 싸늘하게 말했다.
“근데 그걸 알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원탁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위신이고 체면이고 그런 게 댁 목숨보다 중요해? 플레이어 건드리면 내가 찾아올 걸 뻔히 알면서 그딴 짓을 해?”
“난 민우 저 친구를 잡아 오더라도 상처 하나 없이 그냥 풀어줄 생각이었어! 정말이네!”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애초에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말았어야지. 댁은 그랬어야 해. 그쪽의 위신이랑 체면만 중요하나? 원탁을 이끄는 내 위신과 체면은? 내 돈이랑 도움은 처먹을 대로 받아 처먹고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해? 아저씨, 댁이 마탑주 자리에 어떻게 올랐는지 확 퍼트려? 그래도 되나?”
“아니야, 오해일세! 제발, 제발 그러지 말아주게······. 내 부탁함세.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 제발······.”
존경하던 위대한 마법사가 한석구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민우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원탁의 힘은 어디까지 뻗어있는 건가? 이 정도면 조폭이 아니라 마피아쯤 되는 거 아닌가······.
“당연히 그래야지. 아저씬 그래야 해.”
“그, 그러면 내가 부탁 들어주면 나 살려줄 텐가?”
“내 마음 같아선 김창 이 친구 시켜서 머리통 좀 주물러 주라고 하고 싶지만······. 근데 그러면 아저씨 죽을 게 분명한데 옛정 생각해서 그럴 수는 없지. 또 말 잘 듣는 사람 뽑기도 귀찮고.”
난 또 왜? 김창이 불만스럽게 쳐다봤지만 한석구가 무시헀다.
“그러면 우리 일 이야기합시다.”
“···뭐든 말해보게.”
“마탑에서 원래 매달 초마다 원탁에 마법 스크롤이며 마법 물품 납품하죠?”
“그렇지. 원탁의 주문을 우선순위로 해서 정가보다 훨씬 싸게 납품하고 있지 않나······.”
한석구가 굳이 마탑주 선거에 개입했던 건 마법 아이템을 싸고 안정적으로 구입할 경로가 필요했기 때문인 듯했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마법 스크롤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것도 마탑에서 만든 거였나. 김창이 혼자 생각하는 사이에 한석구가 말했다.
“그거 가격 좀 깎읍시다. 지은 죄가 있으니 못하겠다고는 안 하시겠지?”
“그러지. 그런데 얼마나······.”
한석구가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와 왼쪽 손가락 두 개를 폈다. 그걸 본 로에라의 안색이 조금이지만 밝아졌다.
“칠 퍼센트? 그 정도라면 충분히 깎아줄 수 있······.”
“아니, 이거 칠이 아니라 이십오인데.”
“···뭐?”
“이십오 퍼센트 깎자고요. 원래 삼십 퍼센트 깎자고 하려다가 참은 거니까 고맙게 생각하시고.”
날강도인가? 시발, 갑자기 이십오 퍼센트나 가격을 깎아서 납품하면 마탑은 뭘 먹고 사나? 다른 거래 상대도 있으니 당장 망하진 않겠지만 이건 좀······.
“왜, 불만 있어요? 그러면 말해. 들어는 드릴게.”
한석구는 정말 불만을 들어줄 것이다. 정말로 들어는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로에라가 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납품 기한에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