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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고개를 숙이는 로에라를 보면서 한석구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가 로에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내가 굳이 다른 사람 말고 아저씨 밀어줬던 이유가 있다니까? 사람이 아주 똑똑해.”
한석구가 칭찬하지만 로에라는 전혀 기쁘지 않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마탑주 자리를 지켰다는 것과 어쨌거나 한석구라는 강력한 지지자와의 끈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뜯어가기만 했네. 물론 아저씨가 잘못해서 그런 거지만 어쨌거나 댁 체면도 내가 살려주긴 해야지. 대신이라긴 뭐 하지만 혹시나 일 맡길 거 있으면 우리한테 연락해요. 마탑의 의뢰를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격도 좀 할인해서 맡아줄 테니까.”
“···고맙네.”
“자, 그러면 이제 나갑시다. 아저씨? 표정 풀고 어깨 펴요. 그 얼굴로 바깥에 나가면 마법사들이 뭔 생각을 하겠어? 근엄한 척하고 나가야 이 안에서 뭔가 치열한 머리싸움이 오갔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그 와중에 마탑주의 체면까지 생각해주는 게 우습다. 로에라는 시키는 대로 원래의 근엄한 얼굴을 연기했다.
한석구와 로에라, 두 사람이 먼저 걸어가고 김창과 심민우가 그 뒤를 따라서 마법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홀로 돌아갔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시에 한곳으로 모였다.
로에라는 흘끔 마법사들을 봤다가 한석구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의 만남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소. 이런 일로 만나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기에 마탑과 원탁, 두 집단의 결속은 더욱 끈끈해질 것이라 믿소.”
“분명 그럴 겁니다. 저도 다음에는 우리가 마탑과 원탁의 수장이 아니라 한 명의 마법사로서 만날 수 있길 바라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 마법사들이 감탄을 흘렸다. 저 무시무시한 마법사를 얌전하게 만들다니 역시 마탑주는 다르다, 과연 마탑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시다.
수군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는 가운데 한석구는 로에라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홀로 내려왔다.
다급히 따라온 심민우가 물었다.
“돌아가나요? 차원문 열까요?”
“그래.”
“바로 열겠습니다!”
심민우로서는 이 웃기지도 않은 연기를 그만둘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기뻤다. 자신이 몇 년 동안 몸 담았던 마탑을 이젠 다시 올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차원문이 열렸다. 한석구가 말했다.
“그럼 안녕히.”
인사는 그걸로 끝이었고 폭풍처럼 찾아온 세 명의 플레이어는 차원문을 통해 원탁으로 돌아갔다.
마법사들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차원문이 닫히자 그제야 한숨을 내뱉었다.
김창은 뒤쪽에서 욕설 비슷한 게 날아온 걸 들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나한테 한 욕도 아니니 신경 쓸 것도 없다.
“후우······. 다들 고생했다. 민우야, 너도 고생했어.”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온 뒤, 한석구가 히죽 웃었다. 심민우는 그 웃음을 보며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고생은 무슨······.”
“그 집행관인가 하는 놈들한테 쫓기면서 제법 고생했을 거 아니야? 그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도망치느라 힘들었지? 오늘은 푹 쉬어라. 그리고 인마, 뭔가 일이 생겼으면 형한테 먼저 이야기해야지. 내가 왜 원탁을 만들었겠냐? 우리끼리 서로 돕고 살자고 그런 건데······.”
한석구가 플레이어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그를 독재자라고 욕하는 사람도 그것까지 욕하진 못한다.
“어, 그러면 전 일단 돌아가서 씻고 쉴게요. 요새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그래, 너 몸에서 냄새나긴 한다. 가서 씻고 쉬어. 아, 너 방 구한 거 없지? 그러면 그냥 원탁에 손님용 방 많으니까 거기서 쉬어라.”
“감사합니다.”
심민우가 터덜터덜 걸어 나가자 한석구가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새끼가 갑자기 너랑 나타나서 악마가 어쩌고 할 때는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잘된 일이야.”
“뭐가?”
“뭐긴? 쟤가 마탑 가서 깽판 부릴 명분을 만들어줬잖아. 마탑 그 새끼들이 우리한테 물건 납품하면서 돈 얼마나 버는 줄 아니? 존나 많이 벌어.”
“그렇다고 그 정도나 값을 확 깎으면 저쪽도 큰 타격 아닌가? 원탁에 납품하는 양이 꽤 되는 것 같던데.”
“거래량이 많긴 하지. 하지만 걔네 원래 남겨 먹는 게 많아서 괜찮아. 이젠 거의 남기는 것도 없이 팔아야 하긴 하겠지만 애초에 모든 사람한테 다 그 가격으로 파는 것도 아니니까 정말 손해는 아니지.”
어쩌면 로에라가 손해를 메꾸려고 마법 아이템의 가격을 인상할지도 모르겠다. 원탁이야 상관없겠지만 그러면 괜한 사람들만 피해를 보겠군.
“너도 수고했다. 지금까지 민우 따라다니면서 일 저지른 거 수습도 해주고 말이야.”
“돈 받고 한 일이야.”
“뭐 그렇겠지. 네가 돈 안 되는 일을 할 것 같진 않으니까.”
생각해보니 아직 돈을 못 받았는데. 김창이 턱을 긁적거리고 있을 때 한석구가 말했다.
“네 성격 아니까 여기서 영영 머무르라곤 못 하겠다. 그냥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얼굴이나 비추고 가. 설마 네가 길가에서 객사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생존 신고는 하고 다니라고.”
김창은 대충 대답했다.
“뭐 그러지.”
“그래서 이젠 어디로 갈 거냐? 듣자 하니 저번엔 북부에서 활동했다고 하던데. 거기 뭐 일거리가 있나? 북부인은 원래 남 손 빌려서 사람 죽이기 보다는 자기가 직접 하는 편이잖아.”
“사람 죽여달라는 의뢰는 잘 없고 대신 괴물 죽여달라는 의뢰는 많았지. 거긴 워낙 험한 곳이라 괴물이 많으니까.”
“하긴 그렇겠네. 이런 걸 보면 네가 참 부러워. 어떻게 보면 넌 돈도 벌면서 여행도 하는 셈인데 난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야. 대륙 남부에 가봤어? 거긴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데 귀족은 물론이고 왕족도 온다고 하더라.”
“누가 귀족이나 왕족을 죽여달라고 하면 갈 일도 있겠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왕족은 죽이지 마라? 그건 원탁으로도 뒷수습이 안 돼. 아직은 말이야.”
아직은? 그러면 뭐 나중엔 감당된다는 건가? 김창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만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손님용 방 남는 거 있지?”
“그래, 고생했다. 가서 쉬어. 음? 아니, 잠깐만. 뭐라고?”
“가서 쉬겠다고.”
“아니, 그거 말고.”
“손님용 방 남는 거 있냐고.”
한석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여기서 쉬려고? 일 끝나면 늘 도망가듯 떠나던 놈이?”
“아직 심민우한테 받아야 할 돈이 있어. 그래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허어, 이거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방이라면 물론 있지. 며칠을 머무르든 상관없으니까 편히 쉬어.”
“하루만 쉬고 갈 거야.”
김창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원탁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첫 번째 이유는 심민우가 의뢰 보수를 너무 늦게 줬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여기서 일거리가 제법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 넘게 원탁에서 머무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많아졌다.
왜 그런가 했더니 한석구가 은근히 자신에 대한 걸 여기저기 소개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무리에서 겉도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괜히 김창을 챙겨주려는 모양이었다.
“이 친구 이름은 김창이야! 이름 특이하지? 이 친구는 칼을 아주 잘 쓰거든? 그러니까 전사 캐릭터인 놈들은 이 친구한테 칼질 좀 배워!”
나중엔 아주 김창을 데리고 인사를 시키러 다니려고 하기에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무슨 유치원 처음 들어온 애새끼냐? 선생님이 손 붙잡고 다니면서 친구들한테 하나씩 인사시켜야 해?
김창은 이제 슬슬 원탁을 떠나야 함을 느꼈다. 여기 더 있다가는 한석구가 가지 말라고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김 선생님!”
저번 마탑 사건 이후로 원탁에서 머물고 있는 심민우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선생님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씹. 또 한석구가 뭔 짓거리를 했나? 저번에는 칼라드 영주 내외한테 인사시키려고 하더니 이젠 뭐 다른 귀족이라도 데려온 건가?
원래 같았으면 엿이나 먹으라고 했겠지만 여긴 원탁이고 한석구의 체면을 봐줘야 할 필요가 있다.
김창은 나직하게 욕을 내뱉으며 심민우의 뒤를 따랐다.
“또 뭔 일이냐? 다른 도시에서 귀족이 찾아오기라도 했나?”
“그런 거라면 다행이죠···. 뭐 그거 비슷한 거긴 한데······.”
“귀족이면 귀족이지 그거 비슷한 건 또 뭐야?”
설마 왕족이 찾아왔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김창이 흠 소리를 내고 있자 심민우가 물었다.
“김 선생님, 혹시 북부에서 뭔 짓 하셨나요?”
“북부에서? 내가 거기서 한 거라고는 그냥 의뢰 몇 개 받은 게 전부인데.”
거기까지 말하고 문득 귀족의 가신들을 때려눕혔던 게 생각났다. 그러면 북부의 귀족들이 항의하려고 원탁까지 찾아온 건가?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거 말고는요?”
“서리군주를 죽이긴 했지.”
“그게 전부인가요?”
“그거 말고 특별히 한 건······.”
김창은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거기서 뭘 죽이긴 했는데.
“아, 웬 요정 놈도 죽였던 것 같아.”
“요정 놈?”
“아니다, 요정 놈을 죽인 게 아니라 요정 놈들을 죽였어.”
“요정 놈들? 아이고, 이런······.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왜? 뭔 일인데?”
심민우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원탁에 요정들이 찾아왔어요. 그것도 그냥 요정이 아니라 어떤 대가문의 요정이라고 하던데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김 선생님을 찾고 있어요.”
김창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했다. 요정 용병 하나를 죽였을 때도 그 난리를 쳤으니 요정 부대를 몰살한 이번에는 화가 아주 단단히 났을 것이다.
하지만 요정 대가문은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나? 혼자서 요정 부대를 몰살하고 기수인가 뭔가 하는 베르고니아까지 반죽음을 만들어서 보냈는데 기어코 복수하겠다는 건가?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플레이어들이 우글거리는 원탁까지 찾아와서? 김창이 보기에 원탁 전부가 나서면 요정 대가문 따위를 없애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석구는? 걔가 이번 일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자식은 누가 플레이어 건드리는 거 아주 싫어하잖아.”
“의장님은 지금 잠깐 자리 비우셨어요.”
“그럼 지금 누가 요정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석구 말고 걔네랑 대화할 만한 놈이 있나? 혹시 정복자가 하고 있나?”
“아니요, 그분도 지금 일 때문에 나가셨어요.”
그러면 대체 누가 요정들을 맞이하고 있다는 건가? 김창이 그러하듯 랭커들은 대개 원탁 운영에 관심이 없어서 바깥으로 나돈다.
그래서 지금 원탁 안에서 요정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는 한석구랑 정복자 외에는 없는 셈이다.
“가서 보시면 알아요. 다 왔습니다.”
이제 모퉁이를 돌면 곧장 거대한 홀이 나온다. 원탁의 위엄을 보여주겠다고 쓸데없이 크게 지은 공간이다.
김창은 모퉁이를 돌고서 제일 먼저 한 무리의 요정을 보았다. 요정 말고는 없는 걸 보면 일부러 사람들을 다 물린 모양이다.
그러면 저들의 말상대는 지금 누가 하고 있나? 여길 보고 저길 봐도 온통 요정뿐인데······.
“안녕! 나도 같은 요정인데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아니다. 전부 요정이긴 한데 모두 같은 요정은 아니다. 딱 한 명, 뭔가 이상하게 싸구려 느낌이 나는 요정 하나가 있다.
“쟨 또 왜 저기 있어?”
“아, 그게 아무래도 같은 요정이 나서면 이야기가 좀 잘 풀리지 않을까 해서······.”
산자이, 작업장 돌리다가 끌려온 놈. 쟤도 요정이긴 한데 돈 처발라서 만든 짝퉁도 요정이라고 볼 수 있나?
생긴 건 똑같아도 행동이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