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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같은 요정이라도 굳이 왜 저 녀석을······.”
원래 외국의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는 일부러 같은 나라 사람을 쓰기도 한다. 문화적 동질감, 그리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하니까.
그런 점에서 산자이를 요정의 상대역으로 내보낸 건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문제는 저 중국산 요정 놈이 과연 그런 역할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고.
“쟤가 말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인데.”
그 말에 심민우가 김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댁은 수틀리면 칼부터 뽑고 보는 사람이면서 뭘 그런 말을 하나, 하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다.
“뭘 봐.”
“아, 아닙니다. 산자이 씨를 걱정하는 건 이해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은 산자이 씨 말고는 대안이 없었거든요.”
“왜?”
심민우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에 말했다.
“원탁에선 원래 강할수록 대우를 받는 거 알죠?”
법보다 주먹이 우선인 세상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놈이라도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는 깍듯이 대우하는 게 원탁의 생리라는 걸 김창도 알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약하면 아무런 대우를 받지 못한다. 저번에 산자이의 부하들이 김창의 겉모습만 보고 시비를 걸었던 것처럼.
“그런데?”
“그러면 강한 순서대로 서열을 따지는 셈인데, 다른 랭커들은 원탁 운영에 관심이 없으니 자리에 없고 의장님과 정복자 님도 자리에 없으니 바로 다음 서열이 산자이 씨라는 소리지요.”
김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말이 맞다고 여겼다. 한석구가 없고 정복자도 없으면 그다음으로 강한 건 산자이다.
말이야 맞는 소리긴 한데 그런 논리라면 애초에 나를 제일 먼저 찾아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김창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 사람인 것 같군요.”
요정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였다. 여자였는데 늘씬한 몸에 잘 단련된 근육을 가졌다. 저번에 봤던 요정 기수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이었다.
“아, 김창! 손님 왔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산자이를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김창이 한숨과 함께 요정 쪽으로 다가갔다.
“날 찾으셨다고.”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부터 묻죠. 김창인가요?”
저번의 요정 기수는 굉장히 오만한 말투를 썼는데 이 요정은 달랐다. 하기야 이런 성격이니까 산자이가 까불어도 참고 있었겠지.
“내가 김창인 건 맞는데 무슨 용무로 날 찾으셨나? 뭔가 의뢰하러 온 것 같진 않고.”
“나는 딜루키둠의 티샬레입니다. 또한 가문의 기수이기도 하고요. 우리 가문의 이름에 대해선 익히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정 기수가 여러 명인 모양이지?”
“아니요, 기수는 언제나 한 명뿐입니다.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만이 그 영광을 차지할 수 있지요. 저는 이번에 새롭게 기수가 됐습니다.”
기수는 한 명뿐이라는 말은 베르고니아가 더는 기수가 아니게 됐다는 소리다. 김창이 물었다.
“그 베르고니아인가 하는 요정은 은퇴한 모양이지? 하기야 많이 다쳤을 테니까.”
“베르고니아 님은 죽었습니다.”
김창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그 뭐냐, 안타까운 일이군.”
아니, 네가 죽였잖아. 심민우가 그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래서 새롭게 기수가 된 기념으로 나한테 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비슷하죠.”
비슷해? 그냥 빈정거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러면 저쪽도 빈정거리는 건가? 김창이 가만히 있자 티샬레가 이어서 말했다.
“딜루키둠과 당신 사이의 악연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배신자 요정 아샤리온의 죽음에 관한 일 말입니다. 물론 당신에게 억울한 부분도 있다는 건 압니다. 전장에서 상대가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일일이 확인하면서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뭐지? 이 요정은 왜 상식적인 말을 하는 거지? 귀쟁이는 원래 다 오만하고 건방진 족속이 아니었나?
김창이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 때, 티샬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정 가문의 관습은 오래된 것이라 요즘의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죠. 저 역시 젊은 축에 속하는지라 때로는 그러한 관습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김창이 무심결에 물었다.
“혹시 몇 살이지?”
“이백육십 살 정도 됐겠군요. 기수의 역할을 맡기엔 너무 어린 나이지요.”
나보다 열 배는 더 살았는데. 하여튼 요정의 시간 개념은 특이해서 인간이 이해하긴 어렵다.
“가문의 관습은 오래된 것이지만 또한 지켜져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기수이기 전에 딜루키둠의 요정.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구절절 떠드는 것보다 차라리 칼부림 한번 시원하게 하는 게 낫다.
그가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릴 때, 티샬레가 말했다.
“하지만 그 관습조차 세상의 위기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티샬레가 빙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지옥의 대악마가 그 하수인들을 부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북부에서 서리군주라 자칭하던 사악한 사령술사를 죽인 적이 있으니 잘 알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영웅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으신가요?”
아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세상에 돈 받고 사람 죽이고 다니는 영웅도 있나? 그런 게 영웅이라면 그 세상의 악당은 대체 어떤 놈이란 말인가?
김창은 어이가 없다 못해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샬레는 멋대로 지껄였다.
“당황스러운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듣는다면 누구나 그럴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힘으로 이 세상의 악을 몰아낼 수 있다면 그건 참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안 생각하는데. 김창이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지? 난 그냥 칼잡이야. 돈 주면 뭐든 죽여주는.”
“긴 역사를 보면 거대한 악에는 언제나 대적자가 있었습니다. 딜루키둠은 이번 시대의 대적자가 당신이라고 여겨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그저 돈 받고 누군가를 죽여주는 칼잡이라 여기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왜 겸손이냐, 사실을 말한 건데. 애초에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놈이 대체 뭔 영웅이냐.”
“당신은 북부에서 서리군주를 죽였지요. 그것도 대가를 받고 한 일이겠지만 천금을 주겠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영웅이라고 해서 딱히 대가를 받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지요.”
김창은 티샬레와 대화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여자 요정은 정중하긴 해도 말이 안 통한다는 점에서 다른 요정들과 똑같다는 걸.
본인이 아니라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기가 찰 노릇이다. 김창은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헛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짧게 말해주지. 나는 영웅 같은 게 아니고 영웅 놀이를 할 생각도 없다. 너희가 갑자기 뭔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내 칼이 필요하다면 가서 돈 가져와.”
“딜루키둠과 당신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는 건 어떤가요? 이 세상은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거 더럽게 말 못 알아듣네. 김창이 씹어뱉듯 말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내 칼이 필요하면 돈 가져오라고. 돈이 없나?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지.”
“···그게 뭔가요?”
“칼 뽑아. 입으로만 떠들어 대지 말고 칼로 날 꺾어서 엎드려 빌게 해.”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무례하다 못해 도발적인 발언에 요정 하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열등종 놈이 감히! 오냐, 한 번 붙는 게 소원이라면 이 내가 상대해주마!”
힘 제법 쓸 것 같은 남자 요정 하나가 자기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김창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칼이 있는데 대화는 뭔 대화야. 덤벼, 썰어줄 테니까.”
“그게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듯한 상황에서 티샬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호르가! 어딜 감히 끼어드느냐! 당장 자리로 돌아가! 그리고 열등종이 아니라 단명종이야!”
“하지만 기수님! 열등종 따위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아야 합니까? 세상의 악을 몰아내는 건 저런 열등종 따위가 없어도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씹새, 그러면 자기들끼리 하지 왜 나한테 난리야.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당장 자리로 돌아가라. 이건 경고야. 너는 감히 기수인 내 말을 무시할 셈이냐?”
“기수님, 저는 당신의 권위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무례한 짓을 저질러야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당신의 권위를 무시하겠습니다.”
“호르가···!”
기어코 호르가가 칼을 뽑았다. 그걸 보고서 김창도 칼자루를 꽉 쥐는데 누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잠깐!”
웬 놈인가 하고 봤더니 산자이였다. 그녀가 뭔가 띠거운 얼굴로 말했다.
“어딜 감히 따까리가 우리 대빵한테 함부로 덤벼요?”
“뭐, 뭐···?”
“뭘 따까리가 대빵한테 바로 덤비냐구. 싸움이란 건 서로 격이 맞아야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덤벼요. 내가 상대해줄 테니까.”
세상에 이렇게 싼티 나는 요정도 있나? 호르가가 멍하니 산자이를 쳐다보는 가운데, 김창이 물었다.
“내가 왜 대장이야.”
“그거야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하니까 그렇지? 원탁에선 강한 놈 말이 법인 거 알지?”
“그러면 내 말이 법이니까 헛짓거리하지 말고 꺼져.”
“근데 나도 좀 세서 네 말 안 들어도 돼!”
미친년인가? 자기 맘대로 할 거면서 그딴 말은 왜 하는데? 김창이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산자이가 깡총 뛰어서 호르가의 앞으로 갔다.
“내가 상대라서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오히려 더 약한 상대가 나왔으니 좋은 거 아냐?”
호르가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널 쓰러트리고 저 건방진 열등종도 쓰러트리면 되니까.”
“우와, 자신감이 넘치시네. 그러면··· 한 번 붙어보죠.”
호르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산자이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자 김창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너는 직업이 뭐냐?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나? 격투가.”
이름 그대로 맨손으로 적과 싸우는 직업이다. 저 작은 체구의 요정이 주먹과 발만으로 괴물을 때려죽이는 모습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덤벼요. 선수를 양보해드릴까?”
호르가는 그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얼굴이 붉어진 그가 뽑았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말했다.
“그쪽이 맨손으로 싸운다면 이쪽도 맞춰주지.”
“안 그래도 되는데. 칼 뽑아요.”
“정정당당한 대결을 하려는 것뿐이다.”
“후회할 텐데.”
깐죽거리던 산자이가 곧 얼굴을 굳히며 주먹을 쥐었다. 호르가 역시 주먹을 쥐고서 격투 자세를 잡았다.
두 사람의 침묵은 짧았다. 어느 쪽이든 먼저 움직인다면 그대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모두가 긴장한 채로 두 요정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이런 씹! 이게 대체 뭔 개짓거리야!”
누군가 고함을 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