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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한석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저 눈깔이 뭐라고?
“돈 많나? 난 좀 비싼 몸인데.”
아니, 이 새낀 또 뭐라는 거야? 한석구는 크게 뜬 눈을 그대로 돌려 김창을 쳐다봤다. 그건 거의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야, 인마! 돈 많냐고는 왜 물어봐? 너 정말 저 새끼의 의뢰를 받을 거야?”
“왜, 그러면 안 되나? 내가 언제부터 일 가려 받았다고?”
“미친놈······. 저 새끼가 돈 줄 테니까 사람들 학살하고 영혼 모아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할 거야?”
한석구가 성난 듯 외치자 김창이 작게 웃었다.
“글쎄, 대악마라는 놈이 겨우 그딴 부탁 하려고 날 찾아온 건 아닐 것 같은데.”
“그걸 뭔 수로 확신해?”
“영혼 모아오는 거야 자기 부하들한테 시켜도 충분할 테니까. 내가 너처럼 마법사면 한 번에 수백 명씩 죽일 수 있을 테니 효율이 나겠지만 칼잡이는 한 명 한 명 죽여야 하니 나한테 시켜봐야 오히려 시간만 더 걸리지.”
그건 또 그럴듯한 말이라서 한석구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말이 그럴듯하다고 납득한 건 아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어 한마디 하려고 할 때 황금색 눈이 반짝였다.
“저 칼잡이의 말이 맞다. 겨우 영혼 수확 따위를 도와달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 거물이야. 그리고 거물에게는 큰일을 맡겨야 하는 법이지.”
“그게 뭐지?”
“야, 뭘 진지하게 들어? 저 새끼 악마인 거 몰라? 보나 마나 뭔 이상한 소리로 널 현혹시키려고······.”
김창은 한석구가 떠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악마의 눈에 고정됐다.
“아까 이야기를 들었으면 알겠지만 나는 지옥의 지배자다. 정확히는 일부뿐이지만. 지옥에는 이 만네르헤임 외에도 세 명의 대악마가 더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배신과 암투 속에서 지옥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지. 그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일이라 난 이제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아.”
대악마라는 놈들은 영겁의 시간을 살아왔을 테고 그 긴 시간 동안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면 거기에 긴장감 따위는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너무 오랜 반복은 긴장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법이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강하지만 다른 대악마 셋을 한꺼번에 상대할 능력은 없다. 다른 대악마와 힘을 합쳐 경쟁자를 줄이는 것도 어렵지.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믿지 못하거든.”
“용건만 짧게 말하지 그러냐.”
“아, 성질 급한 놈이로군. 그러면 내 그러지. 간단하게 말하마. 내가 돈을 줄 테니 대악마를 죽여라. 나 말고 다른 놈들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한석구와 심민우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뭔? 대악마가 대악마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다니?
그 얼굴을 보고서 악마의 눈이 몸을 가볍게 떨며 웃음소리를 냈다.
“왜, 어처구니없는 부탁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그, 내가 악마에 대해선 잘 모르긴 하지만 원래 그런 부탁을 해?”
“대악마가 대악마를 죽여달라는 게 뭐가 이상하지? 내가 알기로 너희 인간들은 저 칼잡이에게 같은 인간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지 않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모든 인간이 친구가 아닌 것처럼 대악마들끼리도 서로 꼭 친해야 하는 법은 없다.
그러니 수틀리면 칼 들고 가서 찔러버려도 이상할 건 없는 일인데······. 그런데 그걸 왜 직접 하지 않고 칼잡이한테?
“왜 그런 부탁을 하느냐고? 오히려 내가 묻지. 왜 굳이 직접 하지? 돈만 주면 인간이고 악마고 죽여주는 칼잡이가 있는데?”
“···악마는 뭐 자존심도 없나? 대악마쯤 되는 놈이 인간한테 그런 부탁을 해?”
“내가 오래 살아보니 자존심이 일을 해결해주진 않더군. 마법사야, 너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산 연장자로서 해주는 충고니 감사히 새겨들어라.”
한석구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똑똑한 놈이군. 남을 시켜서 성가신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다면 황금을 아무리 뿌려도 이득일 테니까.”
김창이 나직이 말하자 악마의 눈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래, 나는 대악마고 그깟 황금 따위는 얼마를 뿌려도 상관없다. 그건 나한테 그저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하니까. 네가 다른 대악마를 죽여주기만 한다면 황금으로 성을 지어줄 수도 있지.”
그만큼은 없어도 되는데.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는 동안에 만네르헤임이 이어 말했다.
“또한 네가 이번 의뢰를 성공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나는 손해 볼 게 없다. 너는 대악마 못지 않게 성가신 놈이니 일찍 죽어주면 그것 또한 기쁜 일일 테니.”
과연 그 말대로다. 만네르헤임 입장에선 김창이 대악마를 죽이면 경쟁자가 사라지는 일이라 기쁠 것이요, 반대로 김창이 죽어버리면 자신을 죽일 만한 적이 사라지는 것이니 손해가 아니다.
그러니 이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만네르헤임은 무조건 이득을 보는 구조인 것이다. 과연 똑똑한 놈이었다.
“야, 그런 거면 더더욱 들어주면 안 되지! 결국 저 새끼 좋은 일만 하는 거잖아!”
한석구의 외침에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단 다른 대악마들 싹 죽이고 돈 받은 다음에 쟤도 죽이면 되잖아.”
“···너는 머릿속에 뭐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니?”
“어쨌거나 우리의 목적은 대악마를 죽이는 것 아닌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돈 받고 하면 좋지 뭘. 결국 쟤까지 죽이고 나면 목적은 달성한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요정 대가문의 부탁을 들어줄걸. 김창의 말대로 누구의 부탁을 받고 하든 결과는 똑같을 테지만 기분의 문제라는 게 있지 않나.
한석구가 불만스럽게 끙 소리를 냈다. 대화를 듣던 만네르헤임이 껄껄 웃었다.
“재밌는 놈이로군. 하기야 모레이를 그토록 쉽게 썰어버렸을 정도니 자신감이 넘칠 만도 하지. 궁금하진 않겠지만 모레이는 여덟 기수에 필적할 만한 강함을 가지고 있는 놈이다.”
진짜 안 궁금한 걸 가르쳐주는군. 김창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일 이야기나 하지. 누구를 죽여주면 되고 보수는 얼마나 줄 거냐.”
“죽이는 건 당연히 대악마다. 하나만 죽여도 되고 셋 다 죽여도 돼. 그거야 내키는 대로 해라. 그리고 보수라면 부르는 대로 주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한테 황금은 그냥 반짝이는 돌덩어리일 뿐이니 말이다.”
“알겠다. 그런데 그 대악마라는 놈들은 지옥에 있는 걸로 아는데 우리가 직접 불러내서 죽여야 하나? 내가 보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던데.”
원탁에는 실력 있는 마법사인 심민우가 있지만 그도 여덟 기수 중 하나를 불러내는 게 고작이었다.
대악마 정도 되는 존재를 불러내려면 대규모의 의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걸 준비하면 누구든 대번에 눈치를 채고 말 것이다.
당연히 악마라면 치를 떠는 요정 왕국도 알게 될 텐데 그러면 그들이 대체 뭔 반응을 보일까?
대악마를 죽이려고 대악마를 불러내는 중이라고 하면 이해해줄까? 그럴 리 없다. 그냥 원탁이 악마숭배의 소굴이 됐다고 생각하겠지.
“세상에는 두 종류의 멍청이가 있다는 걸 아나? 하나는 악마를 섬기는 놈이고 다른 하나는 용을 섬기는 놈인데, 둘 중 누가 더 멍청한지 우열을 가릴 수 없지. 그 멍청한 놈들은 정말 악마나 용이 제 인생을 책임져 줄 거라고 여겨. 그럴 리가 있나. 그런 놈들은 결말은 언제나 영혼을 빨리는 것으로 끝난다.”
악마가 직접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신랄하게 느껴진다. 뭐가 우스운지 산자이가 혼자 큭큭 웃고 있을 때 만네르헤임이 이어서 말했다.
“어쨌건 그 고마우면서도 멍청한 놈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악마를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것이다. 매장결사를 알고 있나? 그들은 대악마 중 하나를 섬기는데, 제 주인을 이 땅에 불러내려 하고 있지.”
매장결사? 김창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심민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매장결사라면 흑마법과 사령술을 다루는 자들이 모인 집단이잖아요! 마법의 신비를 더럽히는 자들이라며 마탑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던데, 그들이 대악마를 불러내려 한다고요?”
“너, 작은 마법사야. 잘 알고 있군. 그래, 그들은 으슥한 어둠 속에 숨어서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조만간 그들이 대악마 하나를 소환할 것이니 기다렸다가 죽여라.”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대악마를 불러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일 텐데 그걸 할 수 있다는 걸 보면 매장결사라는 놈들이 제법 실력이 있다는 소리일 터다.
그래봤자 칼 찌르면 죽는 건 똑같을 테니 별로 문제 될 건 없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를 말해. 가서 죽일 테니까.”
“대륙 서부에 호엔이라는 도시가 있다. 거기서 매장결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이 대악마를 불러내면 제 주인과 함께 모두 죽여라.”
한석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정보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고 네가 다른 대악마와 함께 수작질을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 아냐?”
악마의 눈이 고개라도 끄덕이는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뭔 상관이냐?”
“···그게 왜 상관이 없어? 그게 맞다면 우릴 속인 거잖아?”
“너희의 목적은 애초에 대악마를 죽이는 게 아니었나? 함정이든 아니든 호엔에 있는 악마숭배자를 무찌르면 결국 대악마의 세력에 타격을 주는 셈이지. 결국 결과는 똑같다는 소리다. 다른 게 있다면 돈을 못 받는 거겠지만.”
“···허.”
“그리고 내가 너희를 굳이 속여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봤을 땐 대악마보다 너희가 더 위험한 놈들이야.”
김창이 말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군. 보수는 선금으로 받을 건데 상관없나?”
“아, 그거라면 상관없다. 나를 섬기는 자들에게 말을 전해 이쪽으로 황금을 가져오게 하지.”
한석구는 악마숭배자들이 마차를 타고 원탁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거 맞나?
“그런데 매장결사라는 놈들은 자기 주인 불러내려고 애쓰고 있는데 네 숭배자들은 어디서 뭐 하는 거냐?”
“열심히 영혼을 모으고 있겠지. 그리고 뭐 하러 지금 벌써 지상에 올라오나? 일찍 나와봤자 너한테 썰릴 위험만 커지는데. 칼잡이야, 나는 다른 놈들처럼 멍청하지 않다.”
확실히 말하는 걸 보니 똑똑하긴 했다. 김창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보자고.”
“참으로 유익한 만남이었다. 인간들이 왜 맨날 황금에 미쳐 사는지 알겠군. 돈만 있으면 귀찮은 일도 이토록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오늘은 참 큰 깨달음을 얻었군. 그러면··· 언젠가 또 보자고.”
만네르헤임이 껄껄 웃으며 눈알을 흔들었다. 그러자 황금색 눈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곧 재가 되어 사라졌다.
김창은 바닥에 떨어진 잿더미를 보고서 칼자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또 긴 여행이 될 듯했다.
“서부의 호엔이라고 했지? 이야, 이번에 좀 멀리 가야겠네?”
산자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붙이자 김창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한석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창아, 너 혼자 갈 건 아니지? 내가 네 실력 잘 알긴 하는데 이건 좀 위험한 일 같다. 복자라도 불러서 같이 갈래?”
“걔랑 같이 갈 바에는 그냥 안 간다. 나 혼자 가도 충분하니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혹시나 뭔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복자랑 같이 갈 테니까.”
한석구는 플레이어를 지키는 걸 제 의무쯤 되는 줄 아는 놈이라 상대가 누구든 과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김창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면 가볼까.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바로 출발하려고? 그러면 잠깐 기다려. 발 빠른 말이 있거든. 그걸 줄 테니까······.”
“말 없어도 돼.”
“그럼 뛰어가려고? 거기까지 말 타고 가도 한 달은 걸릴 텐데?”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뛰어 가? 사람은 지성이 있는 생물이야. 도구를 써야지. 심민우, 차원문 열어.”
졸지에 도구가 된 심민우가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