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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도구가 아니에요! 그건 직업 차별적인 발언이라고요!”
“나도 너보고 도구라고 한 적 없다.”
“했잖아요!”
김창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칼잡이한테는 칼이 도구지. 그러면 마법사한테는? 마법이 도구인 거 아닌가?”
제법 그럴듯한 말이라서 반박하기 어렵다. 심민우는 왠지 모를 기분 나쁨을 느끼며 끙 소리를 냈다.
“···그러면 차원문 열게요. 마침 제가 호엔에 가본 적이 있어서 곧장 갈 수 있겠네요.”
“마탑에서만 생활한 줄 알았는데 제법 여기저기 돌아다닌 모양이지.”
호엔은 대륙 서부에 있는 도시고 마탑에서 거기까진 제법 거리가 있다. 물론 마법을 쓴다면 금방 갈 수 있을 테지만 어쨌거나 처음 한 번은 직접 가봤을 터다. 그래야만 차원문을 열 수 있을 테니까.
심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탑은 단순히 지식을 탐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하고 있어요. 가령 작은 마을에 들려서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축복을 걸어주거나 물길을 쉽게 끌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따위를 하죠. 마탑에서는 그런 일을 하며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을 순례자라고 불러요. 전 순례자는 아니었지만 가진 능력이 능력인 만큼 그들의 이동을 도와주며 몇 달 정도로 따라다닌 적이 있습니다.”
본래 잘난 놈들은 제 능력만 믿고 뻗대는 게 보통인데 마탑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법사 중에서 진짜 잘난 놈들만 모인 곳일 텐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봉사 활동을 다니고 있을 줄이야.
김창은 물끄러미 한석구를 쳐다봤다. 그런 곳에 가서 마법사를 몇 명이나 날려버리고 사장 나오라고 소리쳤던 게 부끄럽지 않냐는 시선이었다.
“뭘 봐?”
한석구는 당당했다. 김창도 별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하긴 저 정도로 뻔뻔해야 원탁 수장도 하는 거지.
“저는 순례자들과 함께 호엔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긴 도시긴 하지만 여기 칼라드보다 작은 곳이에요. 훨씬 더 가난하고 별 대단한 산업이랄 것도 없죠. 영주도 영지민의 사정 보다는 자기 배 불리기에 급급한 놈이고요. 솔직히···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에요.”
“그러면 매장결사인가 하는 놈들이 숨어들기에 딱 좋은 곳이로군.”
“제 생각도 그래요. 하지만 정말 그들이 대악마를 불러내려 하고 있다면 영주에게 들키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요. 대악마를 불러내려면 거대한 제단을 만들어야 하고 수많은 제물을 바쳐야 할 테니까요. 호엔처럼 작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긴 어렵습니다.”
김창은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면 영주도 한 패인가 보지.”
“···영주가요? 아니, 대악마가 나오면 자기 영지부터 싹 날아갈 게 뻔한데 왜 그런 짓을 해요?”
“아까 만네르헤임이 한 말 못 들었냐. 악마숭배자는 악마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 주리라 생각한다고. 아마 영주는 대악마를 불러내면 영지를 대가로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실제로 남는 건 파멸뿐이더라도.”
심민우가 연신 허 소리를 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인 듯했다.
“······세상엔 정말 이상한 사람이 다 있군요.”
그런 말을 하는 자기도 악마를 불러낸 적이 있지 않나. 김창은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차원문을 열었어요. 여길 통과하면 곧장 호엔일 겁니다.”
김창은 어서 들어오라는 듯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는 차원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갔다 오라구! 괜히 어디서 칼 맞고 죽지 말고!”
산자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인 탓에 한석구에게 꿀밤을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혼자 보내는 건 걱정스러운데. 상대가 그냥 악마도 아니고 대악마라잖아. 게다가 우린 그 대악마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대악마는 게임으로 치면 던전의 보스 정도 되는 적이다. 그러니까 원래 같았으면 여러 명이 파티를 맺고 힘을 합쳐 쓰러트려야 하는 적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김창은 지금 혼자서 대악마를 죽이러 가고 있다. 게다가 대악마만 상대하면 되는 게 아니라 매장결사까지 상대해야 하니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되리란 건 뻔했다.
그러니 한석구가 하는 건 과한 걱정이 아닌 셈이었다. 김창도 그걸 알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대악마보다 더 강할걸. 그러니까 만네르헤임이 굳이 나한테 의뢰를 맡긴 게 아니겠냐.”
하기야 질 게 뻔한 싸움이라면 굳이 시키지 않는다. 한석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말린다고 안 갈 놈도 아니고······.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금방 돌아오지. 심민우, 차원문 닫지 말고 그냥 둬.”
“네? 이걸 그냥 두라고요?”
차원문은 여는데 많은 마력이 들긴 하지만 일단 열어두면 그때부턴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서 형체를 유지한다.
물론 영원히 그러는 건 아니고 마법사의 실력에 비례해서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진다.
심민우 정도의 실력자라면 무려 닷새는 차원문을 유지할 수 있다. 이건 원탁의 수장인 한석구조차 하지 못할 재주다.
“차원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올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요? 하긴 차원문을 열어두면 여차할 때 우리가 지원하러 갈 수 있으니 그냥 두는 게 좋겠네요.”
심민우의 말을 들은 한석구가 오호 소리를 냈다. 확실히 차원문이 열려 있으면 뜻밖의 상황에 대처하기 쉽다.
“그래, 그러니까 그냥 둬. 나는 이제 갈 건데, 혹시나 누가 차원문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주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문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차원문을 통과하는 건 그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단지 몇 발자국 움직였을 뿐인데 그의 몸은 어느새 호엔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마법사는 인기가 없을 수 없는 직업이다.
김창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그가 나왔던 차원문은 어느새 흐릿하게 변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 심민우가 일부러 모습을 숨긴 듯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어느 뒷골목인 듯했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인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가 차원문을 통과해 나타나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김창은 흠 소리를 내며 큰길 쪽으로 나갔다.
본래 대로변은 활기가 넘치는 법인데 호엔은 그렇지 않았다.
거리에는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모를 배설물이 드문드문 보였고 헐벗은 아이 몇몇이 구걸을 하고 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몸도 비쩍 마른 게 영양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심지어 하늘까지 우중충해서 도시 전체가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심민우의 말대로 확실히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매장결사 같은 놈들이 숨어들기 딱 좋은 곳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여행자이신가요? 혹시 여관을 찾고 있진 않으신가요?”
우중충한 도시라고 해도 모두가 우울한 건 아니었다. 제법 명랑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꾀죄죄한 꼴의 어린 소녀가 있었다.
아마 여관에 손님을 끌어오고 돈 몇 푼 받는 아이인 것 같은데 제발 와달라는 듯 눈빛이 초롱초롱해서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여관이 어디냐.”
“앗,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저희 여관은 정말 좋은 곳이에요!”
활달하게 지껄인 아이가 총총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김창은 그 뒤를 가만히 따랐다.
작은 도시라서 그런지 여관도 제법 외진 곳에 있는 모양인데 따라가다 보니 저들끼리 낄낄 대며 웃고 있는 한량 놈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 모두는 허리춤에 칼이나 몽둥이 따위를 차고 있었다. 그러면서 담배인지 뭔지 모를 것을 태우고 있었는데 냄새가 제법 독했다.
“여기가 여관이냐?”
아이가 안내한 곳은 어느 허름한 집이었다. 이건 여관이라기보다는 그냥 좀 큰 헛간 같은데.
아이는 김창의 물음에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겉은 이래도 안은 괜찮아요! 시장하시죠? 우리 여관은 술과 음식도 맛있어요! 자, 얼른 들어가요!”
아이가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김창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오던 아이가 문을 쾅 닫았다.
그 소리가 제법 불길했다. 굳이 걸쇠를 움직여 문을 잠그는 걸 보니 더 그랬다.
“야, 호구 데려왔다! 다들 일어나!”
명랑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그 소리에 어두운 집 안에서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으응? 뭐야, 또 손님이야? 아이고, 돈 좀 있어 보이는 놈으로 데려왔네?”
“내 몫은 1할인 거 알지? 떼먹으면 안 돼!”
“알았으니까 저리 꺼져 있어. 괜히 걸리적거리지 말고.”
누가 봐도 여긴 여관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여관 주인이 허리춤에 칼을 차고 손님을 상대하나.
김창은 또르르 달려서 남자들 뒤에 숨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늘 이런 식으로 멋모르는 여행자를 데려다가 벗겨 먹나?”
“헹, 멍청한 놈! 여기선 속는 놈이 잘못이야! 그러니까 나는 잘못 없어!”
누구 집 자식인지 몰라도 자식 교육 한번 잘 시켰군. 이 정도면 강도 영재 아닌가? 김창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형씨. 우리 몇 명인지 보이지? 댁이 칼 좀 쓴다고 이 숫자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 일단 여관인 줄 알고 왔을 테니까 가진 거 다 내주면 술이랑 음식 좀 내줄게. 그럼 그거 먹고 조용히 돌아가.”
김창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요새 서리군주니 요정이니 하는 놈들만 죽이고 다녔더니 이런 일은 오랜만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 세상은 수틀리면 칼부터 찌르고 보는 아주 개 같은 곳이고 힘 있는 놈이 약자의 걸 뺏는 게 당연한 권리쯤 되는 세상이다.
그 왜 지난번에는 사람 잡아다가 축제를 벌이는 미친놈들의 마을도 있지 않았나? 그런 걸 보면 여관으로 데려가는 척하고 여행자의 짐을 뺏는 강도가 나오더라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닌 셈이다.
“몇 명이냐. 하나, 둘, 셋··· 다섯? 삼 분이면 떡을 치겠군.”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뭘 쳐?”
“네 얼굴, 이 새끼야.”
쾅!
갑작스럽게 날아온 주먹이 남자의 얼굴에 꽂혔다. 그가 켁 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다른 네 명의 남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죽여!”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칼날을 고개를 약간 트는 것으로 피했다. 김창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더니 그대로 턱을 후려갈겼다.
억 소리가 나며 남자가 쓰러지자 다음 적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공격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김창은 손목을 붙잡고 비틀어 칼을 떨어트리게 만든 다음에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가슴팍을 세게 걷어찼다.
다음으로 두 명의 남자가 동시에 달려들자 나무 의자를 집어 들어 힘껏 후려쳤다. 먼저 달려들었던 남자의 얼굴이 으깨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 씹새!”
마지막 남자가 칼을 휘두르자 김창은 아직 들고 있던 나무 의자로 공격을 막았다. 아까 남자의 얼굴을 세게 후려친 탓인지 의자 다리가 뚝 하고 부러졌다.
남자가 그걸 기회라고 여겨 다시 달려들자 김창은 오른손에 든 의자 다리로 공격을 막고, 왼손에 든 의자 다리는 그대로 남자의 어깨에 꽂았다.
“으아악!”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곧 조용해졌다. 그 얼굴에 주먹이 박혀 이가 전부 부러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남았군.”
김창은 칼이 박힌 의자 다리를 휙 하고 바닥에 내던졌다. 쿵 소리가 나자 숨어 있던 아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 저기······ 설마 저 같은 아이를 죽이진 않으시겠죠?”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죽이진 않지.”
“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 이만······.”
“근데 난 기본적으로 말 안 듣는 애새낀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아이가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 꾀죄죄한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