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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47화 (4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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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이란 게 뭔 소리죠? 그럼 나중에는 죽인다는 소리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일단 지금은 아니야.”

무시무시한 소리를 무심하게 지껄이고 있으니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이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그냥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괜히 뭔 소리를 해봤자 김창이 들을 리도 없거니와 애초에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찬물 한 바가지 떠와.”

김창이 축 늘어진 여자의 몸을 의자 위에 대충 던지는 걸 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길러 바깥으로 나갔을 때는 이대로 도망칠까 하다가 멍청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요.”

시킨 대로 얌전히 물을 길어오자 김창이 그걸 받아서 냅다 여자의 얼굴에 뿌렸다. 분명 물을 뿌렸을 뿐인데 철썩 하고 채찍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소리가 났으니 당연히 물에 맞은 여자의 얼굴엔 적잖은 충격이 있었다. 뒤통수에 불룩 혹이 난 채로 기절했던 여자가 허억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여, 여긴?”

“안심해라. 납치된 거다. 일단 죽이진 않을 거야.”

대체 뭘 안심하라는 건가? 납치됐지만 죽이진 않을 거라는 부분에서 안심해야 하나? 여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김창을 쳐다봤다.

“뭘 야려.”

“···이 미치광이 놈. 내가 친절히 직접 충고까지 하러 갔는데 이런 짓을 벌여? 네가 이런다고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김창은 대답하는 대신에 여자의 발을 밟았다.

“끄악!”

“납치됐으면 얌전히 굴어.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그 외엔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다.”

“끄아악!”

이거 왜 이래? 김창이 비명만 지르고 있는 여자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다가 발을 너무 오래 밟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마, 이런 건 말을 해야지.”

“아깐 입 닥치고 있으라며!”

“그래, 그럼 지금도 말하면 안 되지.”

김창이 다시 여자의 발등을 지그시 밟았다. 또 한 번 끄아악 소리가 들리자 아이가 질렸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비명이 그치고 나서 김창이 말했다.

“이름.”

“···멜리사.”

고통은 인간을 고분고분하게 만든다. 그건 누구라도 똑같았다.

“그래, 매장결사의 멜리사. 너희의 목적은 이 땅에 대악마를 불러내는 것임이 틀림없나?”

저런 건 왜 묻는 거지? 멜리사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발등의 뼈가 부러진 건지 욱신거렸다.

“맞다. 그런데 그건 왜 묻······.”

짝!

멜리사의 얼굴이 강한 충격에 의해 휙 하고 돌아갔다. 찢어진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지고 새빨간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어찌나 강하게 뺨을 맞았는지 얼굴보다는 돌아간 고개가 더 얼얼할 지경이었다. 멜리사는 뻐근한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질문은 내가 한다. 그리고 나만 하는 거고.”

미친놈······. 멜리사는 자신이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중에 도망칠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얌전히 대답해야 할 듯했다.

“다음 질문이다. 내가 알기로 대악마를 불러내려면 대규모의 의식이 필요하던데, 혹시 영주의 도움을 받았나?”

“···그래. 호엔의 영주는 우리를 위해 의식을 치를 땅과 대악마께 바칠 제물을 준비해 주었다. 그 대가로 영생을 약속받았지.”

영생?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그거 말인가?

김창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대악마가 자기 불러냈다고 그런 걸 보상으로 주겠는가?

게다가 대악마가 신도 아니고 영생을 뭔 수로 보장해주나? 당장 대악마조차 칼 맞으면 죽는데.

“의식을 치르는 장소는 어디지?”

“···영주궁 아래에 숨겨진 장소가 있다.”

“대악마를 불러내기 위한 제물은 뭐냐? 설마 이 도시 사람들 전부의 목숨이냐?”

“제물로는 짐승의 고기와 피를 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대악마께서 지상에 강림한 이후 직접 거둬가실 것이다. 그분께서 이 땅에 현현하고 나면 그 어떤 생명도 남아나지 않겠지.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잡이야.”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대악마가 이 땅에 나타나게 두더라도 빨리 처치하기만 하면 큰 피해는 없을 거라는 소리였다.

“너희 조직은 총 몇 명이지? 전부 주문쟁이냐?”

멜리사가 스산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결사의 정보를 넘기리라 생각하나?”

이미 실컷 떠들었으면서 뭘 이제 와서 의리 있는 척이지? 김창은 손으로 멜리사의 부드러운 뺨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너 같은 놈의 특징이 뭔지 아나? 처음엔 입이 무거운 척하다가 몇 대 처맞으면 촉새가 돼. 내 말이 거짓말 같나? 그러면 한 번 확인해볼까.”

멜리사가 쫙 벌어진 김창의 손바닥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질문이 뭐였지?”

“너희 조직에 대해서 말하라고.”

“매장결사의 일원은 총 스물셋이다. 전부 주문쟁이냐고? 맞다. 우리는 더럽혀진 신비를 연구하고 오물 속을 뒤적이는 탐구자다.”

주문쟁이 스물셋. 칼 든 용병은 스물셋이 아니라 오십이 모여도 대단치 않지만 주문쟁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김창이 흠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의식은 언제 시작하냐.”

“···이번 주 안에. 정확한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든 시작할 수 있지.”

멜리사는 그 말을 일종의 위협처럼 내뱉었다. 언제든 대악마를 불러낼 수 있으니 네 노력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조롱하는 것처럼.

하지만 김창으로선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영주를 만나봐야겠군.”

“흐, 영주를 죽이기라도 하려고? 그래봤자 소용없다. 너는 산꼭대기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본 적이 있느냐? 그걸 감히 인간이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바위는 구르고 있다. 이젠 아무도 막을 수 없어.”

“그게 허세가 아니길 빌지.”

김창은 제발 그러길 바랐다. 만약 매장결사가 대악마를 불러내는데 실패한다면 원탁의 마법사들에게 의식을 맡겨야 할 판인데 그건 좀 웃긴 일이 아닌가.

그가 몸을 돌려 아이를 쳐다봤다.

“영주궁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냐?”

“아, 영주궁은요······.”

김창과 아이가 영주궁으로 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멜리사가 얼굴을 싹 굳히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 마법을 부리긴엔 충분했다. 그녀는 어이없게도 술잔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하긴 했지만 그 본질은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마력이 붙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주인의 뜻에 따라 어떠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을 때, 멜리사는 발딱 일어나 소리쳤다.

“뒈져라, 씹새야! 나는 매장결사의 일원이자 죽음의 탐구자! 이 멜리사가 널 찢어 죽여······.”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목을 잘랐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잘린 머리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사납게 넘실거렸던 마법은 언제 날뛰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으으······.”

아이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와 목 잘린 시체. 아무리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도 제법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난 지금부터 영주궁에 갔다 올 거니까 그때까지 치워둬라.”

“이걸요? 제가요?”

“그럼 내가 하랴?”

김창의 서늘한 눈을 본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해야죠.”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 저 멀리 영주궁이 보였다. 성큼성큼 걷던 그는 금방 영주궁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두 명의 병사가 잡담을 나누며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김창이 다가가자 얼른 길을 막아섰다.

“누구냐! 여긴 영주님의 거처다! 용건이 있는 자라면 정체를 밝히고······.”

김창은 빠르게 달려서 병사 하나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조잡하긴 해도 갑옷을 입고 있긴 했는데 그건 충격을 전혀 줄여주지 못했다.

명치를 맞은 병사가 켁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왼쪽 주먹이 다른 병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투구가 찌그러지고 고개가 휙 돌아간 병사가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명을 쓰러트린 김창이 당당하게 영주궁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부터는 그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하녀들은 영주궁 안을 성큼성큼 걷고 있는 김창을 보고서 새로 들어온 병사인가 하고 쳐다볼 뿐, 통행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

하인들 역시 자기 할 일에 바빠서 김창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영주의 집무실까지 갈 수 있었다.

매끄럽게 다듬은 나무 문 안쪽에서는 누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여자 하나에 남자가 둘인 것 같은데 뭔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기야 그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김창은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느껴지는 저항감에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발로 힘껏 문을 걷어찼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부서진 문이 방 안쪽으로 날아갔다.

“···이건 또 뭐야?”

방 안에는 뚱뚱한 남자 하나와 키 큰 남자, 그리고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키 큰 남자와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서로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어떤 집단의 활동복이라는 걸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네가 영주냐?”

키 큰 남자와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매장결사 소속일 테니 뚱뚱한 남자가 영주일 터다.

김창이 묻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넌 뭐냐?”

“내가 먼저 질문했잖아. 네가 영주냐고.”

“그래, 내가 호엔의 영주다. 대답했으니 너도 대답해. 넌 뭐야?”

“칼잡이.”

성의 없는 대답에 영주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키 큰 남자가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보아하니 우리와 대화하려고 온 것 같진 않군. 마탑 쪽 사람 같진 않고. 신전의 개냐? 그런데 성기사치곤 너무 천박한데.”

“둘 다 아니다.”

“그래? 하긴 어느 소속이든 그게 뭔 상관이겠나. 넌 우리를 막으려고 왔으니 난 널 죽일 뿐이다.”

김창이 칼을 뽑자 남자도 손을 모으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기세에 영주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향해 말했다.

“혼자 싸우게 둬도 되나? 그냥 둘이 같이 싸워서 빨리 제압하는 게······.”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한스는 매장결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투 마법사입니다. 칼 한 자루 믿고 설치는 저딴 놈이 그를 이길 수는 없······.”

툭, 데구르르. 뭔가 굴러와서 여자의 발에 부딪혔다. 고개를 내려서 그걸 보니 사람 머리였다.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

“······어야 하는데?”

여자가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김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였다. 뭔가 쑥 하고 날아오더니 그대로 미간에 꽂혔다.

“으··· 에윽······.”

말하려고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바보처럼 이상한 소리만 내다가 툭 하고 쓰러졌다.

숨이 끊어지기 전, 그녀의 귀에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스무 명인가. 너무 많이 죽인 건 아니겠지.”

칼을 휙 하고 털어서 오물을 털어낸 김창이 영주를 쳐다봤다.

“내가 듣기로 네가 매장결사랑 붙어먹고 있다던데, 맞나?”

“너, 너 뭐야? 대체 뭔데 이 두 명을 이렇게 쉽게······.”

“네가 알 건 없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영주는 방금 김창이 마법사 두 명을 눈 깜짝할 새에 죽이는 걸 봤다. 마법사조차 저토록 쉽게 죽이는데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은 어떠할 것인가?

살기 위해선 대답해야 했다. 영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거냐?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다.”

“할 말? 그게 뭐지?”

“내일까지 대악마를 불러내라.”

그게 뭔? 사람이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으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법이다. 이 칼잡이는 대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을 막으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대악마를 불러내라고 지껄이나? 영주는 당황한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만약 안 그런다면?”

김창이 칼집에 칼을 꽂으며 말했다.

“너를 죽이겠다.”

뭐 이딴 살인 예고가 다 있나? 영주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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