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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48화 (4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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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

영주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내일까지 대악마를 불러내지 않으면 날 죽이겠다고? 그 반대가 아니라?”

“제대로 들은 거 맞다. 혹시 내 말이 장난 같으면 내일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려봐.”

영주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매장결사의 마법사 둘을 죽인 놈이 내일까지 대악마를 불러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악마를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왜 설치고 다니나? 매장결사의 마법사는 또 왜 죽이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영주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김창이 말했다.

“매장결사의 마법사는 더 죽이면 안 되지만 넌 죽여도 돼. 그러니까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매장결사 놈들한테 가서 전해. 내일까지 대악마를 불러내야 한다고.”

“···너 혹시 악마숭배자냐?”

이 세상에는 어둠 속에 숨어 대악마를 섬기는 자들이 여럿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모두가 매장결사의 일원인 건 아니라서 때때로 각 조직끼리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면 김창 역시 다른 조직에서 보낸 놈인 것일까? 대악마를 이 땅에 불러내는 위대한 과업을 중간에 가로채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김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왜 악마를 섬겨야 하냐. 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대악마를 고객으로 두고 있는 사람이지.”

뭔 소리야? 영주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김창은 자신이 박살 낸 문을 밟고 나가며 말했다.

“내일이다. 살기 싫으면 내일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던지.”

그 말만 남기고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이 어이가 없다. 혼자 남겨진 영주는 점차 멀어지는 김창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나와.”

아무것도 없는 빈 벽, 정확히 말해서 뭔가 더러운 얼룩만이 있던 그곳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갑작스레 나타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정말 그랬다면 그건 마법적 조화일 것이다.

“할 말이라도?”

영주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젠 사라지고 없는 김창을 쫓고 있었다.

“내일이다.”

설명은 더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 * *

“오셨네요······.”

집으로 돌아온 김창을 맞이한 건 멜리사의 시체를 치우고 녹초가 된 아이였다. 저 비쩍 마른 놈에게 오늘 몇 명이나 옮기게 했으니 지칠 만도 한가.

김창은 별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걸 던졌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받아드니 방금 구운 듯 따끈한 빵이었다.

아이가 그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는 소리죠? 알겠습니다. 제 하찮은 손재주로 어떻게든······.”

“···먹으라고 주는 거다.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글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 죽이는 칼잡이? 아이가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침을 꿀꺽 삼키고 있던 아이가 얼른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참 맛있었다. 그동안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던 탓에 이런 맛은 처음 느껴봤다.

김창은 허겁지겁 빵을 먹는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곧 자신도 식사를 시작했다. 식당에서 산 온갖 요리들을 먹고 나니 자연스럽게 졸음이 찾아왔다.

오늘 하루 동안 이런저런 일로 많이 지쳤던 아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김창이 그 머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뭔가를 튕겼다.

딱!

날아간 무언가가 정확히 이마에 맞았다. 아이가 으악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가 손 위로 떨어지는 물건을 붙잡았다.

잡고 보니 금화였다.

“···이걸 왜?”

설마 저 무시무시한 칼잡이가 지금까지 수고했다고 돈을 줄 리는 없다. 정말 그랬다고 해도 금화 하나는 너무 큰 돈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는 게 분명하다. 대체 뭔 심부름인데 금화를 꺼냈을까? 아이가 긴장하는 사이에 김창이 말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그걸 들고 이 도시를 떠나라.”

“···왜요?”

“내일이 되면 대악마가 나타날 테니까.”

대악마가 나타난다고? 아이가 당황한 듯 눈만 끔뻑거렸다. 김창은 더 말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뒤 알아서 치우라는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을 뿐이다.

한참 뒤에 아이가 말했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왜 날 도와주는 거죠? 난 당신을 속이려고 했던 괘씸한 놈이잖아요. 그냥 죽게 두면 될 텐데 굳이 왜? 설마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는 아닐 테고.”

당돌한 질문에 김창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람 죽이는 데 이유 있나. 그냥 죽이는 거지. 사람 살리는 것도 똑같아. 그러는데 이유가 있나? 그냥 살리는 거지. 단순한 변덕이다.”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서 김창이라는 남자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냥 내키는 대로 산다. 삶에 뭔가 대단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사는 것뿐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정이 달라도 결과는 같다. 죽거나 죽이거나.

“침실은 어디냐?”

김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가 얼른 그를 침실로 안내했다. 사실 침실이라기보다는 그냥 적당한 곳에 이불을 깐 것뿐이지만 김창은 불만 없이 그 위에 누웠다.

그가 바닥의 자갈 하나를 던지더니 그걸로 초를 부러트려 불을 끄는 걸 본 아이가 잠깐 침묵했다.

그러나 곧 아이 역시 차가운 바닥 위에 누웠다.

“잘 자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사라져라. 난 변덕이 심해서 내일도 널 살려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미친놈. 아이가 욕을 중얼거리며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김창 역시 눈을 감았다. 점차 흐려진 의식이 저 아래로 침전했다.

의식이 가물거리며 빛을 잃어가자 무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 말소리, 얼굴, 내가 죽인 사람들, 그들의 비명, 받은 돈, 반짝이는 황금, 나를 향해 들려오는 욕설, 비정한 칼날, 죽음, 또 죽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무의식의 아래로 떨어졌다. 김창은 이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음.”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정말 시킨 대로 여길 떠난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집만 떠났고 아직 도시를 떠난 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이 더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김창은 충분히 경고했고 여비도 챙겨줬다.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 죽든 말든 그건 아이가 해결할 일이었다.

“가볼까.”

바깥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적어도 점심 먹을 때가 다 돼서 일어난 것 같았다. 김창은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어제와 다르게 환한 빛이 쏟아지는 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악마를 불러내려면 좀 더 우울한 분위기여야 하지 않나.

물론 의식은 영주궁 밑의 지하에서 행해질 테니 바깥의 햇빛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지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성큼성큼 걷다 보니 어느새 영주궁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정문을 보니 어제 자신에게 맞고 쓰러졌던 병사들이 그대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들이 김창의 얼굴을 발견하고선 꿀꺽 침을 삼켰다.

“저, 정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하기야 어제 아무것도 못 하고 호되게 얻어맞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일 터다.

김창은 조용히 손목을 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병사가 흡 소리를 냈다.

“혹시 오늘도 그 적절한 절차인지 뭔지를 밟아야 하나?”

“아, 아닙니다. 당신은 언제든 영주궁에 입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영주님께서 허가하셨거든요.”

영주가? 어제 찾아가서 난리를 쳤던 게 제법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창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내 감사히.”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안으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꾸벅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김창이 누군지 알아서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손님 같아 보이니 한 인사였다.

대충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 난 후에 영주의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어제 한 번 왔던 길이기에 막힘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그대로 한 5분 정도 걸었을까. 집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려는데 저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안······.”

“···여긴 내 영지야. 아무리 너희······.”

“······후회할 거요······.”

여러 사람이 열띤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그건 대화라기보다는 말싸움에 가까웠는데 일단 영주가 화가 단단히 났다는 건 확실했다.

김창은 지금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영주가 누굴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하든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어떤 사이도 아니니까. 그런데 단지 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들어가는 건 지성인답지 않은 일이다.

김창은 하룻밤 새에 고친 문을 쳐다보면서 일단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너희가 뭔데 여기를 수색하겠다는 거야! 너희가 무슨 개새끼도 아니고 뭔 냄새가 난다고 지하를 수색하겠다는 거냐고!”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문 너머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명확하게 들렸다. 김창은 영주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서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또 문을 발로 차서 부수고 들어왔다. 쾅 소리가 나며 약간의 먼지구름이 일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이런 씨발······. 댁은 문을 열 줄 모르나? 어제 겨우 고친 건데 그걸 또 부수고 들어와?”

“기선제압, 새끼야.”

“뭘 염병할 기선제압이야, 미친놈아! 누굴 기선제압 할 건데!”

영주가 악을 쓰며 소리치는 걸 무시하며 김창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두 명의 손님에게서 멈추었다.

그들은 흰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엔 복잡한 형태로 그려진 태양이 있었다. 금실로 그려진 그건 그들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또한 망토 안쪽으로 슬쩍 보이는 갑옷이며 허리춤의 칼은 그들이 단순한 여행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두 사람 중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쪽은 또 누구요? 영주의 호위인가?”

“호위겠냐?”

“···아닐 것 같군. 하지만 영주랑 아는 사이인 건 맞는 것 같소만. 다시 묻겠는데, 당신 누구요?”

“칼잡이. 그쪽은?”

간략한 설명에 남자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나는 이든이요. 여기 이쪽은 신시아고. 우리는 태양 아래에서 빛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오.”

그러니까 태양신을 섬기는 성기사라는 소리다. 그냥 간단히 말해도 될 텐데 뭘 빙빙 꼬나?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는 사이에 영주가 소리쳤다.

“이봐, 칼잡이! 저 새끼들을 죽여! 당장 죽이라고!”

이 새낀 또 왜 지랄인가? 김창이 물었다.

“내가 왜?”

“죽이라면 죽여! 저 새끼들 성기사잖아!”

성기사라고 다 죽여야 하면 정복자도 죽여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김창이 혼자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난 공짜 일은 안 해.”

“염병, 돈이라면 나중에 줄 테니까 죽이라고! 저 새끼들 의식에 대한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온 거란 말······.”

“감히 의식을 막으려고 해? 너흰 뒈졌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창이 바로 칼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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