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49화 (49/200)

49

두 명의 성기사가 굳은 얼굴로 김창을 쳐다봤다. 단지 칼을 뽑았을 뿐인데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봐.”

김창의 목소리에 영주가 고개를 돌렸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너는 가서 매장결사 놈들에게 의식을 서두르라고 전해.”

“···알겠다. 그럼 여긴 너한테 맡기지.”

영주가 다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든이 도망가는 영주를 붙잡으려 했지만 김창의 칼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뻗은 칼날이 시리게 빛났다. 문을 막고 선 김창 때문에 성기사들은 이 방 안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아까 물으니 영주의 호위는 아니라고 했지.”

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사악한 놈을 지키는 이유가 뭐요? 혹시 매장결사와 협력하는 또 다른 악마숭배자인 거요?”

김창은 간단히 대답했다.

“난 누구도 섬기지 않는다.”

“그럼 악마숭배자가 아니라고? 그런데 왜 우리를 막는 거요? 저 영주는 대체 왜 도와주는 것이고?”

“대악마를 죽이려고.”

이안은 물론이고 신시아의 얼굴도 이상하게 변했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인가? 대악마를 죽이겠다는 놈이 왜 성기사를 방해하나?

줄곧 가만히 있던 신시아가 한 발자국 걸어 나오며 말했다.

“지금 우리를 놀리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당장 비키시죠.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신시아가 흰색 칼집에서 자신의 무기를 뽑았다. 이든 역시 굳은 얼굴로 자신의 무기에 손을 올렸다.

김창이 대충 보기에 그들은 제법 강했다. 하기야 신전이 바보도 아니고 매장결사를 상대로 아무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저 두 명이면 매장결사의 야욕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김창이 저들을 사지 멀쩡히 보내주면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한꺼번에 덤벼.”

가벼운 도발에 신시아가 이를 부득 갈았다. 사십 대로 보이는 이든과 달리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그녀는 이런 도발에 약한 듯했다.

이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신시아가 자기 무기를 들고 바닥을 박찼다. 갑옷을 입었는데도 재빠른 움직임이다.

훈련의 성과일지 아니면 타고난 근력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위협적인 움직임이긴 했다.

김창은 달려오는 신시아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칼을 내밀었다. 빠르게 뻗어오는 칼날이 서로 얽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단 한 수, 이제 겨우 칼 한 번 맞댔을 뿐인데 신시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저 한 번의 충돌만으로 손목이 부러질 듯 저렸기 때문이다.

김창은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검을 휘두르는 걸 보았다. 그는 날아오는 공격을 몇 번 받아주다가 칼날을 약간 비틀어 신시아의 공격을 가볍게 흘렸다.

그리고는 곧게 칼을 뻗어 신시아의 목을 노렸다. 빠르게 질주하는 칼을 보고서 신시아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다음.”

칼은 목을 찌르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김창은 이미 칼을 거두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신시아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그 사실에 기뻐하는 자신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이번엔 이든이 나왔다.

“···시간만 끌 셈이오?”

“굳이 너희를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난 너희를 살려둬야 하는 입장이야.”

이든은 도무지 이 칼잡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악마숭배자도 아니면서 영주를 도와주질 않나, 성기사들과 싸우면서 굳이 죽이진 않고 오히려 살려두려고 하질 않나.

행동 전부가 서로 모순적이어서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든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당신의 진짜 목적이 뭐요?”

“아까도 말했잖아. 대악마를 죽이는 거라고.”

대악마를 죽이겠다는 놈이 대체 우리를 왜 방해하나? 영주는 또 왜 도와주고? 이든은 역시 김창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진짜 목적을······.”

거기까지 말하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창의 목적은 대악마를 죽이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려면 뭐가 있어야 하나?

대악마가 있어야 한다. 대악마를 죽이려면 일단 대악마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악마가 있으려면······.

“당신 설마?”

김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칼자루를 꼭 쥐고서 바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슬슬 시간이 됐으려나.”

“이보시오! 당신 제정신이오? 아니, 대체 왜 그딴······.”

“제정신이냐고? 물론이지.”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대답했다.

“아니, 솔직히 제정신은 아닐지도 몰라.”

제정신인 놈이면 돈 받고 사람 죽이러 다니진 않는다. 이번에 죽여야 할 건 대악마지만 어쨌거나.

김창은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빈틈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성기사들이 억지로 뚫고 틈 따위는 없었다.

이든이 다급히 외쳤다.

“당신이 뭔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소!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지금 가서 의식을 막으면 다 끝날 일을 왜 어렵게 돌아가려는 거요!”

“당장의 위험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건 쉬운 일이지.”

김창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그 위험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늘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댁이 말하던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이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대로다. 대악마의 소환 의식을 저지하는 건 결국 위험에 대한 유보일 뿐이다.

성기사로서 단지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진짜 위험은 지옥의 저 아래에 있는데 어찌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린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날 비난하려면 하시오. 하지만 나는 도박을 할 수 없는 입장이오. 위험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게 쉬운 일이라고 하셨소? 하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지. 나는 비겁한 방식으로나마 사람들을 지키겠소.”

뒤로 물러나 있던 신시아도 말을 거들었다.

“칼잡이, 당신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아요. 당신이 우릴 막겠다면 힘으로 뚫고 지나가겠습니다.”

넌 나한테 방금 졌잖아. 김창은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입을 다문 채로 아래만 보고 있었다.

저런다고 뭐가 보이긴 하나? 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한 발자국 움직일 때였다.

휙! 빠르게 움직인 칼날이 그의 목을 노렸다.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공격을 막긴 했지만 더 전진할 수는 없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이든은 신시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매장결사와 싸우기 전에 힘을 아껴야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힘으로 뚫고 지나가야······.

쿠구궁!

갑작스레 바닥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세차게 요동치자 여러 물건이 아래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방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이든과 신시아의 얼굴이 싹 굳었다. 이거 설마······.

“슬슬 내려가면 되겠군.”

김창이 그 말을 하고서 칼집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문을 여는 걸 보고서 이든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 미친놈, 기어코 대악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의식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매장결사를 막아야 했다.

이든과 신시아가 복도로 나간 김창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목적지는 같았다.

칼잡이와 두 명의 성기사, 그들의 불편한 동행이 시작됐다.

“이쪽이 지하 가는 길 맞나?”

선두에 선 김창이 고개를 돌려 이든에게 묻자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길도 모르면서 가는 거요?”

“그러는 댁은 길 잘 아는 모양이지? 그러면 앞장서.”

이든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김창이 선두에 있으면 어쨌거나 그의 속도에 맞춰서 걸어야 하는데 자신이 선두에 나서게 됐으니 이제 눈치 볼 것 없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하로 내려가 매장결사의 의식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든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분명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 텐데도 김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일행의 후미에서 김창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던 신시아는 혹시나 그가 수틀리며 칼로 이든의 등을 찌르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도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김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얌전히 이든의 뒤를 따랐고 덕분에 일행은 어떤 다툼도 없이 지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키에엑!”

어두컴컴한 지하에서는 온갖 괴물이 갑자기 튀어나오곤 했다. 아마 매장결사에서 보초 대신에 쓰는 모양인데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찌나 자주 튀어나오는지 일행의 발을 잠깐씩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잠깐이 모이자 제법 긴 시간이 되었다.

이든의 얼굴에 초조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태양의 빛이여!”

칼날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새까만 괴물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렬한 빛인지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의 어둠을 일부나마 몰아낼 정도였다.

“신시아 경! 서두르지! 이젠 시간이 별로 없어!”

“알겠습니다, 이든 경!”

신시아는 이제 김창을 감시하는 것도 잊고 이든과 함께 빛의 검을 휘두르며 뛰쳐나갔다. 두 사람이 열심히 괴물을 무찌르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김창이 말했다.

“쓸데없이 열심히 하는군. 그래봤자 늦었으니까 천천히 가.”

“도와줄 거 아니면 닥치시오!”

괜히 욕만 먹은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그는 열심히 달려가는 성기사들을 보고서 가만히 생각했다.

이거 어쩌면 의식이 끝나기 전에 도착하겠는데. 그러지 못하게 칼침이라도 한 대씩 놔줘야 하나?

아니다, 그러면 나중에 나 대신 매장결사와 싸워줄 놈들이 없으니 곤란하다. 김창은 일단 얌전히 성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저기인 것 같군! 신시아 경! 조금만 더 힘내게!”

“이든 경, 먼저 가시지요! 잔챙이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자기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 바람직한 선후배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은 여전히 칼조차 뽑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두 명의 성기사는 빛의 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악을 징벌했다.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음산한 공간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매장결사가 벌이는 수상쩍은 의식의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든과 신시아는 드디어 도착했다는 기쁨을 느끼며 힘차게 의식 장소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니 우리가 바치는 제물을 받으시고······.”

“······이 땅에 진정한 죽음이 강림하리니!”

간발의 차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아주 약간의 차이. 시간으로 따지면 한 걸음 걷는 정도의 시간일까.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 의미가 없진 않았다. 그 잠깐의 차이로 결과는 확연하게 뒤바뀌었으니까.

“아, 아아······.”

이든은 직감했다. 자신은 너무 늦었다. 그토록 열심히 달렸음에도 의식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트릴 뻔했다. 성기사 견습 시절부터 단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자신의 분신을.

그만큼 그가 느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대악마가 이 땅에 강림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며 또 얼마나 큰 상처가 이 대지 위에 남겨질 것인가.

이것은 내 죄다. 죽어서도 감히 속죄하지 못할 커다란 죄.

“···불청객들이 찾아왔군.”

그 목소리는 영주의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김창을 쳐다봤다.

“내가 분명 저 성기사들을 죽이라고 했는데 왜 죽이지 않았지? 여긴 또 왜 같이 온 거고?”

영주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김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칼을 뽑았을 뿐이다.

“하기야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곧 대악마께서 이 땅에 현현하실 것이니 너희 모두는 죽은 목··· 켁!”

허공에 빛살이 그어지고 머리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의식에 성공했다는 고양감에 젖어 있던 매장결사의 마법사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봤다.

김창은 그들을 향해 칼을 겨누며 말했다.

“감히 대악마를 불러내? 너흰 뒈졌다.”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이든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김창을 쳐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