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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놈들이냐?”
지하실 안에는 스무 명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악마를 불러내기 위한 의식 때문인지 상당히 지쳐보였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로 가득했다. 하기야 저들이 섬기는 주인의 진정한 모습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게 됐으니 그 기쁨이 상당할 것이다.
성기사로 따지자면 태양신이 직접 이 땅에 강림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물론 대악마와 신 사이에는 격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건.
“우리는 태양을 섬기며 빛을 전하는 자들이다. 너희가 기어코 넘어설 안 될 선을 넘었구나······.”
자신을 소개하는 이든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의식을 막지 못했고 이제 곧 대악마가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신전의 개들이었군? 그래, 그러면 그쪽은······.”
매장결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돌려 김창을 쳐다봤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멜리사를 죽이고 영주를 협박했던 놈이로군. 네 목적은 대체 뭐냐? 주인님을 섬기는 자도 아니고 신전의 개도 아니라면 대체 뭘 위해서 여기 온 거냐?”
김창이 무심히 대답했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뭔 말?”
“대악마를 불러냈으니 너희를 죽이겠다고 했잖아.”
마법사가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젠 영주를 찾아와서 의식의 거행을 서두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젠 우리를 죽이겠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이든이 말했다.
“···간특한 자여, 이 남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마시게. 이거 그냥 미친놈이야.”
“내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군.”
신실한 성기사와 사악한 마법사의 의견이 드물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대악마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 의식이 성공한 건 맞아?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김창의 물음에 마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가 한 것은 지옥과 지상의 연결점을 만든 것뿐이다. 주인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는 건 오직 그분의 뜻에 달렸을 뿐이다.”
그 말에 이든이 반색했다.
“그 말대로라면 아직 대악마의 강림을 막을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연결점인지 뭔지 하는 걸 부수면······.”
“아니, 늦은 것 같은데.”
김창의 말에 이든이 얼굴을 구겼다. 늦긴 대체 뭐가······.
쿠구궁!
아까 그랬던 것처럼 지하실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천장에서 돌조각이 후두둑 떨어지고 벽 위로 가느다란 금이 빠르게 내달렸다.
지하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기세였지만 매장결사의 마법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환히 웃으며 그들이 의식을 치렀던 제단을 쳐다볼 뿐이
었다.
“오신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께서 오신다!”
“칼레드리온! 칼레드리온!”
“지옥의 공작께서 오신다!”
제단이 쩌적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더니 곧 그 위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태양의 것과 다르게 대단히 음산하며 불길한 기운이 넘쳐났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발광하던 빛의 기세는 점차 사그라들더니 곧 하나의 문으로 변했다. 거대한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건 악마였다. 악의 정수이며 또한 지옥의 지배자였다. 그 실체를 직접 본 사람은 적지만 누구든 한 번이라도 본다면 저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을 것이다.
그것은 대악마였다. 지옥의 일각을 다스리는 공작이며 또한 무자비한 도살자이니 그 이름은 칼레드리온이다.
“오, 오오! 우리의 주인께서 강림하셨다!”
쿵!
쩍 벌어진 뱀의 아가리로 뼈만 남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뱀의 아가리를 붙잡더니 곧 위아래로 크게 찢어버렸다.
뱀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대악마는 그 거대한 몸을 억지로 빼냈다.
기어코 지옥에서 이 땅으로 기어 올라온 대악마는 불타는 눈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매장결사의 마법사들을 쳐다봤다. 그들 중 하나가 시선의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기절했다.
칼레드리온의 얼굴은 도마뱀의 머리를 흉측하게 일그러트리고 여러 개의 뿔을 단 것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또한 그 몸은 일부가 녹거나 찢어져 뼈와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누더기 같은 인상이었지만 감히 얕잡아볼 수는 없었다.
등 뒤에 달린 두툼한 꼬리는 가죽이 전부 벗겨져 뼈만 앙상했으나 오히려 그게 더 흉악스러운 모습이었다.
다른 악마처럼 날개는 없었고 손에는 양날 도끼를 들고 있었다. 대체 뭘 베고 왔는지 도끼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칼레드리온, 지옥의 도살자······.”
이든과 신시아는 넋이 나간 듯 칼레드리온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기사라면 이럴 때일수록 투쟁심을 불태워야 하는 게 아닌가?
김창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누가 감히 이 나를 불러냈느냐······.”
칼레드리온의 목소리는 가래가 들끓는 것처럼 듣기 싫은 음색이었다. 그러나 매장결사의 마법사들은 그게 마치 천상의 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희에 젖
어 있었다.
“칼레드리온, 지옥의 공작이시여! 여기 당신의 종복들이 있나이다!”
매장결사의 대장이 눈물까지 흘리며 절하자 칼레드리온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와라.”
자신의 충심에 마땅한 보답을 내리려는 것일까? 마법사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재빨리 칼레드리온에게 다가갔다.
대악마는 마법사를 향해 손을 뻗고는 가볍게 쥐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여! 이 땅을 죽음으로 물들여······.”
마법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칼레드리온이 그를 한입에 삼켰기 때문이다.
우드득!
칼레드리온이 입을 움직일 때마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매장결사의 마법사들까지 몸이 굳어 가만히 있었다.
잠깐만에 마법사를 씹어 삼킨 칼레드리온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버러지 놈들이 날 불러내? 내가 너희의 심부름꾼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씹어 삼켜도 시원찮을 놈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이건 우리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데······.
“감히 내게 뭔가를 요구하려 들지 마라. 나는 오직 내 의지만으로 움직인다.”
매장결사는 이런 상황이 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옥의 대악마를 지상으로 끌어 올려줬으니 당연히 기뻐하리라고만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대악마는 훨씬 더 잔혹하고 제멋대로인 생물이었다. 그들은 제 주인에게서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었다.
그들이 받을 것은 오직 대악마의 족쇄뿐이다.
“버러지 놈들아, 뭘 가만히 있느냐? 나를 위한 공물을 바쳐라. 인간을 죽이고 그 영혼을 모아 와라. 공물의 질이 만족스럽다면 너희의 목숨 정도는 살려줄 수도 있지.”
그제야 매장결사는 자신들이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대악마는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대악마를 위해 개처럼 일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찬란한 보상 따위는 조금도 받지 못한 채로.
“가라, 가서 일해. 뭘 꾸물대고 있느냐? 내가 너희 중 하나를 또 먹어치워야 정신을 차릴 테냐, 이 버러지 놈들아!”
칼레드리온의 외침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이었다. 심지가 약한 자들은 바로 기절해버렸고 나머지도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대악마는 지상에 올라와서 처음 만난 제 하수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그가 본보기로 마법사 하나를 더 잡아먹으려고 할 때였다.
“···대악마 칼레드리온.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이든과 신시아가 대악마를 상대로 무기를 겨누었다. 두 사람 모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두려움은 의무를 이기지 못했다. 과연 성기사의 귀감이라고 할 만한 자세였다.
“이건 또 뭐냐? 신전의 개새끼들 아닌가.”
“우리가 널 막겠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태양이 널 벌하리라!”
칼레드리온이 큭큭 웃었다. 듣기 싫은 웃음이었다.
“이 미천한 것들이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너희가 날 막아? 날 막으려면 적어도 태양신의 화신이라도 데리고 왔어야지!”
부웅!
칼레드리온이 양날도끼를 크게 휘두르자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이든과 신시아는 얼른 각자의 무기를 들고 공격을 막았으나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날아가 벽에 몸을 부딪칠 뿐이었다.
“크으윽······.”
공격도 막았고 몸에 갑옷도 입고 있으니 일격에 죽진 않았다. 하지만 방금 그 공격을 받아내보니 저건 성기사 두 명으로 감히 상대할 적이 아니라는 사실만 명확해졌다.
두 사람은 침울해졌으나 도망치진 않았다.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대악마를 향해 걸어가자 누군가의 등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당신?”
“염병 그만하고 가서 너희 할 일이나 해.”
김창이 칼로 대악마를 겨누고 있었다. 이든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상대하시려고? 아니, 그것보다 우리 할 일이라면 저 악마를 상대하는 건데······.”
“너희 둘 가지고 되겠냐? 가서 매장결사 놈들이나 죽여. 이젠 쓸모가 다했으니까.”
“물론 그들도 붙잡아야겠지만 대악마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오! 일단 저놈부터······.”
김창이 허공에 칼을 휙 하고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칼날에 잿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걸 본 이든의 눈이 커졌다. 저건 설마······.
“가라고.”
오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저건 검술의 달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절기이며 그 자체로 칼잡이의 실력을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다.
먼 옛날에 홀로 대악마를 물리쳤다는 영웅 역시 오러를 다뤘으니 김창 역시 저 거대한 악을 상대할 자격을 갖췄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차갑게 식은 목소리를 듣고서 이든은 결심을 굳혔다.
“···금방 돌아오지.”
“그 전에 끝나.”
이든은 신시아와 함께 몸을 돌려 매장결사를 향해 달렸다. 두 명의 성기사가 떠나고 김창은 홀로 칼레드리온과 대치했다.
“호오, 이건 또······.”
칼레드리온의 눈이 누런색으로 빛났다.
“······네가 이번 시대의 대적자냐? 악에 맞서 싸우고 정의의 기치를 바로 세울 자가 너냐고 물었다.”
뭔 염병할 소리야. 김창이 칼자루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아니다, 이 악마야.”
“아니라고? 하기야 천박한 말투를 보니 그럴 것 같기도 하군. 영웅다운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어.”
“그게 중요하냐? 서로 바쁜데 그냥 덤비기나 해.”
칼레드리온이 어깨를 들썩였다. 어깨를 으쓱이는 동작인 것 같긴 한데 덩치가 워낙 크니 느낌이 달랐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내 기꺼이.”
칼레드리온이 양날 도끼를 머리 위로 들었다가 크게 휘둘렀다. 거대한 중량을 가진 도끼가 공기를 갈랐다가 그대로 바닥을 박살 냈다.
김창은 훌쩍 뛰어서 박살 난 바닥의 파편을 밟고 더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공중에 뜬 파편을 빠르게 밟고 달리며 칼레드리온의 머리 근처로 접근했다.
빛나는 칼날이 벼락처럼 움직이며 대악마의 눈을 크게 베었다. 핏물이 확 하고 튀면서 눈꺼풀이 일부 잘려 나갔으나 칼레드리온의 기세는 굳건했다.
“그깟 걸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건 허세가 아니었다. 눈을 베였는데도 칼레드리온은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어라, 천박한 놈아!”
칼레드리온이 휘두른 왼쪽 주먹이 그대로 김창의 몸을 후려쳤다. 주먹에 맞았는데 거의 둔기에 맞은 것처럼 몸 전체가 욱신거렸다.
공중에 맞은 터라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뒤로 날아간 김창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바닥이 부서지고 먼지구름이 일어날 정도였다. 칼레드리온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양날 도끼의 자루로 바닥을 쿵 하고 찍었다.
보통이라면 그 정도에 몸이 박살 나서 죽었을 것이다. 오러를 쓰는 놈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아주 목숨이 끊어지진 않아도 사지가 부러져 꿈쩍도 못 할 상태일 게 분명했다. 제법 싸우는 놈인지 알았는데 싱겁군. 칼레드리온이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여덟 기수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약해빠져서 대악마는 또 어떨까 궁금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악마가 걸음을 멈췄다.
“이건 죽일 가치가 있겠군.”
먼지구름 속에서 잿빛 칼날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