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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54화 (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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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먹어서 뭐 하게? 영주 놀이라도 하려고?”

이고깽이라는 말이 있다. 고등학생이 이세계로 가서 깽판 친다는 뜻인데 원래 그 끝은 귀족들 때려잡고 왕이 되는 법이다.

그러면 한석구도 그러려는 걸까? 그는 고등학생이 아니지만 하는 짓만 보면 이고깽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딱히 영주 직함 달고 으스대려는 건 아니야. 솔직히 그거 먹어서 뭐 하나? 내가 진짜 영주가 되려고 했다면 칼라드에 돈 뿌려서 영주 끌어내리면 되는데 왜 그러겠어?”

한석구의 말은 허세가 아니다. 원탁은 사실상 칼라드의 지배자고 그 수장인 한석구는 실질적인 칼라드의 주인이다.

그러니 그가 영주 직함에 집착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이 먼 곳의 영주가 되려는 이유는 뭔가?

“원탁은 말이야, 충분히 성장했어.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고. 솔직히 말해서 칼라드는 이제 원탁을 담기엔 너무 좁아.”

대전이 초기 때를 생각하면 지금 원탁의 모습은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때는 뭔가를 하려면 몇 없는 플레이어들끼리 뭉쳐서 발바닥에 땀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녀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이 손가락질 몇 번으로 도시 하나를 움직일 수 있지 않나.

그런 걸 생각하면 한석구의 말대로 원탁은 충분히 성장했다. 그리고 그건 다르게 말해서 더 성장할 구석이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이 왜 원탁에 붙어 있는 줄 알아? 내가 걔네 못 나가게 윽박질러서? 그것도 맞지. 근데 걔네가 날 좆같아 하면서도 원탁에 붙어 있는 건 여기 있으면 얻어먹을 게 많아서야.”

원탁은 플레이어의 이익 단체다. 같은 편을 끔찍하게 챙기는 한석구의 성향 때문에 일단 원탁에 붙어 있기만 하면 뭐든 떨어지는 게 있다.

“그런데 이제 원탁은 더 커질 구석이 없지. 그러면 플레이어들한테 원탁은 더는 매력적이지 않게 느껴진다는 소리야.”

김창이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래서 호엔을 먹고 거기서 짜낸 돈을 플레이어한테 뿌리겠다는 거냐?”

“말을 좀 가려서 하지 그러냐. 난 딱히 호엔을 착취할 생각은 없어. 내가 보니까 여긴 영주가 악마숭배에 미쳐서 영지 운영에 관심이 없어서 영지가 망한 거지, 땅 자체는 괜찮은 곳이야. 그러니까 원탁의 자금을 좀 풀면 금방 다시 부흥할 거다. 영지가 살아나면 사람들도 좋고 나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으니 서로 이득 아닌가?”

한석구가 그리고 하고 말을 이었다.

“난 애초에 호엔의 영주가 될 생각이 없어. 지금 칼라드를 관리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이 먼 땅을 나보고 다스리라고?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 영주 대리인을 쓸 생각인가? 하기야 원래부터 이 땅에 살던 사람 중 똑똑한 놈을 골라서 대신 내세우면 반발도 덜할 테니······.”

“아니, 이곳의 영주는 정복자가 할 거다. 영주 업무를 도울 사람은 이곳 사람들로 채우겠지만 그래도 영주는 우리 쪽 사람으로 세울 거야.”

“정복자를···?”

걔가 영주 노릇 할 깜냥이 되나? 김창이 쳐다보자 한석구가 바로 설명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더 성장할 구석이 없는 원탁은 플레이어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그러면 그들이 원탁을 매력적으로 느끼려면 뭘 해야 하나? 새로운 당근을 줘야 해.”

약간 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탁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영주 자리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 장담하는데 전보다 훨씬 더 충성스럽게 변할 거다. 아무리 잘난 플레이어라도 혼자서 영지 하나를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원탁의 비호가 있다면 영주가 되기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 이런 식으로 왕국 내에서 플레이어 영주의 비율을 늘려나가면 그 누구도 원탁을 건드릴 수 없게 돼.”

줄곧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든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걸 왕국이 가만히 보고 있진 않을 것 같소만.”

한석구의 시선이 이든 쪽으로 움직였다. 저 검은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담겨 있어서 성기사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왕이라면 원탁의 영주를 인정할 것 같은데. 왜냐고? 그야 지금 영주들이 아주 씹새끼니까. 걔넨 이제 머리가 굵어져서 왕의 호출령도 씹는다지? 만약 왕이 머리 똑똑한 놈이라면 원탁이 영주 자리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는 걸 묵인할걸. 그러면 영주 놈들의 세력은 약해질 거고 대신 그들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이 자라나는 셈이니까.”

그건 너무 낙천적인 전망 아닌가? 이든은 물론이고 김창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바깥으로 꺼내진 않았다.

한석구의 눈은 정말 자기 생각대로 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성기사 양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신전 가서 괜한 소리 하지 말아요. 솔직히 신전이 이거 알게 된다고 뭐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마는······. 어쨌건 내 말 알았죠?”

눈을 부라리는 한석구를 보며 김창은 이 새끼 정말 깡패 다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칼만 안 들었지 남 협박하는 솜씨가 깡패 못지않다.

하기야 플레이어의 근본은 깡패고 원탁은 깡패 조직이니 그 수장이 이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알겠소.”

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한석구가 그제야 웃음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김창을 보며 말했다.

“너도 나중에 영주 자리 하나 받아라. 뭐 네 성격에 주겠다고 해도 안 받겠지만.”

김창은 마치 자신에게 영주 자리를 나눠줄 권리가 있다고 믿는 듯한 한석구를 가만히 쳐다봤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건 어느 지역을 접수한 깡패 조직이 이제는 우리도 클 만큼 컸으니 전국 단위로 놀아보자고 하는 꼴이다.

게다가 하던 대로 음지에서 나대는 게 아니라 아예 양지로 기어나가서 깡패 놈들이 시장이며 군수 노릇 하겠다는 건데, 대체 그게 뭔 발상인가?

김창은 현실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여긴 법과 질서가 힘 앞에 무력한 곳이라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석구가 아예 왕까지 갈아치울지도 모르는 일이지. 김창은 나직이 말했다.

“일없다. 그것보다 이 친구들 오늘 하룻밤 쉬었다 가도 괜찮겠나?”

“성기사들? 아, 물론이지. 우리 쪽에도 성기사 애들 몇 있긴 하지만 진짜 성기사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이거 환영회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이든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럴 필요 없소. 우린 그냥 하룻밤 머물고 갈 곳만 있으면 되오.”

“그래요? 그거 좀 아쉽네. 그러면 방 내줄 테니까 쉬다 가요. 그쪽의 그 마법사는 어떻게 해드릴까? 지하에 감옥 있는데 거기 좀 처박아둘까?”

신시아가 이든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고맙겠소. 그러면 내가 감시역으로 따라가지.”

“아, 뭘 또 그래? 여기 원탁이에요, 원탁. 저 새끼가 뭔 수로 도망쳐요? 그냥 편하게 쉬세요.”

이든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러면 호의를 받아들겠소.”

“호의라고 할 것까지야. 그냥 노는 방 내주는 것뿐인데. 자, 다들 갑시다. 환영회는 안 해도 식사 대접은 해드릴 테니까.”

한석구가 다른 플레이어 하나를 불러서 마법사를 지하 감옥에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방을 하나씩 내주었다.

김창 일행이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고 각자의 방에서 전투의 피로를 풀고 있을 때, 한석구가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불렀다.

“다들 시장하실 텐데 식사나 한 끼 하죠? 우리 사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여기 요리사 진짜 요리 잘해요. 내가 볼 땐 칼라드 영주의 식사도 우리만 못할걸.”

그거야 네가 칼라드 영주의 요리사를 돈으로 빼냈으니까 그런 거지. 김창이 흠 하고 소리를 냈다.

“아니, 이 정도로 많은······.”

식당으로 가니 연회를 하려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테이블을 따라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석구는 당황한 성기사들을 보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왜 저러는지 알만했다. 제딴에는 신전의 성기사들에게 원탁의 위세를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쁜 모양이지.

참 애새끼 같은 짓이다. 하지만 유치하긴 해도 필요한 일이긴 했다. 그래야 신전이 원탁을 얕잡아 보지 않을 테니.

“자, 다들 드십시다! 마음껏 먹어요. 요리 많으니까 먹고 또 드시고. 혹시 술 하시나? 그러면 한 잔 따라드릴게.”

한석구가 과하게 친근한 척을 하며 이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든은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고 신시아가 그걸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나름 술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풀어지는 게 보였다. 이든과 신시아가 대악마와 싸웠던 김창의 이야기를 하자 한석구가 하하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창이 저 새끼가 물건은 물건이라니까? 자기가 뭐 힘숨찐 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이름 안 알리고 다녀서 그렇지, 원래라면 대륙 전역에 이름 쫙 퍼졌어도 이상할 게 없어요. 원래라면 전국구 칼잡이야, 전국구 칼잡이!”

전국구 칼잡이는 또 뭐냐.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음식을 먹었다. 오리를 구워서 달콤한 양념을 바른 요리였는데 제법 맛있었다.

“어, 다들 이리로 와! 귀한 손님 오셨는데 인사 한 번씩 드려야지!”

이든은 환영회를 극구 사양했지만 한석구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부르는 바람에 사실상 환영회를 연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식당엔 사람들이 들어차서 곧 왁자지껄하게 변했고 이든과 신시아는 여러 사람과 인사하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

김창은 주는 대로 넙죽 술을 받아먹는 이든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내일 고생 좀 하겠군.

적당히 배를 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다. 워낙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대악마와 싸우느라 피곤했던 그는 그대로 침대 위에서 잠들었다. 꿈도 없는 잠을 자고서 어느새 들려오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태양의 위치를 보니 너무 늦은 아침은 아닌 듯했다. 그가 천천히 옷을 갖춰 입고 식당으로 나갔다.

“끄으응······.”

거기엔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끙끙 대고 있는 두 명의 성기사가 있었다. 역시나 어젯밤에 너무 마신 모양이다.

“꿀물이라도 타주랴.”

다가온 김창의 물음에 이든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제가 직접 하지요······.”

“그 꼴로 하긴 뭘 해. 나도 한 잔 마시려니까 거기 있어.”

김창은 주방으로 가서 꿀물 세 잔을 내왔다. 그걸 이든과 신시아에게 내밀자 그들이 앓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이거 추태를 보였군요. 성기사로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성기사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애초에 태양신은 금욕을 미덕으로 삼지도 않잖아.”

“맞습니다만 그래도······.”

성기사도 일종의 성직자이니 이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김창은 더 말하지 않고 꿀물을 마셨다.

따뜻한 꿀물을 마시니 제법 기운이 돌아온 것인지 신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든 경,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있다가는 오늘도 붙잡혀 있을 것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렇네, 신시아 경. 돌아갈 채비를 하지. 감옥의 그 마법사도 데려오고.”

두 명의 성기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자 김창이 말했다.

“너희 떠나기 전에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볼 것이요? 어떤 겁니까?”

“너흰 어떻게 매장결사가 있는 곳을 알아냈지?”

호엔에서 매장결사가 어찌나 비밀스럽게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원탁조차 만네르헤임의 밀고를 통해서 그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면 이 성기사들은 대체 무슨 수로 매장결사를 찾아냈나? 설마 이들도 악마의 밀고를 받은 건 아닐 텐데.

“아, 그거라면 팅게르의 수정구 덕분입니다. 그건 신전의 성물인데, 보통 땐 철구지만 때때로 투명하게 변해 악의 위협을 경고하지요. 우린 그 수정구의 인도를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전으로 간다고 했나? 그러면 나도 같이 가지.”

이든은 순간 이 칼잡이가 신에 귀의하려는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팅게르의 수정구에 용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래.”

김창은 어쩌면 또 다른 대악마를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신성을 얻을 만한 싸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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