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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55화 (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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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악마의 죽음에 대한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당사자가 같이 가겠다면 저희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요.”

이든이 웃으며 말하자 김창이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차원문 열어줄 놈 데리고 올 테니까.”

“아, 그러면 저희는 잠깐 기다리고 있지요······.”

이든과 신시아가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끙끙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래서 신전에 갈 수나 있을까.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식당을 나섰다. 그는 복도를 걷다가 심민우가 머물고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네, 나가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부스스한 머리로 머리를 빼꼼 내민 심민우가 김창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어, 김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설마 저랑 식사나 한 끼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혹시 차원문 열어줄 수 있나? 태양신의 신전으로 갈 건데.”

“성기사 분들이 지금 떠나는 모양이죠? 그런 부탁이야 뭐 어려울 것도 없죠. 잠시만요.”

심민우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대충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나왔다. 머리는 여전히 부스스했지만 당장 바로 잡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난 지하에서 마법사를 데려갈 테니까 넌 먼저 식당으로 가.”

“알겠습니다.”

김창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자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정호였는데 이곳에서 간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제 그 마법사 데리러 왔다고? 잠깐만 기다려.”

이정호가 열쇠 뭉치를 잘그락거리더니 어느 감방에서 마법사를 데리고 나왔다.

밤새 감옥 속에 갇혀 있던 마법사의 안색은 상당히 창백했는데 아무래도 어제의 격렬한 전투 탓인 듯했다.

혹시나 죽을까 봐 붕대를 감아 주고 치유 마법도 써주긴 한 것 같은데 도망을 우려한 것인지 딱 응급처치만 한 모양새였다.

“이 녀석 맞지?”

김창이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대로 마법사를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끝, 검은색 잉크를 쏟은 것처럼 새까만 색으로 물들어 있는 저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죄를 지은 놈 하나가 잡혀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장 안쪽 독방에 들어가 있다는 게 심상치 않았다.

내가 알기로 저 독방에는 아무나 가두는 게 아닐 텐데. 어느 마을에 가서 무차별 학살이라도 한 게 아닌 이상······.

“뭐해? 안 올라가?”

이정호가 묻자 김창이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간수장은 어디 갔냐. 이름 뭐더라, 그······.”

“하오성? 걔가 이 어두컴컴한 지하에 붙어 있겠냐? 다른 간부 놈들처럼 돈 쓰고 놀러나 다니지.”

강한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언제나 더 강한 힘뿐이다. 그 논리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라 원탁의 간부 자리는 당연하게도 랭커 위주로 돌아갔다.

하오성 역시 간수장 자리를 맡은 만큼 제법 강한 놈이었는데 다른 간부들이 그러하듯 자기 업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김창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뒤에 말했다.

“걔 돌아오면 저 안쪽에 있는 놈 잘 감시하라고 해.”

“저 안쪽 독방? 됐어, 저 새끼 원탁 설립 초기 때부터 저기 갇혀 있었는데 아직 탈출 못 한 거 보면 그럴 능력 없어.”

그 정도로 오래 갇혀 있었다고? 원탁 설립 초기 때면 아마 정복자가 잡아 온 놈일 텐데 대체 뭔 죄를 지었기에 아직 수감 중이란 말인가?

한석구는 사고 친 놈을 정말 감옥에 처박긴 해도 적당히 시간 지나면 알아서 꺼내주고는 했다. 그런데 아직도 갇혀 있는 걸 보면 보통 사고를 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중에 뭐 하던 놈이냐고 물어볼까. 김창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석구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 난 간다.”

“얼른 가라. 난 이제부터 낮잠이나 자려니까.”

간수장이 일에 관심이 없으니 그 부하도 똑같다. 김창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사를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갑작스럽게 햇빛을 받으니 마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면서 막 고개를 흔드는데 그걸 보니 얼굴이 창백한 게 그냥 햇빛을 오래 안 보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뭔 흡혈귀도 아니고······. 김창은 헛웃음을 흘리며 마법사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거기엔 심민우가 성기사들을 데리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오셨네요. 차원문 열어뒀어요. 태양신의 신전이 마침 제가 가본 적이 있는 곳이라서 다행이네요.”

확실히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대충 가까운 곳에 차원문을 열고 며칠을 걸어야 했을 테니까.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사의 신병을 신시아에게 넘겼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물론입니다.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제가 책임지고 맡아두겠습니다.”

자신을 뭔 물건 다루듯 하는 대화에 마법사가 끙끙 소리를 냈다.

“그러면 가볼까.”

“어, 바로 가시게요? 의장님께 간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창이 심민우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걘 내 부모가 아니야. 나도 걔 자식이 아니고. 내가 언제 어디로 떠나든 보고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그냥 네가 말이나 전해.”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김 선생님? 이번 여행에도 행운만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볼 수 있다면 말이야.”

“곧 다시 볼 수 있으면 기쁘겠군요.”

김창은 아마 이번엔 금방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요 얼마간은 이상할 정도로 원탁에 자주 들락거렸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태양신의 신전에 들린 후에는 대악마에 대한 정보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날 셈이었으니까. 아마 그건 몇 달은 걸릴 여정일 터였다.

“그런데 김 선생님······.”

심민우가 목소리를 낮추고서 귀 좀 빌려달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김창이 고개를 움직였다.

“······만네르헤임에게 대악마를 죽였다고 알려주지 않아도 될까요?”

뭔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지옥에 있어야 할 칼레드리온이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자기도 알아서 눈치를 채겠지. 그냥 둬라. 그리고 대악마가 혹시라도 너에게 접근하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한석구한테 바로 이야기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악마에게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다고요.”

그러는 놈이 여덟 기수 중 하나를 불러내서 사고를 치나? 김창은 영 미덥지 못하다는 눈으로 심민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이제 정말 간다.”

“네, 조심히 가세요.”

김창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서 이든과 신시아, 그리고 매장결사의 마법사를 데리고 함께 차원문을 통과했다.

언제나 그랬듯 심민우가 연 차원문은 통과해도 어지럼증이나 멀미 따위가 없었다. 김창은 심민우의 차원문을 자주 드나들었기에 별 감상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든과 신시아가 작게 감탄하는 와중에 매장결사의 마법사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이토록 완벽하게 차원문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고? 원탁의 마법사는 괴물인 것인가······.”

그게 아니라 걘 그냥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건데. 김창은 심민우를 위해서 그 비밀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여기가 태양신의 신전인가?”

김창이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종교든 그 본산은 신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법이다. 태양신의 신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태양신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신앙이기에 그 교세가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신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전은 어지간한 왕궁에 비할 정도로 거대했다.

김창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을 한 번 보고서 호오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이건 다른 어떠한 뜻도 없이 순수한 감탄이었다.

아무리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칼잡이라고 해도 거대한 건축물을 보고 감탄할 만한 감수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든 경! 신시아 경!”

김창이 가만히 신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이든과 신시아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요셉 경!”

요셉이라 불린 남자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말했다.

“아니, 두 사람은 호엔에 매장결사의 의식을 막으러 갔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이리도 빨리?”

여기서 호엔까지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 이든과 신시아가 벌써 돌아온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요셉도 그걸 알기에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는 순간 이 두 사람이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이든의 설명으로 불식됐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차원문 덕분이오.”

“차원문? 하지만 두 사람은 성기사잖나. 마법은 못 쓸 텐데? 아, 혹시 거기 잡아 온 놈에게 차원문을 열게 한 건가?”

신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원탁의 마법사가 열어줬습니다. 우린 그들의 도움을 받았거든요.”

“원탁? 아니, 그러면 이쪽의 사람이 원탁의 마법사인가? 생긴 게 마법사가 아닌데?”

요셉의 시선을 받은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생긴 게 뭐 어때서.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설명하도록 하지.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이든의 말에 요셉은 더욱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든이 더 이야기 해주진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김창 일행은 그대로 요셉을 따라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이 거대한 만큼 그 안에도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먼 길을 걸어 신전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자 한 참배객, 사악한 마법사를 끌고 가는 성기사, 책을 잔뜩 들고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제.

김창은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요셉을 따라 걸었다. 몇 분 정도 걸은 후에 그들은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보니 손님을 맞이하는 방인 듯했다.

“자, 그러면 이제 말해보시게. 여기라면 따로 듣는 사람도 없을 터이니.”

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긴 이야기를 핵심만 잘라내고선 입을 열었다.

“우리가 호엔의 영주를 만나러 갔을 때였소······.”

이든은 영주를 만나고 있을 때 김창이 나타난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 첫 만남 때는 김창을 미친놈 보듯 봤으면서 어째 이야기 속의 김창은 대악마를 막기 위해 나타난 영웅이나 다름이 없었다.

“······긴 격투 끝에 대악마는 쓰러졌소. 그리고 우리는 귀인의 도움 덕분에 칼라드로 갔다가, 거기서 또 원탁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요.”

요셉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탄식처럼 말을 내뱉었다.

“허어, 그러면 칼레드리온은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인가? 의식이 성공했다고 들었을 땐 가슴이 철렁했는데, 그래도 결국 대악마를 지옥으로 돌려보냈다니 참으로 다행이군.”

“아니, 그게 아니오. 대악마는 지옥으로 돌아가지 않았소.”

“돌아가지 않았다고? 설마 도망친 겐가?”

이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망친 것도 아니오. 완전한 죽음을 맞았지. 그 더러운 대악마 놈이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게 됐다는 소리요.”

“그게 정말인가!”

요셉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는데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창문이 약간 흔들릴 정도였다.

그는 잔뜩 흥분한 채로 말을 내뱉었다.

“정말로 칼레드리온이 죽었다고? 그것도 완전한 죽음을?”

“내 우리의 신께 맹세하길, 분명히 죽었소. 믿기 어렵다면 여기 매장결사의 마법사 놈에게 물어보시오.”

요셉이 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대악마는 죽었어.”

“하! 이럴 수가! 나로선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사건이 아닌가? 이건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군! 잠깐 기다리게! 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올 테니!”

이든이 잠깐 기다리라고 말릴 새도 없이 요셉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 재빠른 행동에 이든이 당황하며 김창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거 귀찮은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됐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는데 뭘.”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요셉 경이 곧 사람을 데리고 올 겁니다.”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요셉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문 너머에서 뚜벅뚜벅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흰색 갑주를 입은 성기사였다.

“너냐? 혼자서 대악마를 죽였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갑옷 입었다고 칼 안 맞는 거 아닌데. 김창이 칼자루 위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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