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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56화 (5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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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르 경? 요셉 경은 어디 가고···?”

이든이 방 안에 들어온 성기사의 얼굴을 알아봤다.

바하르라고 불린 성기사는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진 게 전형적인 전사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짧게 친 금색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만 봐도 그가 얼마나 많은 고행을 헤쳐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정도면 신전 안에서도 제법 강한 축에 들지 않을까? 그러니 겁도 없이 설치는 거지. 김창은 바하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요셉 경이라면 곧 올 겁니다, 이든 경.”

“아니, 그러니까 왜 요셉 경이랑 같이 오지 않고 바하르 경만 온 겐가?”

“그거야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리는 놈의 얼굴이 궁금해서지요?”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모습을 보니 저 바하르라는 놈의 성격을 알 법했다.

김창도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 오면서 저런 종류의 사람에는 익숙했다. 바하르는 젊고 혈기가 넘치며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개 저런 성향의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서 오만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김창에게 겁도 없이 시비를 거는 바로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허세라니······. 바하르 경, 말조심하게.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 거짓인 건 아닐세.”

“경전에도 적혀 있는 구절이지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대악마를 물리쳤다는 것까진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물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어쨌건. 그런데 혼자서 물리쳤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들군요. 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라면 응당 신의 축복을 받은 자여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 칼잡이가 신의 축복을 받았을 리가?”

그 말투가 너무나 공격적이어서 이든은 물론이고 신시아까지 발끈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김창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저 칼자루를 손으로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그러고 있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든은 바로 며칠 전에 김창이 혼자서 대악마를 썰어 죽이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봤다. 그 정도의 실력자가 성기사 하나를 못 죽일까? 설마 정말 죽이진 않겠지만 어쩌면······.

“바하르 경, 이분은 플레이어일세.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나?”

“아, 알지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도 모를 이방인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플레이어라고 해도 저는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바하르 경, 자네도 정복자 경의 실력을 알지 않나? 이분 역시 정복자 경 못지않은 실력자일세.”

“하, 정복자 경. 저도 잘 알지요. 세간에서는 정복자 경이 태양신의 대전사가 되리라고 하던데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납니다. 정복자 경이 태양신의 대전사가 된다? 이름만 성기사고 실은 원탁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다니며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는 그치가?”

이든은 저 멍청한 성기사에게 제발 좀 닥치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자존심 강한 바하르가 또 한 번 독설을 뱉어낼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이든은 아직 김창이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을 때 상황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오만한 젊은 성기사의 입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나는 태양신의 대전사가 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카룩스 경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복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안 그런가, 칼잡이?”

저 멍청한 놈은 기어코 김창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든이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으며 한마디 하려고 할 때였다.

“이 새낀 아까부터 듣자 하니까 정복자가 좆으로 보이나.”

지금껏 실실 웃으며 지껄이던 바하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김창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내 말이 안 들렸나? 아까부터 정복자를 무시하던데 걔가 좆으로 보이냐고.”

교양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에 바하르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그 사이에 김창이 말을 이었다.

“여기 정복자가 있었으면 찍소리 한 번 못할 새끼가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그 새끼 나한테 진 좆밥이긴 한데 네가 우습게 볼 정도로 병신은 아니다. 왜, 내가 한 말이 거짓말 같나? 네가 정복자랑 붙으면 진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바하르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쩔 테냐?”

“어쩌긴.”

김창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나와, 새끼야. 한 번 붙자.”

이든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전 안에서 싸움이라니요? 신께서 노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나가자고 했잖아. 신전 안에서 싸우면 안 되면 바깥에서 싸우면 되지.”

무심한 대답에 이든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이 칼잡이는 절대로 자기 말을 무르지 않을 것이고 바하르 역시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싸움은 벌어진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이든이 할 수 있는 건 뭔가? 그냥 둘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두는 것뿐이다.

“······알겠습니다. 그 뜻이 그러하다면야. 그러면 연병장으로 가지요.”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든이 한숨을 내뱉으며 방을 나섰다. 신시아는 여기서 매장결사의 마법사를 지키고 있다고 말하며 혼자 남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이든의 뒤를 따라서 연병장으로 향했다. 신전 안에 웬 연병장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긴 성기사들의 훈련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이든은 혹시나 다른 성기사들이 있으면 어쩌나 했지만 벌써 훈련을 마치고 간 것인지 성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혹시나 남들 다 보는 데서 지게 된다면 바하르의 자존심은 완전히 박살 나게 될 테니까.

“···대련의 입회인은 이든 경께서 맡아주시지요.”

바하르의 억눌린 목소리를 들으며 이든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정정당당한 대결을 보여주리라 믿겠소.”

바하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허리춤의 칼을 뽑을 때였다. 김창이 가만히 보고 있다가 허리춤의 칼을 풀어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걸 보고서 바하르가 미간을 좁혔다.

“···뭐 하는 거냐?”

“보면 모르나? 싸울 준비하잖아.”

자기 무시하는 듯한 대답에 바하르가 으르렁대듯 소리쳤다.

“칼 뽑아! 개짓거리 하지 말고!”

“이거 뽑으면 너 뒈져, 새끼야.”

“뭔 헛소리야! 칼 뽑으라고!”

“내가 칼 뽑으면 너 뒈진다고. 그러니까 그냥 덤벼.”

바하르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신경질적으로 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 소리가 나며 칼이 바닥에 부딪혔다.

“그러면 나도 맨손으로 싸우지! 그래야 이겨도 뒷말이 안 나올 테니까!”

병신인가? 칼 들고 싸워도 나한테는 안 될 텐데 그깟 자존심 때문에 명을 재촉하는군. 김창은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던 이든이 말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겠소.”

이든이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휙 하고 내렸다.

“대련 시작!”

먼저 움직인 건 바하르였다. 그는 무거운 갑주를 입고 있음에도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는데 그게 신성력의 도움 덕분이라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싸우기 전에 뭔가 중얼거리더니 그 몸에서 흰 빛의 가루가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김창은 그걸 비겁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성기사가 신성력을 썼다고 비겁하다는 건 마법사 보고 마법을 쓰지 말라는 것과 같은 소리니까.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덤빈다면 이쪽으로선 오히려 환영이다.

그래야 박살 냈을 때 딴소리가 안 나올 테니까.

“흐압!”

바하르가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김창이 고개를 약간 돌려 공격을 피하자 다음 공격이 빠르게 날아왔다.

건틀릿 낀 주먹은 그 자체로 흉기라 몸에 맞는다면 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김창은 쉬지 않고 날아오는 주먹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기회를 쟀다.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성기사라도 멈추지 않고 주먹질을 할 수는 없었다.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할 셈이냐!”

붕!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차기가 날아왔다. 갑옷을 입고 저런 움직임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저것 역시 신성력 덕분일까.

김창은 두 팔을 교차해서 날아오는 발차기를 막았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선 두 다리가 뒤쪽으로 죽 밀려났다.

공격을 막은 팔이 얼얼했다. 그래도 시큰거리지 않는 걸 보면 어디 부러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거면 됐다. 김창이 교차했던 팔을 내리고 바하르를 쳐다봤다.

“다 때렸냐.”

“···뭐?”

“다 때렸냐고.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때린다.”

바하르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김창이 땅을 박찼다. 바하르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고 두 손을 가슴께 위로 들어 올렸다.

얼굴과 가슴, 어느 쪽으로 공격이 날아오더라도 빠르게 자세를 전환하고 반격까지 이어나가기 위한 자세였다.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김창의 주먹이 날아오고, 그걸 팔등으로 막는 순간 팔 보호대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으니까.

이게 대체 뭔? 망치를 들고 와서 후려친 것도 아니고 주먹으로 쳤는데 갑옷이 찌그러지는 게 말이 되나?

이만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거인의 주먹뿐인데 바하르가 보기에 김창은 그냥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주먹 하나로 갑옷을 찌그러트렸다고? 이게 대체 뭔 일인가?

바하르가 당황하고 있을 때, 김창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의 주먹이 쉴 새 없이 갑옷 위를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갑옷이 찌그러지며 주먹 자국이 그 위에 남았다. 바하르는 한 대 맞을 때마다 뼈가 시릴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질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뭘 어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그건 김창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억지로 틈을 만들어 발차기를 날려보지만 그건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케윽!”

다시 거리를 좁힌 김창이 바하르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고개가 홱 돌아가고 찌그러진 투구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터엉 하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바하르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시야가 흔들리고 똑바로 설 수가 없다.

하지만 안 된다. 이대로 멍청하게 당해버리면······.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하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곧 아래로 쓰러졌다.

어디를 맞았는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리를 얻어맞고 뼈가 부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바하르는 김창이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는 걸 보았다.

태양을 등지고 선 탓에 김창의 얼굴을 새까만 색으로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경전 속에 나오는 사악한 악마의 모습과 같아서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하지만 곧 다시 내뱉어야 했다. 무자비한 주먹이 얼굴을 세게 후려쳤으니까.

“커억!”

바하르가 도망치지 못하게 허벅지로 허리를 꽉 붙잡은 김창은 양손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바하르의 얼굴이 세게 흔들렸다.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 신성력이 흩어지자 바하르의 얼굴은 더는 주먹으로부터 무사할 수 없었다. 커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바하르의 입에서 부러진 이가 튀어나왔다.

피 섞인 침이 입가에 줄줄 흐르고 광대뼈는 부러져 볼품없게 푹 꺼졌다. 다음에 날아온 주먹은 코뼈를 부러트려 콧구멍 안에서 핏물이 흘렀다.

바하르는 피거품을 문 채로 께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김창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피로 질척해진 주먹을 다시 머리 위로 드는 순간이었다.

“그만! 그만하시지요! 이러다 바하르 경 죽습니다!”

김창은 자신을 말리는 이든을 보며 간단히 대답했다.

“이거 맞았다고 사람 안 죽어.”

뭔 개소리야? 이든이 목구멍까지 치민 고함을 억지로 삼켰다. 저 칼잡이에게 괜히 대들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대로 두면 바하르가 정말 죽을 판이라 어떻게든 김창을 말려야 했다. 억지로 끌어내야 하나? 하지만 갑주 입은 성기사를 맨손으로 때려눕히는 놈을 뭔 수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든은 반색했다. 누가 나타난 건진 몰라도 일단 사람이 왔으니 김창을 말리기 더 수월할 것이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날뛰는 칼잡이라도 남들 보는 데서 성기사를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이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곧 어이구 하는 곡소리를 내뱉었다.

성난 듯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은 지금 나타나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 이름은 카룩스다. 신전 제일의 기사이자 또한 정복자의 경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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