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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57화 (5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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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룩스 경······.”

김창을 말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왔지만 이든은 오히려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먼저 갔던 요셉은 왜 아직 안 돌아오는 것이며 저만한 거물은 또 왜 여기에 나타났나?

이든이 알기로 카룩스는 사악한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신전에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호엔으로 간 사이에 벌써 돌아온 모양이었다.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이든이 보기에 카룩스가 와봤자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질 게 분명했다.

“이든 경,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신전의 성기사가 웬 놈에게 맞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으면 당장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카룩스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보여서 이든은 얼른 대답했다.

“아, 카룩스 경. 이 상황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니 잠깐 진정하시고······.”

“네가 카룩스인가 뭔가 하는 놈이냐?”

들려오는 김창의 목소리에 이든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지금 상황 진정시키려는 게 안 보이나? 대체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맞습니다. 그러면 그쪽은 김창이겠군요. 이번에 대악마를 물리쳤다는. 그게 정말이라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위업이로군요.”

카룩스의 어투는 정중했으나 목소리는 싸늘했다. 김창 역시 그걸 못 느꼈을 리가 없건만 오히려 놀리는 것처럼 빈정댔다.

“뭘, 별거 아니었어.”

카룩스가 부득 이를 가는 게 보였다. 김창은 기절한 바하르의 몸 위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아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나? 그냥 보이는 대로야.”

“보이는 대로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내 눈에는 지금 웬 무뢰한이 신전의 성기사를 때려눕힌 걸로만 보이는데요.”

“이건 정정당당한 대결이었다. 비겁한 수를 쓰지도 않았고 오직 주먹만으로 저 녀석을 때려눕혔을 뿐이지. 너는 이런 것까지 비난할 셈인가?”

“정정당당한 대결?”

카룩스가 이든을 쳐다보자 그가 얼른 설명했다.

“바하르 경이 먼저 손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말다툼이 이어지다가 곧 대련으로 승부를 내자는 이야기가 됐지요. 그리고 그 결과가······.”

이야기를 들은 카룩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든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그 말은 전부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잘못한 건 바하르고 김창은 그냥 대결에서 이겼을 뿐이니 카룩스는 그를 처벌해야 할 명분이 없다.

김창의 말대로 이건 정정당당한 대결이었고 바하르는 승부에서 졌을 뿐이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건 성기사로서 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정당당한 대결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심하다고?”

김창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 새끼보다 더 강한 게 죄가 되나? 신전에서는 그런 걸로 죄를 물을 수도 있나? 나로선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카룩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김창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그때도 화를 냈을 건가? 여기 누워서 있는 게 이 새끼가 아니라 나였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니냐고 화를 냈을 거냐고. 내가 봤을 땐 절대 안 그랬을 것 같군.”

카룩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흰 얼굴이 새빨간 색으로 물드는 걸 본 이든은 조용히 침음했다.

김창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태양신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저 태양 아래에서 부끄러울 만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건 대결의 입회인이었던 이든이 입증할 거다. 혹시 이 대결의 결과에 대해서 불만이 있나? 아니면 내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나?”

김창이 바닥에 내려뒀던 칼을 발로 밟아서 위로 튕겨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착 소리가 나게 붙잡았다.

칼자루는 마치 이 상황만을 기다렸다는 듯 주인의 손에 착 달라붙었다. 김창이 칼을 손에 쥐는 순간 그 기세가 너무나 달라져서 카룩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만 있으면 칼 뽑아. 입으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칼로 날 굴복시키라고. 못하겠나? 그러면 입 닥치고 꺼져.”

기어코 내뱉은 도발에 이든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나빠지고 있다.

이대로 정말 대결이 벌어지면? 만약 저 무시무시한 칼잡이가 카룩스의 목이라도 잘라 버리면?

그러면 그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칼 뽑아.”

김창은 무심한 목소리로 카룩스를 압박했다.

“뽑아, 어서.”

카룩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은 천천히 칼자루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 싸움이 벌어지는가? 그러기 전에 얼른 달려가서 누구라도 데려와야 하나? 이든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카룩스의 손이 기어코 칼자루를 잡았다.

큰일이다.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면······.

“이든 경! 여기 있었군! 신시아 경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네! 아니, 바하르 경이 진 건가? 응? 카룩스 경도 여기 오셨습니까?”

요셉의 멍청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칼자루를 세게 움켜쥐고 있던 카룩스가 스르륵 손을 내리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 요셉 경. 오랜만이군요. 여긴 어쩐 일입니까?”

“신전에 귀한 손님이 오셔서 맞이할 사람을 부르러 갔지요. 그런데 여기 뭔 일 있습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이든이 다급히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소, 요셉 경! 그냥 대련 좀 했을 뿐이오. 바하르 경이 좀 다치긴 했는데 별일은 아니오. 그것보다 우리를 부르러 온 거 아니요? 자, 다들 얼른 갑시다!”

“맞네. 소아라 추기경께서 손님을 뵙고자 하시네.”

“다들 들으셨지요? 소아라 추기경께서 우리를 찾으신답니다! 자자, 가시지요!”

카룩스가 김창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군요. 소아라 추기경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니. 김창, 아쉽지만 대결은 다음으로 미루지요.”

새끼, 그냥 도망치는 거면서 뭘 봐주는 척을 하나? 김창은 멋대로 떠나려는 카룩스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야.”

“···야?”

카룩스가 다시 몸을 돌리자 김창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악수라도 한 번 하지.”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카룩스는 천천히 김창에게 다가갔다. 설마 방심을 유도해서 한 대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카룩스가 약간 긴장했으나 김창은 정말 악수를 하려는 것인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는 순간 카룩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한 가지 충고할까.”

잇새로 나오려는 신음을 억지로 참으며 카룩스는 김창의 얼굴을 쳐다봤다. 너무나도 태연한 그 얼굴은 정말 그냥 악수만 하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제법 강한 놈인 건 알겠다. 확실히 신전 안에서 어깨에 힘 주고 다닐 만한 실력이긴 해.”

“큭······.”

“근데 새끼야, 깝치는 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내가 점잖게 말로만 상대하니까 우습게 보이나? 원래 내 성질 같았으면 덤비라고 말하기도 전에 네 머리 날려버렸어.”

카룩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달아오른 얼굴로 입에서 새어 나오려는 끙끙 소리를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그만큼이나 까불었는데 내가 네 머리 안 날려버린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첫째는 너 죽여달라고 돈 받은 게 없어서고, 둘째는 신전의 체면을 봐줘야 해서다. 내 말 알겠나?”

“크읍···.”

“알았으면 가서 정복자부터 넘고 와. 내가 충고하는데, 다음에도 그깟 알량한 실력으로 깝죽대면 그땐 넌 진짜 뒈진다.”

도발적이다 못해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카룩스는 감히 칼을 뽑지 못했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

“···충고,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곧 다시 뵙지요.”

“끝까지 가오 잡지 말고 그냥 알겠다고만 해. 다시 만나긴 뭘 다시 만나. 그땐 진짜 뒈진다니까.”

김창이 휙 하고 손을 털자 카룩스가 휘청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가 얼얼한 손을 반대쪽 손으로 주무르며 큭 소리를 냈다.

“김창 님, 안 가십니까?”

이든이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자 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그 추기경은 어디 있냐.”

“아,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요셉 경? 경은 기절한 바하르 경의 뒷수습 좀 해주겠소?”

“그러지. 그런데 이거 얼굴에 철구라도 맞았나? 얼굴이 왜 이런······.”

“그럼 우리는 가겠소!”

이든이 김창을 데리고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연병장에는 쓰러진 바하르와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셉,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김창의 뒷모습을 보는 카룩스만이 남았다.

* *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이든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아라 추기경님? 이든입니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 안쪽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들어오시게, 이든 경.”

허락이 떨어지자 이든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오래된 나무 냄새가 훅 불어닥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추기경의 방 안은 온통 책장과 책으로 가득했다. 방이 그다지 좁은 것도 아닌데 어디로 눈을 돌려도 책장과 책만이 보이니 그 양이 상당하다는 건 쉬이 알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이든 경. 그리고 그쪽의 손님분도.”

소아라 추기경은 목소리처럼 온후한 외모와 성정을 지닌 늙은 성직자였는데 오른쪽 눈에는 외눈 안경을 쓰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에 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빗어넘긴 모습에서 중후한 매력이 흘러나왔다.

김창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간단히 인사했다.

“김창이요, 칼잡이고.”

“반갑소, 김창. 나는 소아라 테네아라고 하오. 부족한 몸이지만 신전의 여섯 추기경 중 하나이지.”

김창은 별말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딱히 이 사람과 친분을 다지러 온 게 아니었다.

“요셉 경에게 이야기는 들었소. 혼자서 대악마 칼레드리온을 물리쳤다지. 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자세한 이야기는 차라도 한 잔 들면서 하는 게 어떻겠소? 부족한 솜씨지만 차 한 잔 내주겠소.”

“아, 추기경님. 차라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이든 경, 자네도 앉아있게. 여긴 내 방이니 자네 역시 내 손님이 아닌가? 손님에게 차를 부탁할 수는 없을 일 아니겠나.”

이든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여기서 그럴 만한 일이 뭐 있겠나. 그냥 편히 있게.”

원래 편히 있으라고 하면 더 불편한 법이다. 이든은 계속해서 소아라 추기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손님으로 여기 온 김창은 편안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추기경이 차를 다 끓일 때까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구경했다.

어디를 봐도 보이는 건 책이 잔뜩 꽂힌 책장뿐이다. 굉장한 독서광인 걸까? 저 책이 전부 다 신학에 관련된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러면 정말로 책 읽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김창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긴 유일하게 책 말고 다른 게 들어찬 책장이었는데 깃펜이나 잉크병, 편지지나 실링 왁스, 그 외에 기타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인 듯했다.

뭔가 개인적인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란 느낌이라서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책상 위의 웬 물건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혹시 점성술에 관한 취미가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아라 추기경이 찻주전자를 들고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오?”

“저거 점 같은 거 볼 때 쓰는 거 아닌가? 내가 잘은 몰라도 길거리 점술사가 저런 걸 가지고 점 봤던 기억이 있는데.”

소아라 추기경이 도통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김창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이거 말이야. 이거 수정구 아닌가?”

김창이 손에 든 걸 본 소아라 추기경의 안색이 확 굳었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수정구가 맞긴 맞는데······. 점 볼 때 쓰는 게 아니라······.”

“그러면 언제 쓰는 건데.”

“그건 팅게르의 수정구요. 신전의 성물이며 또한 악의 위험이 다가왔을 때 투명하게 변해 위기를 알려주는······.”

이 싸구려 수정구슬처럼 생긴 게 성물이라고? 원래 팅게르의 수정구는 보통 때는 그냥 철구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 생각 없이 집었는데 설마 투명하게 변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투명하게 변했다면 뭔가 위험이 닥쳤다는 뜻 아닌가?

김창이 문득 말했다.

“근데 이거 다른 건 안 보이고 내 얼굴이 비치는데 왜 이러는 거냐? 고장 난 거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이든은 저도 모르게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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