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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59화 (5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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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군. 네가 날 변호해 줄 줄이야.”

김창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정복자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싫어.”

이미 아는 사실을 왜 굳이 말하나? 정복자가 실은 김창에게 호감이 있다고 말했다면 그거야말로 끔찍한 일일 테지만 싫다고 말하는 건 별로 상처가 될 만한 일도 아니다.

김창이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자 정복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살의가 치솟을 만큼 싫어. 가능하다면 길 가다가 트럭에 치이기라도 했으면 기쁘겠는데 여긴 트럭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이건 좀 말이 심한데? 김창도 정복자를 싫어하긴 하지만 트럭에 치이길 기도한 적은 없다. 내 손으로 죽이려고 한 적은 있어도.

“그래서?”

“그런데 내가 굳이 네 변호를 한 건 주제도 모르고 시답잖은 시비를 거는 여기 사람들이 같잖아서야.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놈들이 떼로 덤벼도 네 상대가 안 될 거다. 그런데 뭔 자신감으로 설치나? 하여튼 멍청한 놈들, 어서 빨리 죽어서 태양신 곁으로 가길 원하는 모양이지.”

정복자의 말에 성기사 여러 명이 울컥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겁도 없이 정복자에게 덤빌 만한 배짱을 가진 놈은 없어서 싸움이 벌어지진 않았다.

하여튼 싱거운 놈들. 정복자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릴 때였다.

“말이 심하군요, 정복자 경. 만약 팅게르의 수정구에 나온 대로 저 남자가 악의 화신이 된다면 그땐 어쩔 겁니까?”

어떤 새끼가 감히 겁도 없이 그딴 소리를 지껄이나? 정복자가 눈을 부라리자 한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김창은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구면이라고 할 만큼 오래 알진 않았으나 오늘 한 번 얼굴을 보긴 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카룩스였다. 정복자의 경쟁자이며 어쩌면 태양신의 대전사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카룩스와 정복자, 두 명의 성기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사람은 서열 나누기를 좋아하는 생물이라 적당한 대상만 있으면 경쟁을 붙이려 든다.

그건 카룩스와 정복자를 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신전 제일의 성기사는 누구인가? 태양신의 대전사로서 가장 적합한 것은 누구이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주제를 가지고 입씨름을 했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봤자 결국 직접 붙어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복자가 성기사 노릇에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누가 더 강한지 알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두 명의 성기사가 한곳에 모였으니 과연 오랜 의문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정복자와 카룩스에게 모였다. 카룩스가 투쟁심을 드러내듯 눈을 빤히 쳐다보자 정복자가 말했다.

“넌 또 누구냐?”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까. 정복자라면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카룩스는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카룩스입니다. 당신과 같은 신을 섬기는 자이지요.”

“미안한데 난 신 따윈 안 섬긴다.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그랬어.”

그러면 아까 신에게 기도해서 물어봤다는 건 거짓말이 되지 않나. 소아라 추기경이 입술을 달싹이자 카룩스가 손으로 움직임을 막았다.

“당신이 신을 섬기지 않아도 신께선 당신을 아끼십니다. 넘칠 듯 강렬한 신성력이 바로 그 증거지요.”

“이건 그냥 내가 게임을 오래 해서 그런 거야. 난 게임 서버 처음 열릴 때부터 했거든.”

카룩스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줄곧 가만히 있던 김창이 말했다.

“너 그때부터 게임 시작했냐? 나도 게임 오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오래된 놈이구만.”

“뭐야, 너 나보다 늦게 시작했어? 그러면 인마,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하여튼 건방진 놈.”

“자기보다 늦게 게임 시작한 놈한테 졌으면서 게임 오래 한 게 뭐가 그리 자랑스럽지? 나였으면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할 텐데.”

정복자가 부득 이를 갈면서 철퇴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러다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서 카룩스가 얼른 끼어들었다.

“정복자 경, 아직 제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군요.”

“네가 뭘 물었는데.”

“···저 칼잡이가 정말 악의 화신이 되면 어쩔 거냐고요.”

“어쩌긴 뭘 어째.”

정복자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바로 대답했다.

“바로 머리통 깨버려야지. 나로선 제발 타락했으면 기쁘겠군. 그러면 합법적으로 때려죽일 수 있을 테니까.”

이 새끼가? 김창이 쳐다보자 정복자는 뭘 보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하여튼 좋게 봐주려고 해도 좋게 봐줄 구석이 없는 놈이다.

“자, 그러면 충분한 대답이 됐나? 그러면 우린 이만 돌아가지. 가자, 석구가 기다린다.”

“아니, 그··· 방금 그 말 진심입니까? 머리통을 깨버리겠다고요?”

두 사람은 원탁이라는 같은 조직에 속한 게 아니었나? 플레이어끼린 서로 똘똘 뭉친다고 들었는데 머리통을 깨버리겠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카룩스가 멍해졌다. 정복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타락하지 않더라도 머리통을 깨버리고 싶어. 근데 그러면 원탁에 손해니까 그러지 않는 것뿐이야. 조직이라는 건 체면이 중요한 법이거든. 별 이유도 없이 조직원을 숙청하면 남들이 욕해.”

말하는 꼴이 우습다. 김창이 가볍게 웃고 있자 카룩스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 듯했다.

하기야 고결한 성기사가 막 나가는 깡패의 생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김창이 말했다.

“가긴 뭘 가. 거기 가면 또 며칠 붙잡혀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내 볼일 있어.”

“그래서 안 가겠다고?”

정복자가 눈을 부라리자 김창이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김창은 당연히 정복자가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원래 짜증이 많은 성격에다 자신을 싫어하기까지 하니까.

한석구의 명령 때문에 보기 싫은 얼굴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원탁으로 안 돌아가겠다고 뻗대고 있으니 화가 안 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볼일이라는 게 뭔데?”

그런데 놀랍게도 정복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으며 큰 소리를 낼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의아했다.

김창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들었잖아. 샨토의 검은 탑으로 갈 거다.”

“가서 뭘 어쩌게?”

“가서 시험해봐야지. 내가 정말 악의 화신이 될지, 아니면······.”

······새롭게 신성을 얻을 만한 싸움을 하게 될지. 김창은 그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굳이 알려야 할만한 말은 아니다.

이야기를 들은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도 같이 가지.”

이건 또 뭔 소리인가? 김창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날 왜 따라와?”

“내가 원탁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네가 얌전히 따라올까?”

“설마.”

“그래, 안 그러겠지. 나로선 널 때려눕히고 머리채 잡아서 끌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건 너무 피곤한 일이야. 그러니 그냥 네가 용무 빨리 마치게 도와주고 원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게 더 나아.”

이 자식이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나? 김창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아무리 빨리 일을 끝내도 시간이 제법 걸릴 텐데, 그러면 한석구가 기다려야 하잖아.”

“그건 상관없어. 애초에 석구 녀석이 널 부른 건 그냥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너도 알잖아. 너 붙잡으려고 일부러 용건 있는 척하는 거.”

역시 그런 거였나. 하여튼 쓸데없는 집착이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 이번에 호엔의 영주가 되는 거 아니었나? 영주가 영지 내버려두고 바깥에서 나돌아다녀도 되는 거냐?”

“난 그냥 얼굴마담일 뿐이고 영지 운영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애초에 난 영주 노릇에도 별 관심이 없다고. 하여튼 석구 그 자식, 별 이상한 짓거리를 다 해.”

그건 확실히 동감이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나 따라가려고? 난 너랑 같이 다니기 싫은데.”

“나도 싫어.”

“근데 왜 굳이 따라오는 거냐? 나 도망치는지 감시하려고?”

“그래.”

정복자가 왜 이러는지 알 만하다. 그는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일단 자기가 맡은 일이라면 무조건 완수하려고 한다.

정말 김창이 싫다면 그냥 나중에 꼭 돌아오라고 말만 하면 될 텐데 굳이 따라나서려는 것만 해도 그렇다.

김창의 행동거지가 너무 가벼운 게 문제라면 정복자는 너무 무거워서 문제다.

‘이러면 웬 혹을 달고 다녀야 하는데······.’

정복자를 데리고 다니는 건 김창으로서도 기꺼운 일이 아니다. 원래 던전의 보스를 잡으러 갈 때는 파티를 꾸리는 게 보통이지만 김창은 그럴 이유가 없다.

혼자서 대악마도 죽이는데 파티는 뭔 파티. 정복자가 있다고 해서 뭔가 더 편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불편해지면 불편해졌지.

하지만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으니 그게 문제다. 김창이 흐음 소리를 내는데 정복자가 말했다.

“아까 이름 뭐랬지? 카룩스인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정복자를 향해 카룩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요?”

“나보고 김창이 타락해서 악의 화신이 되면 어쩔 거냐고 그랬지. 그게 걱정이라면 내가 해결해주마.”

해결해주겠다고? 카룩스는 물론이고 소아라 추기경까지 정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이 녀석을 따라가겠다. 그리고 만약 이 녀석이 타락하여 악에 물든다면 내 손수 징벌하도록 하지.”

정복자가 철퇴로 쿵 소리가 나게 바닥을 찍었다. 가볍게 내리친 것 같은데 그 충격으로 바닥에 깐 돌이 깨져 쩍쩍 소리가 났다.

카룩스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정복자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을 믿진 않지만 이 땅의 사는 사람으로서 어떤 게 옳고 어떤 그른지 잘 알고 있다. 타락한 자가 있다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물리쳐야 한다는 걸 알아. 그러니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정복자가 엄숙히 선언했다.

“나, 정복자. 태양신의 불신자이며 원탁의 성기사로서 맹세하겠다. 이 칼잡이가 타락한다면 내 목숨을 걸고 징벌하겠노라고.”

환하게 반짝이는 후광 속에서 악의 징벌을 선언하는 정복자의 모습은 뭇 성기사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어떤 자는 태양처럼 빛나는 후광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기도 했다.

불신자를 보며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걸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아라 추기경조차 그 빛을 감히 비웃지 못했다. 그는 그 어떤 성기사도 저런 위광을 보여주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카룩스조차도······.

“새끼야, 불 꺼. 눈부셔 죽겠네.”

이 자리에 단 한 명, 불신자의 위광에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칼잡이였고 악의 화신이 될지도 모르는 자였다.

그가 툭 내뱉은 말 때문에 빛은 사라졌다.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은 빛이 사라짐에 아쉬워하며 탄식했다.

“···나는 태양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난 반쪽짜리 성기사지만 그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날 믿고 우리를 보내.”

정복자의 말에 카룩스가 할 수 있는 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김창이 떠나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후딱 끝내야 하니까 얼른 가자.”

“가는 데만 해도 며칠은 걸리겠구만 뭘 후딱 끝내?”

“네 혀는 왜 그렇게 자유분방하지? 뽑아달라고 그러는 건가?”

“그러는 네 머리통은 한 대 쳐달라고 달고 다니는 거냐?”

김창과 정복자는 서로 막말을 내뱉으며 신전을 나섰다. 그들이 떠나가는데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점차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카룩스가 소아라 추기경을 향해 말했다.

“어쩌면 저 칼잡이는 타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소아라 추기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정복자 경이 함께 가기 때문에?”

카룩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는 짓거리가 이미 타락한 것과 다를 게 없는데 어떻게 또 타락하겠습니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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