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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창 님!”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복자와 함께 대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던 김창은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기엔 이든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후, 겨우 따라잡았군요······.”
자신을 쫓아온 이든을 보면서 김창이 눈썹을 까딱였다.
“무슨 용무라도?”
“아, 그게 말입니다······.”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숨이 몹시 찼던 이든이 후 하고 숨을 한 번 고른 뒤에 말했다.
“대악마 칼레드리온을 무찌르고서 아직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러 왔습니다.”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확실히 잊고 있던 일이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김창 일행을 그냥 보냈어도 됐을 텐데 굳이 여기까지 달려온 걸 보면 이든이 그 일에 대해 고마움을 크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김창이 말했다.
“주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지. 그래서 뭘 줄 건데.”
“드릴 수 있는 건 많습니다만 아무래도 돈이 나으시겠죠?”
당연한 소리다. 김창이 위험한 적과 싸우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고, 돈을 버는 건 싸움의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별 의미가 없다. 그에게 신전의 성물을 주겠다고 해봤자 그건 그냥 좀 신성한 잡동사니일 뿐이었다.
“대악마를 무찌르셨으니 보상금이 상당할 겁니다. 당장 떠나시는데 그만한 돈을 들고 다니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니 그걸 원탁으로 보내려 하는데 어떠십니까?”
“상관없다.”
“그러면 보상금은 원탁으로 보내두도록 하지요. 그 외에 혹시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김창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글쎄, 말?”
“하기야 그 먼 거리를 직접 걸어가는 건 고역이겠지요. 보상금 일부를 미리 드릴 테니 그걸로 말을 사십시오. 신전에서 말을 기르긴 하지만 그건 성기사들을 위한 거라서 내드리기 어렵군요.”
이든이 금화가 담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안을 열어본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돈이면 말 두 마리는 너끈히 사고도 남을 듯했다. 그가 정복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내가 일해서 받은 돈이니까 네 말은 네가 알아서 사라.”
더럽고 치사한 일이라고 욕할 법도 하건만 정복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말은 왜 사? 혹시 이런 거 할 줄 모르나?”
정복자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빛의 덩어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건 점차 크기가 커지더니 곧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어떤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었다. 길쭉한 다리와 튼튼한 허벅지, 길게 뻗은 목, 흔들거리는 꼬랑지, 그리고 주요 부위를 철갑으로 감싼 거대한 군마.
말의 두 눈은 마치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는데 그 압도적인 위용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사납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말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주인인 정복자가 손을 내밀자 마치 강아지처럼 거기에 머리를 비벼댔다.
“···뭐냐, 이거?”
김창이 멍청하게 묻자 이든이 대답했다.
“사역마입니다.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성기사는 그 힘을 이용하여 전투를 도와줄 사역마를 불러낼 수 있지요. 보통은 작은 새나 사냥개 정도인데 이만큼 거대한 군마를 불러내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과연 정복자 경······.”
이든이 정복자의 사역마를 보며 감탄하고 있자 김창은 배알이 꼴렸다.
아니, 마법사는 차원문을 만들 수 있고 성기사는 사역마를 불러낼 수 있는데 칼잡이는 대체 할 수 있는 게 뭔가?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서 상대 배에 칼침 놔주기? 그건 그냥 동네 건달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원래 게임에서 각 직업은 서로 다른 장단점이 있는 법이지만 칼잡이는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그냥 무난하다는 게 장점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딴 게 장점이면 너무 비참하지 않나.
하여튼 밸런스 망겜 같으니라고. 김창은 칼잡이가 너무 약하니 즉시 상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이제 게임이 아니거니와 게임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안 하는 캐릭터를 상향시켜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뭔가 스스로 재주를 익히는 것뿐이다.
‘잘은 몰라도 신성을 얻으면 신에 가까워진다고 했지. 그러면 반신 정도만 돼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닐까······.’
김창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정복자가 말했다.
“아까 뭐라고? 내 말은 내가 알아서 사라고? 이런 것도 못 하는 놈의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김창은 결심했다.
만약 신이 되면 태양신의 배에 칼빵을 놔주고 그를 믿는 성기사는 죄다 죽이기로.
“···잠깐 기다려.”
김창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구하러 떠났다. 등 뒤에서 정복자가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한참 뒤에 말을 구해서 돌아온 김창이 있는대로 얼굴을 구겼다. 정복자가 등자를 밟고 훌쩍 뛰어서 말 위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모두 말 위에 올라타자 이든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의 여행길에 행운만이 가득하길.”
“고맙다, 이든. 언제 또 볼진 모르겠지만 몸 건강히 있어라.”
이든이 빙긋 웃었다.
“그러면 다음에 또.”
“그래.”
칼잡이와 성기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리를 떠났다. 이든은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신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가는 길은 알고 있는 거야?”
“대충은.”
도시를 나선 김창과 정복자는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쟁적으로 속도를 올렸다. 다그닥다그닥 소리가 나며 말발굽이 거칠게 바닥을 때렸다.
빠르게 달리는 두 마리의 말 뒤로 흙먼지가 마치 흔적처럼 남았다. 바람은 선선했고 햇살은 따스했다.
여행 떠나기에 좋은 날씨였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목적은 여행 따위가 아니었다.
“대충? 너도 나한테 대충 좀 맞아볼래? 대충이 뭐야, 대충이? 길 똑바로 아는 거 맞아?”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여기가 지구처럼 둥글다는 건 안다. 가다 보면 언젠가 나와.”
“···하,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때려도 돼. 감당할 수 있으면 때려.”
참다못한 정복자가 주먹을 날렸지만 김창이 가볍게 피했다. 짜증이 난 듯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다시 날아오진 않았다.
정복자가 에휴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제발 탑에 가서 타락했으면 좋겠네. 머리통 좀 깨버리게.”
“보통 타락하면 더 강해지는 거 아닌가? 지금도 나 못 이기는데 타락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내가 말했지, 다시 붙으면 내가 이긴다고.”
“입으로는 뭔 말을 못하냐.”
“도저히 못 참겠다. 야, 너 내려. 한 판 뜨자.”
물론 김창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어차피 싸워봤자 내가 이길 게 뻔한데 왜 피곤한 짓을 하나?
“내려, 인마. 왜 안 내려? 겁이라도 먹었냐?”
자꾸만 도발하는 정복자를 보며 김창이 생각했다.
저 새끼 저거 하는 짓이 꼭 도로에서 시비 거는 놈 같네. 창문 안 내리고 무시하면 더 발광하며 큰 소리 내는 양아치 같은 놈.
정작 진짜로 차에서 내리면 그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지는 법이다. 그러면 정복자도 그럴까? 여기서 정말 달리던 걸 멈추고 말에서 내리면 그땐 뭔 반응을 보일까.
김창이 혼자 웃더니 말했다.
“한 판 뜨자고? 그거 좋지. 그런데 여기서 말고 저기까지 가서.”
김창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곳에는 작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디 불이라도 난 건 아니고 그냥 굴뚝의 연기인 듯했다.
“···마을?”
두 사람은 신전을 떠나서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다. 하늘도 점차 어둑해지고 바람도 쌀쌀해졌다.
이제 곧 적당한 곳을 찾아서 잠잘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때마침 나타난 마을은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정복자는 흠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저기서 싸우자고?”
“구경꾼 있는 쪽이 할 맛도 날 것 같은데. 그리고 증인이 있어야 네가 나중에 딴소리 못 하잖아.”
“그것도 그렇군. 좋아, 저기서 승부다. 넌 오늘 제삿날인 줄 알아라.”
성기사가 저런 말을 해도 되나? 하기야 정복자는 껍데기만 성기사니 별로 문제될 건 없을지도 모른다.
“마을이 좀 작은데.”
“이런 곳에 있는 마을이 다 그렇지 뭘.”
두 사람은 마을이 가까워지자 천천히 말의 속도를 줄였다. 김창의 말대로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곳에는 여관이 없을 게 분명하니 돈을 주고도 촌장의 헛간 따위를 빌려서 자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쨌거나 천장 있는 집에서 잔다는 건 똑같았기에 정복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천천히 마을을 향해 말을 몰 때였다. 이방인의 접근을 눈치채고 몇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손에 몽둥이 따위를 들고 있었지만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들의 태도가 문제는 아니었다. 상대의 문제였다.
그들이 몽둥이가 아니라 칼을 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김창과 정복자는 전혀 겁먹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떼거지로 덤비더라도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우린 마을을 지나쳐가는 선량한 여행객이다. 혹시 하룻밤 머물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몰려온 사람들을 향해서 김창이 말했다. 본래 선량한 여행객이라고 말하는 놈치고 선량한 여행객은 없는 법이기에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자기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기에 김창은 주머니를 꿈지럭댔다. 이런 놈들에겐 칼을 들이밀거나 돈을 뿌리는 게 유효한데 돈을 뿌리긴 싫었다.
그래서 칼이라도 한 번 뽑으려는데 정복자가 말했다.
“태양신께선 어려운 자를 함부로 내치지 말라고 하셨다. 너흰 감히 신의 가르침을 어길 셈이냐?”
찬란한 후광에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다. 정복자의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한 노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정말, 정말로 태양신의 기사이십니까?”
그 물음에 정복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뭘로 보이나? 태양신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남들을 현혹하는 사악한 자로 보이는가?”
넌 애초에 태양신을 믿지도 않잖아. 김창이 그 말을 억지로 목구멍 뒤로 삼켰다.
촌장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 보잘것없는 자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시길! 저는 이 작은 마을의 촌장이니 신을 섬기는 자를 온 정성을 다해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정복자가 간단히 대꾸했다.
“그럴 것 없다. 우리는 그저 이 마을을 지나쳐가는 것뿐이니. 우리는 그저 잠자리만 있으면 될 뿐이다.”
“허나 어찌 감히 태양신의 성기사께 그러하겠나이까? 우리의 정성을 부디 무시하지 말아 주십시오.”
정복자가 보기에 이 마을은 작다 못해 가난했다. 성기사에게 뭔가를 바칠 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재물이 넘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로, 정말 신앙심이 가득해서 간이며 쓸개며 모두 내주려고 하는 것이거나.
둘째로, 온 재물을 바쳐서라도 성기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나.
정복자는 후자로 판단했다.
“보아하니 내게 도움을 청할 만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게 뭐냐?”
그 말에 촌장이 반색했다.
“아뢰옵기 부끄러운 일이나 감히 저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정복자가 김창을 쳐다봤다. 이들의 부탁을 들어줘도 되겠냐는 뜻이었는데 김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길 떠나서 머물 곳도 없는데 그깟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할까.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뭔 부탁이냐. 말해봐라.”
그 말에 촌장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천사, 천사를 죽여주십시오.”
이런 씹, 뭐? 정복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