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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뭘 죽여달라고 했지?”
정복자가 묻자 촌장이 바로 대답했다.
“천사를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복자가 고개를 돌려 김창을 쳐다봤다.
“천사를 죽여달라는 게 대체 뭔 소리야?”
“뭔 소리긴? 말 그대로 아닌가? 이유야 모르겠지만 천사를 죽여달라잖아.”
천사를 죽이라는 말에 자신이 모르는 뜻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복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되나?”
“뭘?”
“천사를 죽여도 돼? 천사라는 게 내가 아는 진짜 그 천사인진 모르겠지만 정말 그걸 죽여도 되는 거냐고. 정말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서······.”
“악마도 칼 찌르면 죽는데 천사도 죽일 수 있겠지. 보통 악마의 대척에 있는 게 천사잖아.”
“그래, 죽일 수야 있겠지만······.”
정복자가 생각하기에도 천사를 죽이는 것 자체는 가능할 듯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조차 칼로 찌르면 죽일 수 있는 세상인데 천사라고 다를까.
애초에 천상의 신들조차 지상으로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그 목숨을 빼앗는 것도 가능한 세상이었다.
이곳의 역사라고 해야 할까, 원래 게임 설정에 따르면 먼 옛날에 신을 죽인 전사도 있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천사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래도 되느냐 하는 것이다.
“악마를 죽이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걔넨 애초에 나쁜 놈들이니까. 그런데 천사는? 신의 사자인 천사를 죽여도 되나?”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는 정복자를 보며 김창이 코웃음을 쳤다.
“왜, 신을 믿지도 않는 놈이 그런 건 또 무서운 모양이지? 아니면 주제에 성기사라고 알량한 신앙심이 생기기라도 한 거냐?”
물론 정복자에게 신앙심 따위는 없다. 그런데도 이번 일이 꺼려지는 건 천사는 선하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나쁜 놈이라면 얼마든지 때려눕혀도 되지만 천사까지 그럴 자신은 없다. 정복자는 애초에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 따위는 없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천사를 죽이는 건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건 아닌데······.”
정복자가 말끝을 흐리자 김창이 말했다.
“일단 촌장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지. 왜 천사를 죽이려고 하는지 궁금하니까 말이야. 내 생각에는 촌장이 말하는 천사가 진짜 천사는 아닐 것 같다.”
“어째서?”
“이 세상은 개떡 같은 곳이라 대악마가 대악마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곳이다. 당연히 천사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는 놈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런데 그건 이런 작은 마을에서 할 만한 부탁이 아니야. 이 마을이 대체 천사랑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런 부탁을 하겠나? 어떤 사악한 영주가 하면 몰라.”
정복자가 듣기에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천사가 그토록 한가한 것도 아니고 이런 작은 마을에 신경을 쓰기나 할까?
이 마을에 성녀나 선지자 같은 게 태어나서 그걸 축복하려고 오는 일이라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런 거라면 굳이 천사를 죽일 이유가 없다.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 사람들이 뭔가 착각한 건가?”
“이런 작은 마을에 사는 무지렁이들 아니냐. 그냥 빛이 나고 날개 달린 뭔가를 보고 천사라고 생각했겠지.”
“하긴···. 그러면 촌장에겐 내가 물어보지.”
정복자가 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두 사람의 쑥덕거림이 끝날 때까지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자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에 말했다.
“천사를 죽여달라는 이유가 뭐지? 일단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천사가 이 마을을 몰살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죄인이라 부르며 모든 죄를 불로써 씻어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천사가 진짜 천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천사라면 신의 하수인쯤 될 텐데 그런 잘난 존재가 왜 이런 작은 마을을 직접 벌하려 들겠는가?
김창의 말대로 촌장이 주장하는 천사라는 존재는 그냥 날개 달린 무언가일 뿐이리라.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은 알겠다. 하룻밤 머무는 대가로 너희를 지켜주도록 하지.”
“약자를 위해 신의 뜻조차 거스르려 하시다니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생각해보니 성기사가 천사와 싸우는 건 신에게 대적하는 일과 같은 짓이다. 애초에 신앙심 따위야 없으니 별 문제될 거 없지만 그래도 보통 성기사에게 그런 부탁을 하나?
정복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 천사라는 놈은 언제 나타나는 거지?”
“동이 틀 무렵에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찍 자야겠군. 그래야 늦지 않게 천사를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잠자리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작은 마을이라 여관은 없지만 제 집을 빌려드리지요. 좁지만 두 분 머무는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노인의 집을 빼앗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정복자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마을 사람들 대신 싸워주는 일인데 그 정도 대우는 받아도 된다.
“자, 다들 집으로 돌아가게. 여기 이분들께서 천사를 물리쳐주기로 하셨으니 우리 모두는 살아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걸세.”
촌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김창과 정복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두 사람은 촌장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여기가 저의 집입니다. 부디 오늘 밤 편안하시길 바라지요.”
촌장의 말대로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라서 촌장은 다른 마을 사람의 집에서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이건 약소하나마 저희의 성의입니다.”
촌장이 자그마한 주머니를 건넸다. 주둥이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동화와 은화 몇 개가 들어있었는데 솔직히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다.
아마 이 작은 마을에서 낼 수 있는 가장 큰 성의이리라. 정복자가 이건 안 줘도 된다고 거절하려는 순간 김창이 주머니를 받았다.
“감사히 받지.”
정복자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김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촌장이 꾸벅 인사를 하며 집을 나갔다.
“그걸 굳이 왜 받아?”
“주니까.”
“그깟 푼돈 안 받아도 그만이잖아. 돈에 미치기라도 한 거냐? 벼룩의 간을 빼먹을 것도 아니고 그걸 받아서 뭘 하려고.”
“사람이라는 생물은 말이야, 대가 없이 부탁을 들어주면 그게 제 권리쯤 되는 줄 알아.”
“그래서 촌장의 버릇이 나빠질까봐 돈을 받았다고?”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그러면?”
김창이 무심히 대꾸했다.
“필요한 일이니까.”
뭘 위해서 필요한데? 정복자가 물었지만 김창은 대꾸하지 않았다.
“마구간은 없는 모양이군.”
촌장의 집조차 이런 모양인데 마구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김창은 집 뒤에 말을 매어두고 돌아왔다.
정복자는 군마를 신성력으로 되돌려 간편하게 문제를 해결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재수 없었다.
“천사인지 뭔지 하는 건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고.”
“그러지. 혹시나 늦잠 자지 마라.”
내가 애냐?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대충 자리를 잡고 바닥에 누웠다. 바닥은 딱딱하고 집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다는 걸로 만족했다.
천사는 동이 틀 무렵에 오겠다고 했다. 이미 밤이 늦었으니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쳤다고 할 만큼 피곤하진 않지만 내일을 위해선 일단 잠을 자야 했다. 김창과 정복자는 별다른 대화도 없이 눈을 감았고 곧 집 안에서는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몇 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각자의 무장을 점검한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동이 트기도 전인 만큼 아직 바람이 찼다. 불어오는 바람이 싸늘하게 뺨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칼잡이와 성기사는 우두커니 지평선을 보고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두 눈은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의 정수리를 쫓고 있었다. 차츰 세상이 밝아오고 어둠이 자리를 비켰다.
후우 하고 뿌연 입김을 뱉어낸 김창이 문득 말했다.
“생각해보니 아직 천사를 죽여본 적은 없군.”
천사를 죽이면 신성을 얻을 수 있을까? 어쨌건 신성한 놈을 죽였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복자가 대체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그걸 죽여본 적 있는 놈이 이상한 거다. 악마라면 몰라도 천사를 왜 죽여?”
“그럴 만한 일이 생기면 죽일 수도 있는 거지 뭘.”
대체 그럴만한 일이 뭔데? 정복자가 눈을 한 번 흘겼다.
“그 가짜 천사 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글쎄다, 곧 올 것 같긴 한데.”
한 번 터진 대화의 물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야간 근무를 설 때 대화를 하면 시간이 더 잘 가는 것처럼 두 사람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이런저런 잡담을 했다.
본래 서로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님을 생각하면 확실히 상황이 분위기를 만드는 듯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잡담을 하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정수리만 보이던 태양이 이젠 절반쯤 몸을 일으켰다. 반달처럼 지평선 위에 걸린 태양 앞으로 무언가 일렁였다.
그건 분명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런 이른 아침에 마을을 들릴 만한 부지런한 사람이 있을까. 김창은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천사라는 게 하늘에서 강림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네.”
보통 천사라고 하면 환한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법이다. 설마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올 줄은 몰랐던 탓에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짜 천사라서 그런 거 아닌가?”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천사라고 착각한 걸 보면 뭔가 천사다운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거 아닌가? 지금 하는 걸 봐서는 천사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태양을 등지고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모습은 천사라기보다는 그냥 방랑자 같다. 마을 사람들이 대체 뭘 보고 저걸 천사라고 착각했는지 궁금했다.
김창은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로 천사가 다가오는 걸 가만히 기다렸다. 거리가 좁혀지자 천사의 모습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회색 망토를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후드를 눌러 썼다.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절그럭 소리가 나는데 망토 안에 뭘 숨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슬쩍 등 뒤를 보지만 날개 따윈 보이지 않았다. 혹시 숨기고 있는 건가? 필요할 때만 꺼낼 수 있는 거라면 참 편리한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거······.”
정복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천사 하면 떠올리는 빛의 고리나 날개 따윈 없었지만 대신 막대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정복자는 그 자신이 엄청난 양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기에 저만한 양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저게 진짜 천사라고? 천사를 사칭한 괴물 따위가 마을을 습격하려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천사가 마을을 몰살시키려 들었단 말인가?
하지만 왜? 천사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작은 마을에 굳이 왜······.
정복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던 천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을을 잘못 찾아왔나?”
성기사와 천사, 두 존재가 서로를 보며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