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제대로 찾아온 거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당황한 두 사람을 대신해서 입을 연 건 김창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의문의 존재가 김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다짜고짜 죽이진 않으마. 그러면 자기소개라도 좀 할까?”
“···람.”
아무래도 그 짤막한 한 단어가 이름인 듯했다. 참 성의 없이 지은 이름이군.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김창이다. 여기 이쪽은 정복자고.”
람이 두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둘 다 이방인이로군.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난 기이한 존재들. 보아하니 죄인들의 부탁을 받고 이 마을을 지키려는 모양인데, 내 생각이 맞나?”
“그래.”
“어째서지?”
김창은 대답하는 대신에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람은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고 튕겨나간 무언가가 바닥에 꽂혔다.
분명 암기를 이용한 공격이리라 생각했는데 바닥을 내려다보니 거기 꽂힌 건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전이었다.
람은 침묵했다. 저걸 제대로 맞았으면 어디 뼈라도 하나 부러졌을 텐데, 동전을 저만한 위력으로 튕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이 제법 강하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람이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김창이 말했다.
“왜긴, 자식아. 돈을 받았으니까 그런 거지.”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중요한 건 너희들이 날 적대한다는 사실 하나뿐.”
“똑똑하군. 그러면 한 번 붙어볼까, 천사 양반.”
“···천사?”
람이 그게 뭔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날 보고 한 소리인가?”
“그러면 너 말고 여기 누가 있는데?”
“뭔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천사가 아니다.”
천사가 아니라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복자가 말했다.
“그럴 리가? 네 몸 안의 신성력은 일개 인간 따위가 가질 수 있는 양이 아닌데······.”
그 말을 듣고서 람이 웃었다.
“신성력이 많다고 해서 전부 천사인 건 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그쪽 역시 천사여야 하는 것 아닌가?”
정복자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많은 양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만 천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람이라는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뭔가? 인간이 대체 뭔 수로 저만한 신성력을 얻었나? 설마 자신 같은 특수한 경우는 아닐 텐데······.
“보아하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왜 내가 이 마을을 몰살시키러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고.”
람은 단지 돈 때문에 이런 일에 끼어든 김창과 정복자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람이다. 그리고 모르스의 사도이고.”
모르스라는 게 뭔데. 김창은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정복자는 달랐다. 그가 당황한 듯 말했다.
“모르스라면 죽음의 신이 아닌가? 그 신의 사도라고?”
이 세상에는 태양신만이 있는 게 아니다. 대부분 태양신을 숭배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신에 대한 신앙도 있긴 했다.
모르스 역시 여러 신 중 하나였다. 죽음을 지배하며 모든 존재에게 차별 없이 유한의 끝을 선물하는 존재.
그리고 모스르의 사도라는 건 람이 지상에서 제 주인의 뜻을 수행하는 집행자라는 걸 의미했다.
확실히 그런 존재라면 이런 작은 마을의 무지렁이들이 천사라고 오해할 만했다. 사도라는 건 어떤 점에서 천사만큼 신과 가까운 존재일 테니까.
“뭐야, 그런 신도 있었나? 나는 세상에 태양신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정복자는 김창이 지껄이는 멍청한 소리를 무시하며 철퇴 자루를 세게 쥐었다.
“그래, 나는 모르스의 사도다. 또한 죽음의 사슬이기도 하지.”
“···그런 대단한 존재가 이런 작은 마을에는 무슨 일이지? 무자비한 학살로 네 주인을 위한 재롱을 떨 셈인가?”
“무자비한 학살이라니, 말이 좀 우습군. 나는 그저 내 주인을 위해 싸울 뿐이다.”
“저항할 힘조차 없는 약자들을 괴롭히는 게 학살이 아니라면 뭐지?”
“약자라고 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또한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정복자가 어이없다는 듯 허하고 혀를 찼다. 그가 물었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의 죄가 뭐냐?”
“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 경전을 불태우고 흙발로 신의 보금자리를 짓밟았지. 태양신의 성기사여, 정녕 그게 죄가 되지 않나?”
그러니까 이 마을 사람들이 죽음의 신을 모독했다는 소리 같았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마을 사람을 전부 죽이겠다는 건 정복자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주 납득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왜 현실에서도 신성 모독이 어쩌고 하면서 자기 신에 대해서 조금만 나쁜 소리가 나와도 발광하는 작자들이 있지 않은가?
법이라는 게 버젓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광신도들에 의한 테러가 왕왕 벌어지는데, 수틀리면 칼부터 꺼내고 보는 이 개 같은 세상이라고 다를 건 없을 터다.
오히려 심하면 더 심했지 결코 더 나을 일은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기 신을 위해서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려는 람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해하기만 할 뿐 그게 옳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깟 신에 대한 믿음이 뭐라고? 그게 사람 목숨보다 중한가?
경전을 불태우고 신전을 더럽힌 건 좀 심하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람이 웃었다.
“너희들은 고작 돈 때문에 나와 대적하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아니, 없지.”
“그러면 내가 저 더러운 것들을 모두 죽여버려도 할 말은 없겠군?”
람이 손을 뻗어 정복자의 등 뒤를 가리켰다. 거기엔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오해입니다. 전부 오해입니다, 천사님.”
촌장이 다급히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람이 그를 벌레 보듯 쳐다봤다.
“나는 천사가 아니다. 모르스의 사도일 뿐.”
“그러면 사도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전부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라는 거지? 경전을 불태운 것? 아니면 신전의 성상을 부수고 제단을 흙발로 짓밟은 것?”
“···그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껄여봐라.”
람의 허락이 떨어지자 촌장이 말했다.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 그랬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본디 산속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며 죽음의 신을 섬겼습니다. 작긴 하지만 신전도 지었지요. 어느 날 갑자기 태양신의 성기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 역시 끝까지 이어졌을 겁니다.”
촌장이 정복자의 눈치를 흘끔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즉각 개종하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고 했지요. 우리는 그저 가난한 농부일 뿐입니다. 날카로운 칼날을 보고서 어찌 감히 저항하겠습니까? 우리는 살기 위해서 개종해야 했습니다. 개종의 증거로 경전을 불태우고 신전을 무너트려야 했습니다. 사도님, 우린 그저 살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 말에는 사도에 대한 비난도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나타나 죄를 묻느냐?
람이 그걸 몰랐을 리는 없다. 그는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살기 위해서 그랬다고? 그게 죄다. 죽음의 신자가 어찌 살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냐?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태양신의 성기사들이 너희를 위협했다고? 그러면 죽었어야지. 신앙을 간직한 채 죽었어야지.”
이거 개소리가 상당한데.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김창조차 감탄할 만한 헛소리였다.
촌장이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었다.
“···그래서 저희를 죽이기 위해 찾아온 겁니까? 정든 마을조차 내버리고 살기 위해서 이곳으로 도망쳐 온 우리를?”
“너희 같은 버러지에겐 과한 친절이지. 내 분명히 며칠 전 너희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너희는 그것조차 듣지 않았다. 내 말이 우스웠던 거냐, 아니면 믿음을 저버리면서 죽음의 신이 우스워진 거냐? 어느 쪽이든 괘씸하군.”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창은 턱을 가볍게 긁적였다. 뭔 쓸데없는 소리를 이리도 오래 하고 있나?
애초에 대화로 해결될 일 같지도 않은데 얼른 칼 꺼내서 후딱 목 치고 끝내면 될 일 아닌가.
지루해진 그가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릴 때였다. 정복자가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놈이군. 죽음의 신을 믿는 자들은 다 그런가? 죽기 위해서 산다고? 그게 뭔 개떡 같은 소리야. 그러면 여기 사람들이 거기서 죄다 죽었어야 한다는 거냐?”
“그래.”
망설임 없이 나오는 즉답에 정복자가 철퇴 자루를 세게 쥐었다.
“안 되겠다. 너는 오늘 좀 맞자.”
쿵! 무거운 갑옷을 입은 거대한 성기사의 몸이 움직였다. 육중해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정복자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였다.
신성력의 보조 덕분이기도 하고 초인적인 육체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가 머리 위로 철퇴를 크게 들었다가 휙 내리쳤다.
부웅 소리가 나면서 철퇴가 바닥을 으스러트렸다. 람은 훌쩍 뛰어서 뒤로 도망쳤고 박살이 난 바닥을 보고서 흠 소리를 냈다.
“···과연 무시무시한 괴력이로군. 맞으면 머리가 뭉개지겠는데.”
정복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쿵쿵 소리를 내며 람을 향해 돌격했고 또 한 번 철퇴를 크게 휘둘렀다.
붕붕 소리가 나면서 날아오는 철퇴는 과연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공격도 맞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정복자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가 철퇴 자루를 으스러질 듯 세게 쥐더니 흡 하고 기합을 내뱉었다.
“···뒈져라!”
부웅! 철퇴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그저 또 철퇴를 휘두르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람으로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설마 자기 무기를 냅다 던져버리다니? 확실히 거리를 무시하고 날릴 수 있는 공격이긴 하지만 결국 무기를 버리는 셈이 아닌가? 저건 너무 불확실한 도박인데 이제부터는 어쩌려고······.
람은 일단 날아오는 철퇴부터 피하기로 했다. 그가 왼쪽으로 뛰었다가 아차 소리를 냈다.
정복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육중한 몸 자체를 무기로 삼아서 람과 충돌했다. 그건 확실히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람은 컥 소리를 내며 뱃속의 공기를 모조리 토해냈다. 아찔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면을 쳐다보자 어느새 자신은 정복자의 몸 아래에 깔려 있었다.
신성력으로 이글거리는 주먹이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람은 두 눈을 부릅떴다.
“당할 줄 알고!”
정복자는 단지 허벅지로 람의 허리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기에 그의 양손은 모두 자유로웠다. 하지만 저 무식한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람은 오른손을 뻗었고 그 소매에서 차르륵 소리가 나더니 새까만 사슬이 튀어나왔다. 그건 정복자의 주먹을 꽉 붙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슬이 끊어질 듯 부들거렸다. 람은 더 지체하지 않고 왼손을 휘둘렀다.
차르륵! 또 뻗어나간 사슬이 정복자의 목을 졸랐다. 아무리 대단한 성기사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정복자가 끄윽 소리를 냈다.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왼손으로 목을 조른 사슬을 손으로 붙잡았다.
사슬을 부수느냐, 아니면 목이 졸려 죽느냐. 생사의 기로에서 정복자의 신성력이 들끓었다. 따로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등 뒤에서 후광이 번쩍였다.
또한 두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괴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기어코 목에 감긴 사슬을 끊어내더니 왼손으로 람의 얼굴을 뭉개버리려 했다.
“크윽!”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정복자의 몸이 뒤로 홱 하고 날아갔다. 그는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에 벌떡 일어났는데 배를 보니 갑옷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건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갑옷으로서 공성 망치로 후려친 게 아닌 이상 찌그러질 일이 없는 물건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정복자가 눈을 크게 뜨는 가운데 먼지구름 속에서 람이 몸을 일으켰다.
“···과연 강하군. 하지만 나보다는 아니야.”
차르륵!
람이 손을 휘두르자 소매에서 사슬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저게 그가 가진 능력인 듯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사슬을 보고 정복자가 몸 안의 신성력을 끌어내 신성 마법을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사슬이 죄다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것 역시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바닥에 떨어지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격한 싸움 탓에 후드가 벗겨진 람이 미간을 좁혔다. 찡그린 얼굴에서 당혹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쪽은.”
“대충 듣자하니 네가 무슨 신의 사도인가 하는 모양인데.”
김창이 칼 든 손을 늘어트린 채로 람과 마주 보고 섰다.
“그러면 널 죽이면 신성을 줄까?”
그 무심한 목소리에서 람은 죽음의 감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