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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64화 (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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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상처가 깊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생명을 억지로 짜내 말했다.

“···모르스께서 널 지켜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냐?”

“그냥 날 보고 있다는 거 아닌가? 거기에 뭔 뜻이 있어?”

람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뱃속의 공기를 토해내려 해도 입에서 나오는 건 새빨간 피뿐이었다.

“···모든 신은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모르스 역시 마찬가지다. 신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한가한 존재가 아니야. 그 많은 신도 중에서 너 하나만을 지켜본다는 건 신이 네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건 곧 네가 새로운 사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긴긴 말을 토해낸 람이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는 김창이 뭔가 반응을 보이길 바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영 무심했다.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야.”

“······알 바 아니라고? 이 멍청아, 사도가 된다는 건 곧 신명을 받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도라는 건 신을 위해 일하는 무보수 하인 같은 거라는 소리군.”

그 불경한 소리를 들은 람은 정신이 멍해졌다. 별의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이 대체로 신앙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대체 무슨?

아무리 신앙심이 없더라도 사도가 되는 것만으로 많은 권리가 생긴다는 것을 모르나? 람은 자신이 그걸 일일이 설명해줘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에겐 이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잘 들어라. 사도가 되면······.”

“넌 이제 죽을 테니 네 신의 곁으로 가겠군.”

빈정거리는 건가? 람이 잠깐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잘 안 됐다.

“···그래.”

“그러면 모르스인가 하는 놈한테 가서 전해. 날 부려 먹으려면 가서 돈 가져오라고.”

“···돈?”

람이 멍청하게 되묻자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가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싸웠다고 생각하지?”

람은 순간 김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싸우냐고? 돈을 받았으니까.

“너는······.”

“나는 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다 죽든 말든 별 관심이 없어. 내가 무슨 정의의 용사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뭐냐? 사람은 누구나 죽어. 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세상 어딘가에서 지금도 죽어 나가고 있지. 하지만 그들 모두를 구해야 할 책임 따위는 내게 없다.”

눈은 무심했고 목소리는 싸늘했다. 람은 이제야 김창의 본질을 깨달았다.

저 미치광이 놈은 돈을 받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반대로 돈을 받는다면 이유가 무엇이든 받은 만큼 반드시 일한다.

저런 게 자신의 뒤를 이어서 다음 대의 사도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는 하는 게 모르스는 죽음의 신일 뿐 살인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사람을 잘 죽인다고 해서 그 사도가 될 수는 없다.

“가서 네 신에게 전해라. 날 고용하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람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더 뜨고 있을 힘이 없는 탓이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영혼의 시야로 김창의 내면을 쳐다봤다.

신성이 있었다. 싸우기 전보다 훨씬 더 커진 신성이.

“···대가라면 내 신이 이미 지불한 것 같은데.”

“신성 말이냐? 확실히 좀 많이 들어오긴 했는데. 난 또 경험치 이벤트 같은 건 줄 알았지.”

경험치는 뭐고 이벤트는 또 뭔가? 람은 그걸 물을 힘도 없어서 숨만 쌕쌕거렸다.

“마지막으로 충고하지···. 너는 이제 도망칠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어······.”

뭘 도망치고 뭘 숨나? 김창은 무심히 대답했다.

“난 도망치지도 않고 숨지도 않는다.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직접 내려오라고 해라. 따로 줄 건 없고 칼침 정도는 놔줄 수 있으니까.”

대답은 없었다. 람의 숨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끝났군.”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정복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뭔가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내가 사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래, 그거.”

“만약 내가 정말 모르스의 사도가 된다면 어쩔 거냐?”

정복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되면 되는 거지? 내가 그것까지 막아야 할 이유가 있나?”

“상관없다고?”

“상관없지. 죽음의 신이라고 해서 악신은 아니니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는데 그걸 악이라고 할 수 있나?”

정복자가 웃으며 덧붙였다.

“애초에 네가 그 귀찮은 직책을 맡을 것 같지도 않고.”

“그건 그래.”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거기엔 조마조마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다 끝났다. 이 시체는 묻어주든 불에 태우든 알아서 해.”

촌장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김창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정복자가 그 뒤를 따랐다.

“가자.”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이 작은 마을에서 뭐 얻어먹을 만한 게 있나. 차라리 더 큰 마을을 찾는 게 더 나아.”

정복자는 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이 말을 끌고 나오자 정복자도 군마를 불러냈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다시 마을 입구로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 전부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로 그들을 배웅했다.

김창이 대충 손을 흔들고 마을을 떠났다.

“검은 탑까지 얼마나 남았지?”

“글쎄. 잘은 몰라도 며칠 더 달리면 도착할 것 같은데.”

성의 없는 대답에 정복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김창을 믿고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을을 떠난 뒤에 몇 개의 마을을 거쳐 갔다. 거기서 사람들에게 검은 탑까지 가는 길을 여러 번 물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거길 왜 가냐고 진저리를 쳤다.

“거기엔 괴물이 득실거려! 내 친구가 상인인데 그 근처를 지나다가 짐을 홀랑 뺏겼대!”

“내가 듣기로 거기엔 사악한 마녀들이 모여서 집회를 연다던데?”

“그 근처에는 독기가 가득해서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기절한다고 하더군. 충고하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가.”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충고를 들었지만 김창과 정복자는 시큰둥했다. 괴물이 뭐? 마녀가 뭐? 여기엔 괴물과 사람을 가장 잘 죽이는 두 사람이 있다.

“독기 쪽은 좀 신경 쓰이는데.”

“그건 내 신성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보호막 두르면 돼. 아니면 정화 마법을 쓰거나.”

김창은 정복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성기사는 왜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많지? 칼잡이는 그냥 칼 휘두르는 게 다인데.

“뭘 쳐다봐? 시비 거는 거냐?”

“시비는 지금 네가 걸고 있는 거고.”

“내가 뭘?”

“가자.”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을 몰았다. 검은 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달리면 아마 밤중에는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바로 시작할까? 아니면 대충 근처에서 노숙하고 내일 아침에 시작할까?”

“두 명이나 있는데 길게 끌 것 없지 않나. 바로 시작하자고. 탑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걔도 자고 있을 텐데 설마 이 시간에 쳐들어올 거라곤 생각 안 할 거 아냐.”

“하기야.”

하늘이 점차 어둑해질수록 검은 탑과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칠어지고 스산함은 배가 됐다.

바람을 타고 스쳐 가는 공기에선 약간 매캐한 냄새가 났는데 그걸 보면 확실히 독기라는 게 정말 있긴 한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정복자가 뭔가를 중얼중얼 외우더니 자신과 김창의 몸에 빛을 흩뿌렸다. 작게 반짝이던 빛이 사라지고 나자 숨 쉬는 게 한결 나아졌다.

뭔지는 몰라도 그게 신성 마법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김창이 호오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도 제법 쓸모가 있는데.”

“너처럼 사람 죽이는 거 말곤 할 줄 모르는 놈보다야 확실히 쓸모가 있지.”

새끼, 말을 해도 꼭.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 고삐를 세게 흔들었다.

“이럇!”

어두운 밤, 바닥을 때리는 말발굽의 거친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저 멀리서 웬 빛이 보였다.

그건 사악한 자들이 부리는 초록색이나 보라색 같은 이상한 색깔의 빛이 아니라 그냥 모닥불을 태웠을 때처럼 주홍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을 타고 뭔가 맛있는 냄새도 나는 것이 누군가 저 멀리서 야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길을 잘못 들었나?”

정복자의 물음에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저기 검은 탑이 보이는군. 정말 검은색 탑이라서 어둠 속에서 잘 안 보이긴 하지만 탑이 맞긴 맞아.”

“그러면 우리 말고 누군가 검은 탑에 도전하려고 온 건가?”

검은 탑에 대한 소문이 위협적이면 위협적일수록 거기에 도전하길 원하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저런 탑 안에는 보통 보물 따위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기에 돈에 눈이 먼 용병단이 찾아온 걸 수도 있다.

그런 거라면 저쪽에서 탑에 먼저 도전할 권리를 주장할 테니 일이 귀찮아질 게 뻔했다. 이쪽이야 딱히 보물에 별 관심이 없지만 저쪽에선 믿지 않을 테니.

“사람이 제법 많군. 그런데 다들 용병 같진 않아 보이는데······.”

정복자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신성력으로 시야를 강화한 것이었다.

“저쪽에서도 우리를 눈치챘어.”

뭔가를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김창과 정복자는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추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멈추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검은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수정이 박힌 지팡이를 이쪽으로 겨누었다. 마법사인가? 정복자는 남자의 위협을 무시하며 바로 말에서 내렸다.

“그러는 너흰 누구냐? 이 탑에 도전하러 온 놈들이냐?”

“···도전? 검은 탑 말하는 거요?”

“그러면 여기 다른 탑이 또 있나?”

마법사가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을 부르더니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대화는 곧 끝났다.

“우린 검은 탑에 도전하려고 온 게 아니오. 우리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소?”

“저 탑 안에 있을지 모르는 보물이 탐나서?”

“검은 탑 안에는 보물 따윈 없소. 우리의 연구물은 있어도.”

“연구물?”

마법사가 머리에 쓰고 있던 고깔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우린 이드루스 학회요. 마법의 진리를 연구하고 신비를 탐구하는 자들이지.”

그게 뭐지? 마탑이랑 다른 건가? 김창이 문득 물었다.

“마탑 소속인가?”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쫓겨났소.”

“어째서?”

“사악한 마법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흑마법사라는 소리군.”

역시나 제대로 된 놈들은 아니었다. 김창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마법사가 다급히 말했다.

“우린 흑마법사긴 하지만 선량한 흑마법사요! 나쁜 짓도 별로 안 했고!”

“그건 또 뭔 따뜻한 얼음 같은 거냐? 그리고 나쁜 짓을 안 하면 안 한 거지, 별로 안 한 건 뭐야?”

“진짜요! 우린 그냥 마탑에 복수하기 위해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뿐이오! 사람도 얼마 안 죽였고!”

보통은 그걸 나쁜 놈이라고 하지 않나. 사람을 조금만 죽였으면 괜찮은 건가? 김창은 자기 도덕관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래서 너흰 왜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는 거냐? 너무 탑 안에만 박혀 있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나와서 친목 다지기라도 하는 건가?”

“···그럴 리가.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린 탑에서 쫓겨났소.”

“왜?”

마법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웬 플레이어가 나타나서 우릴 다 쫓아냈소······.”

한석구가 들었으면 환장할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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