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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안에 뭐가 있다고?”
김창이 묻자 마법사가 얼른 대답했다.
“플레이어가 있소.”
“그게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지?”
“왜 모르겠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뢰한들 아니오?”
그런 말은 상대를 가려서 해야 할 텐데. 김창은 슬쩍 정복자를 쳐다봤다. 자신이야 플레이어가 욕을 먹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는 아닐 테니까.
원탁의 수호자라 불리는 한석구의 측근인 정복자는 마법사의 발언에 기분 나빠할 게 분명했다.
“무뢰한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마법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별로 화가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대전이 초기 때의 일 때문인 듯했다. 그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던 놈들이 좀 많았던가?
자신이야 그때 설치는 놈 있으면 죄다 죽였지만 정복자는 꼭 살려서 데려왔으니 그 고생이 알만했다.
정복자는 남들 똥 치우는 일을 몇 년 동안 했으니 같은 플레이어라고 해도 모두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그 플레이어는 어떤 놈이지? 이름은 들었나?”
이 세상에 플레이어는 많지 않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플레이어는 모두 원탁 소속이니 대부분은 서로의 얼굴을 알고 지냈다.
원탁의 간부인 정복자는 이름만 들어도 여기서 설치는 놈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마법사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르겠는데.”
하기야 갑자기 쳐들어온 놈일 테니 이름 물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희는 우리가 저 탑에 들어가는 걸 막을 생각이 없다는 거군. 오히려 저 탑 안을 점거한 무뢰한을 쫓아내 주면 고맙다고 여길 것이고.”
“쫓아내 줄 거요?”
“그러려고 온 건 아니지만 어쨌건 저 탑에 용건이 있으니까.”
“고맙소, 정말 고맙소······.”
마법사는 도움에 감격한 것인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김창은 흑마법사가 성기사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는 서로 적 아닌가? 하기야 정복자는 가짜 성기사고 저쪽은 선량한 흑마법사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저 안의 플레이어는 아주 강하오. 그러니 조심해야 할 거요.”
마법사의 충고에 김창과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흑마법사들을 지나쳐 탑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새삼 거대했다. 대체 누가 이런 곳에 탑을 만든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창이 탑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가 나며 새까만 어둠이 그들을 반겼다.
“가자.”
두 사람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갑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랄 만도 하건만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전진했다.
“그런데 의외군.”
정복자가 문득 말하자 김창이 대답했다.
“뭐가?”
“난 분명 네가 대가로 돈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안 그랬잖아.”
“아, 그거.”
김창이 어둠 속을 걸으며 대답했다.
“원래 내가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게 직업인 거 알지.”
“알지. 그래서 내가 너 싫어하잖아.”
“그러면 이번에 돈 받으면 플레이어를 죽여야 하잖아.”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정복자는 그 대답을 듣고서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
이 새낀 그러면 돈 받으면 사람 죽여야 하니까 일부러 안 받았다는 소리인가? 돈 받고 사람 안 죽이는 선택지는 없나?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말이긴 했다. 어쨌건 김창이 이번엔 플레이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셈이니까.
원탁의 간부로서 어떻게든 플레이어를 살려서 데려가야 할 의무가 있는 정복자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뭘 멍하니 있어? 빨리 가자고.”
성큼성큼 걷는 김창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복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역시 저 새끼랑은 친해지지 못할 것 같다.
“잠깐.”
탑 안에선 방향 감각이 이상해졌다. 사방이 어둠이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으니 일단 가고는 있는데 저 멀리서 생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뭐가 있군.”
이런 곳에 사는 생물이 제대로 된 놈일 리가 없으니 분명 괴물일 것이다. 김창이 칼을 뽑으려는데 정복자가 손을 뻗었다.
“괴물 죽이는 건 내 전문이니 내가 하지.”
자기가 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복자가 철퇴를 꽉 쥐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크륵?”
저쪽에서도 이쪽의 접근을 눈치챘다. 정복자는 신성력으로 강화된 눈으로 괴물을 쳐다봤다.
하수도에 사는 쥐를 늑대만큼이나 크게 만든 듯한 괴물이다. 툭 튀어나온 이빨이 기형적으로 길고 발톱 역시 날카롭다.
그런 괴물이 다섯 마리나 모여 있다. 하지만 정복자는 겁먹지 않았다. 그는 자세를 낮추고 돌격 자세를 잡았다.
쿵! 육중한 갑주를 입은 성기사가 한 발자국 내딛자 그건 곧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됐다. 거대한 쥐들 역시 그 소리를 듣고서 몸의 털을 바짝 세웠다.
괴물들은 듣기 싫은 괴성을 내지르며 성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에게 지능이 있었다면 그건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뒈―져―라!”
철퇴를 휘두르자 괴물의 몸이 붕 하고 공중에 떴다. 그냥 뜬 것도 아니고 머리가 박살 나서 뼛조각과 피, 그리고 뭔지 모를 질척거리는 것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동족이 처참하게 죽는 걸 봤음에도 괴물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에겐 공격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쾅! 또 한 번 철퇴가 괴물의 갈비뼈를 부수고 그 몸을 터트려버렸다. 그러면서 정복자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괴물의 몸을 어깨 견갑으로 들이받았다.
그 충격은 기마병의 돌격에 비할 정도였다. 멍청하게 정면에서 달려왔던 괴물은 기다란 이빨이 부러지고 턱이 으깨져 크엑 소리를 냈다.
그 머리 위로 철퇴가 떨어져 두개골이 쪼개졌다.
“크륵!”
남은 괴물들이 정복자에게 달려들어 기다란 이빨로 공격했다. 그러나 그 공격은 별 의미가 없었다.
두꺼운 갑주 위에 두른 신성력은 사악한 것들의 공격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감히 성기사의 갑주를 깨문 대가로 이빨이 부러져야 했다.
콰직! 정복자는 또 철퇴를 휘둘러 괴물의 대가리를 부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달려드는 괴물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길쭉한 혀를 붙잡아 힘껏 당겼다.
“크엑!”
괴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그 거대한 몸이 공중에 떴다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그 충격으로 혀가 끊어지고 몸의 뼈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정복자는 자비롭게도 괴물의 머리를 발로 밟아 으깨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투는 그걸로 끝이었다. 온몸에 괴물의 피를 두른 정복자가 후우 하고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가 철퇴 자루를 어깨 위에 올리고서 고개를 까닥였다.
“가자고.”
김창은 정복자의 싸움을 보고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얜 내가 볼 때 성기사가 아니라 광전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꼭대기는 언제 나오는 거야?”
김창과 정복자는 한참을 걸었다. 그들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서 위로 가는 중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여러 마리의 괴물이 나타났다.
그건 전부 정복자가 때려 부쉈으니 별 위험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봤을 때 탑이 제법 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오래 걸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탑 자체에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아. 바깥에서 보는 것과 실제 내부의 모습이 다른······.”
“그런 것 같다. 어쨌건 할 수 있는 건 오르고 또 오르는 것뿐이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층으로 향했다. 위로 갈수록 괴물의 수는 줄어들지만 대신 더 강한 놈이 나왔다. 그래봤자 정복자의 상대는 되지 않았기에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다음은 10층이군.”
김창은 10층이 마지막 층이길 기도하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천장이······.”
10층에 오르자마자 그들이 본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이 탑 안에는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의 어둠은 사악한 기운으로 만들어진 그런 것과는 결이 달랐다. 태양이 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어둠.
밤하늘의 달이 떠오르고 별빛이 반짝이며 그러면서도 제 색을 잃지 않는 새까만 어둠.
두 사람은 지금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탑의 꼭대기는 막혀 있을 텐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에 서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차르륵 소리가 나며 길고 긴 융단이 깔렸다.
“···우릴 초대하는 건가?”
“여기 있는 놈이 누구인진 몰라도 참 웃긴 놈인 건 확실하군.”
탑의 주인 놀이에 심취했나? 이게 대체 뭔? 김창과 정복자는 어이가 없어서 웃으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깔린 융단 위를 걸었다.
제법 비싸 보이는 융단을 흙발로 밟는 건 아까운 짓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저기 보이는군.”
탑의 주인을 먼저 찾아낸 건 역시나 정복자였다. 그의 두 눈이 신성력으로 이글거렸다.
“웬 의자가 있고 그 위에 있는데.”
조금 더 걷고 나서 김창도 그 모습을 발견했다. 커다란 의자와 그 위에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는 검은 갑주의 기사.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있고 얼굴도 안면 덮개로 가리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테니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이.”
정복자가 불렀지만 검은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오만한 탑의 주인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새끼 저렇게 가오 잡다가 뒈지게 처맞으면 그것만큼 쪽팔린 일도 없는데 이제 어쩌려고 저러나?
김창이 혼자 웃는 가운데 정복자가 또 외쳤다.
“나 정복자다! 원탁의 정복자! 너 괜한 헛짓거리 그만하고 나랑 같이 원탁으로 돌아가자! 지금 돌아가면 석구한테 말 잘해줄 테니까!”
그 말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껏 오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검은 기사가 의자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으니까.
“충고하는데, 괜히 처맞고 가지 말고 그냥 가자! 우린 두 명인 거 보이지? 네가 랭커인 거 아닌 이상 우리 두 명 상대 못 하니까 얌전히······.”
정복자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검은 기사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기 때문이다. 그건 마검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검은 기사가 그걸 정복자를 향해 겨누었다.
“저 미친 새끼······. 기어코 끝장을 보겠다고?”
정복자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철퇴 자루를 세게 쥐었다.
이러면 백기사와 흑기사의 싸움인가? 김창이 남 일이라는 듯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쿵쿵 소리를 내며 돌격하던 검은 기사가 칼을 휘두르며 외쳤다.
“도와주세요! 나쁜 마법사가 절 여기 가뒀어요!”
그 앳된 목소리에 정복자와 김창이 당황했다. 칼 휘두르면서 할 소린 아닌데, 이건 또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