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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방금 뭐라고······.”
정복자가 물었지만 대답 대신 날아온 건 날카로운 칼이었다. 검은색 칼은 누가 봐도 사악한 힘을 담고 있어서 잘못 베이면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야! 방금 뭐라고 했냐고! 대답 좀 해봐!”
크게 외쳤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왜 저러지? 아까 말한 건 그냥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일이었나?
만약 그런 거라면 참 고약한 일이다. 정복자는 입술을 깨물면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막아냈다.
“이 새끼 이거 왜 이래?”
김창이 무심히 대답했다.
“아까 한 말 그대로 아닌가? 나쁜 마법사가 자길 갑옷 안에 가뒀다잖아.”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옛날 전설 같은 것에 보면 사용자의 몸과 마음을 조종하는 사악한 무구 따위가 자주 나온다.
칼자루를 잡는 순간 제 주인을 피에 굶주린 살육자로 만든다거나 악의 화신으로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
그런 걸 생각하면 검은 기사의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나쁜 마법사가 갑옷 안에 가뒀다고? 어떤 병신 같은 놈이길래 마법사 따위한테 당해서······.”
검은 기사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 의지로 저 안에 들어간 건 아니다. 그러면 누가 억지로 집어넣은 거란 소린데 대체 뭔 짓을 하면 이 세상의 마법사한테 당한단 말인가?
원탁의 접수처에서 일하는 서수민만큼 약한 게 아니고서야······.
“일단은 쟤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순간에도 검은 기사는 칼을 휘두르며 정복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공격이 제법 매섭고 날카로워서 정복자도 약간 긴장해야 했다.
“···그래야지. 도와줄 거냐?”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면 안 되고?”
“당연한 것 좀 묻지 마라.”
김창이 어깨를 으쓱이며 칼을 뽑았다. 그는 검은 기사와 정복자의 싸움을 잠깐 지켜보다가 틈이 생기자 바로 달려들었다.
“읍!”
검은 기사의 투구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김창의 칼날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휙 하고 휘두른 칼날이 검은 기사의 갑옷을 베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명검이라도 칼로 갑옷을 자를 수는 없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작게나마 갑옷에 상처가 생기고 그 틈으로 뭔가 검은색 기운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그러자 검은 기사는 마치 진짜 피부에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괴로워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갑옷만 부수면 될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일단 내가 이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할 테니 마무리는 네가 해라.”
정복자는 검은 기사의 움직임을 막겠다는 말을 충실히 지켰다. 원래 게임에서부터 성기사는 적을 끈질기게 붙들어두는데 특화된 직업인데 그 강점은 여기서도 발휘됐다.
아무리 검은 기사가 무기를 휘둘러도 정복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웬만해서는 공격도 하지 않고 검은 기사의 공격을 받아내며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김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갑옷 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마치 독기 같은 게 빠져나갔고 검은 기사는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식으로 몇 분 정도 싸우다 보니 검은 기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누가 봐도 약화 된 상태였다.
“끝내자!”
정복자가 철퇴 자루를 세게 쥐었다. 줄곧 방어로만 일관하던 그가 허리를 크게 돌리며 철퇴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간다!”
붕! 크게 휘두른 철퇴가 검은 기사의 몸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갑옷을 입은 몸이 공중에 떠서 뒤로 날아갈 정도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김창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기사를 보고서 잠깐 당황했다.
정복자 이 새끼, 죽이면 안 된다더니 미쳤나? 이 정도로 세게 후려치는 이유는 뭐고 이걸 나한테 날리는 이유는 또 뭔가?
슬쩍 정복자를 쳐다보자 그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갑옷만! 잘라!”
만화나 애니를 보면 가끔 나온다. 뛰어난 실력의 검사가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옷만 베어내는 장면.
정복자는 지금 그걸 자신보고 하라는 소리였다. 저 자식도 인제 보니 제정신은 아니군.
김창은 픽 웃으며 칼을 들었다. 창작물에 나오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정돈하고 그런 건 필요 없었다.
그냥 칼을 들고 잘라야 할 곳만 자를 뿐이다. 내면에서 넘실거리는 신성의 힘이 그걸 가능케 했다.
날아오던 검은 기사의 갑옷이 칼날 위를 스쳐 지나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빛살이 세로로 길게 내달렸다.
“끝이군.”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진 갑옷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김창은 마치 우화한 번데기처럼 갈라진 갑옷 안에서 끙끙대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역시나 상처는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자신은 정말로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하고 갑옷만 잘라낸 모양이었다.
자신이 했지만 참 신기한 재주였다. 분명 대전이 초기 때만 해도 이런 재주는 없었던 것 같은데.
김창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점차 자신의 몸이 초인을 넘어 반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신성을 얻게 된다면 반신이 되는 것도 멀지 않은 일이리라.
“레벨업 하는 것 같아서 재밌네.”
게임에서 레벨 하나 올랐다고 극적으로 강해지진 않으니 오히려 이게 레벨업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물론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 신성을 얻는 게 더 어려우니 제대로 된 비교는 어렵겠지만.
“휘유, 다친 곳 하나 없이 끝냈군. 그만큼 세게 후려쳤는데 어디 부러진 곳 없는 걸 보니 갑옷이 튼튼하긴 했나 봐.”
정복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창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제정신이냐. 뭘 믿고 그딴 무식한 짓을 해?”
정복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널 싫어하긴 해도 네 실력은 인정한다. 내가 너한테 한 번 깨져봐서 잘 알 거든.”
이 새끼 요즘 왜 이러나? 그래도 얼마 동안 같이 다녔다고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한석구의 생각이 맞았던 걸지도 모른다. 싸운 애들을 일단 붙여두면 언젠가 알아서 화해할 거라는······.
그러면 언젠가 친구가 될 수도 있을까? 그거참 구역질 나는 상상이다.
“쯧.”
김창은 불만스럽게 혀를 찬 뒤에 플레이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얜 뭐냐?”
정복자가 갈라진 갑옷 속에서 플레이어를 꺼냈다. 딱 보기에도 중학생쯤 돼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기절한 듯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이 게임 청소년 이용 불가 아니었나?”
김창이 문득 묻자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행성이나 폭력성 때문에 청소년 이용 불가 판정을 받긴 했지. 하기야 이런 똥겜을 어렸을 때부터 해봐야 교육에 좋을 게 없긴 해.”
“그러면 얜 뭔데 이 게임 하고 있던 거냐?”
“내가 봤을 땐 부모님 주민번호로 아이디 만들어서 몰래 하고 있던 것 같네. 원래 이맘때 남학생들이 그런 짓 자주 하니까.”
“이거 게임 하고 있던 놈이 아니라 계정 주인이 끌려왔으면 웃겼겟는데.”
정복자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확실히, 그건 좀 웃겼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중년 가장이 영문도 모른 채로 이 세상에 끌려왔다고 생각하면 좀 우습다.
그건 어디 소설의 도입부로 써도 될 만한 일 아닌가. 가령 직장에선 사축이었던 내가 이세계에선 무쌍용사? 같은 느낌으로.
물론 이 개 같은 세상에서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 따윈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근데 얜 원탁에서 본 적 없는데. 아무래도 원탁에 가입하지 않고 숨어다녔던 모양이네.”
정복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한석구의 사상에 감화된 것인지 모든 플레이어는 원탁 소속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원래 중학생이면 질풍노도의 시기 아니냐. 이 세상에서 혼자 용사 노릇이라도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지.”
“하여튼 철없는 새끼······.”
정복자가 또 한 번 쯧쯧 혀를 찼다.
“어쨌든 데리고 나가자. 저 바깥의 마법사들한테도 물어볼 것도 있고.”
“마법사들한테? 너 혹시 저 마법사들이 이 녀석을 갑옷 안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 나쁜 마법사가 그랬다며? 쟤네 나쁜 마법사 맞잖아.”
나쁜 마법사가 아니라 선량한 흑마법사인데. 김창은 굳이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쟤넨 너무 좆밥이라서 이 녀석을 억지로 갑옷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게다가 걔넨 갑자기 나타난 플레이어한테 탑을 빼앗겼다고 했는데 그럼 말이 안 맞는 거 아닌가?”
정복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잖아. 거기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안 할 이유가······.”
“과연 그 말대로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였다. 정복자는 김창을 쳐다봤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바깥의 저 얼치기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할 재주가 없지. 저들은 신비를 탐구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전부 다 개소리다. 저들은 그냥 사술에 눈이 멀었을 뿐이니까. 그딴 건 마법이 아니야.”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음색이 낮아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정복자와 김창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갑옷이었다. 이제는 주인을 잃고 반쪽으로 흉하게 갈라진 갑옷. 그게 혼자서 일어나 흉흉한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저거 뭐야?”
“2 페이즈 같은 건가? 근데 갑옷 벗고 더 강해지는 건 봤어도 아예 갑옷이 보스가 되는 건 처음인데.”
정복자는 이 와중에 헛소리를 지껄이는 김창을 한 번 흘겨봤다.
“넌 누구냐! 네가 감히 플레이어를 이 꼴로 만든 거냐?”
“내가 했다면 어쩔 테냐?”
“찾아내서 네 대가리를 부수겠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김창이 놀랐다는 듯 쳐다보자 정복자가 어이없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난 적어도 사람 대가리 부순 적은 없어.”
“아니······.”
무슨 만담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검은 갑옷이 말했다.
“확실히 같은 플레이어라고 해도 격의 차이가 있군. 구하기 쉬운 재료라 일단 넣어보긴 했는데 이 정도로 약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요정이라도 납치해서 넣는 건데. 괜한 낭비만 했구나.”
정복자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물어보지도 않은 거 지껄이지 말고 물음에 대답이나 해. 너 누구냐고.”
“내가 누구냐고?”
형형히 빛나던 안광이 이제는 불타는 것처럼 커졌다. 분명 반으로 갈라져서 이젠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아야 할 갑옷 안에서 거대한 힘이 응축되는 것이 보였다.
힘의 응축과 확산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반응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성난 파도가 해변의 모든 것을 밀어내듯, 거대한 힘의 파도는 사방으로 퍼지며 탑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힘의 여파로부터 김창과 정복자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맞고 뒤로 날아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얼얼한 등을 주무르며 다시 몸을 일으키자 검은 갑옷이 성난 듯 외쳤다.
“들어라! 내 이름은 하이나! 스물하나의 마법을 바꾸고 여덟의 마법을 창조했으며 하나의 비전을 휘두르는 자다! 나는 승천할 자요, 또한 마법의 정수이며 벼락의 주인이다. 너희는 죽어서도 내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복자는 그 길고 긴 자기소개에 얼굴만 찡그렸으나 김창은 달랐다. 승천할 자라고? 그러면 신성을 가졌다는 소리인가?
그가 얼른 말했다.
“그래, 어쩌고저쩌고 하이나.”
“···나는 승천할 자요, 또한 마법의 정수이며 벼락의 주인······.”
“너 어디 사냐. 넌 뒈졌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다짜고짜 죽이겠다는 말에 하이나는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