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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67화 (6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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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왜 죽이겠다는 거냐?”

하이나의 목소리가 떨떠름했다. 이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감히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법사이자 승천할 자인 자신을 죽이겠다니? 대체 뭔 생각으로 그런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나?

“네가 승천할 자니까.”

김창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러나 하이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너······.”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김창은 자신과 같은 승천할 자다. 신성을 가지고 신격에 도전하는.

“하지만 어떻게? 겨우 너 따위가 무슨 수로?”

“어떤 정신 나간 난쟁이 놈을 죽였더니 생겼다.”

“난쟁이?”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었기에 하이나가 침묵했다. 갑옷이 움직임을 멈추고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곧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 숭배자인가? 난쟁이를 시켜 조각 난 신성을 찾아오라고 할 만한 용이라면 하나뿐인데.”

김창은 그게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먼 옛날의 용이 천상에서 훔쳐 달아난 신성은 몇 조각으로 쪼개졌고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아. 그런데 네 몸 안의 신성은 어떻게 그리 많은 거지?”

하이나가 보기에 김창의 신성은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고작 저만한 신성으로 승천할 수는 없겠으나 일개 인간 따위가 가지고 있을 만한 양은 아니었다.

겨우 수십 년을 사는 인간 따위가 신성을 얻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저만한 양이라니? 하이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이것저것 죽이니까 늘어나던데.”

김창의 대답은 항상 간단했다. 만약 여기 있는 게 갑옷이 아니라 하이나 본인이었다면 분명 얼굴을 찡그렸으리라.

“신성을 얻을 만한 위업을 세웠다는 거냐? 뭘 죽였지?”

“대악마랑 모르스의 사도.”

“······농담이겠지?”

“농담인지 아닌지 궁금하나? 그러면 어디 사는지 말해. 가서 칼침 놔줄 테니까.”

원래 같았으면 허세 부리지 말라고 호통을 쳤을 터이나 하이나는 그러지 않았다. 믿기 어려운 일이 항상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미있군. 내 지금까지 여러 명의 승천할 자를 만났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야. 신성을 얻기 위해 다른 승천할 자와 싸우겠다니. 그래, 그 방법이 제일 확실하긴 하지.”

“그러니까 너 어디 사냐고. 남자답게 모든 신성 걸고 한 판 뜨자.”

“난 여자다, 이 멍청한 놈아.”

하이나의 목소리는 중성적이라서 성별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김창은 별로 머쓱 해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네가 여자인 건 안 궁금해. 신성 걸고 싸우자.”

“크큭······.”

하이나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던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며 칼자루를 가볍게 쥐었다.

갑자기 시작된 웃음은 짧게 이어지다가 갑자기 끝났다. 뚝 끊어진 웃음처럼 분위기 역시 극단적으로 싸늘해졌다.

서리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놈. 입에서 지껄인다고 다 말인 줄 알지. 너, 칼잡이야. 똑같이 신성을 가졌다고 해서 너와 내가 같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으며 네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 신성을 걸고 붙어? 이 머저리 같은 놈! 너 따위가 감히 내 신성을 탐내!”

쿠웅! 하이나의 외침과 함께 갑옷에서 강렬한 마력이 방출됐다. 그건 아까 그랬던 것처럼 응축과 확산을 통해 이 공간 전체를 크게 뒤흔들었다.

갑옷조차 그 힘을 완전히 버텨내지 못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고 결국에는 사방으로 쇳조각을 날리며 찢어졌다.

긴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의 분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이었다. 모든 것을 찢고 부수며 또한 소멸시키는.

“빛이여!”

정복자는 다급히 신성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과 기절한 플레이어를 보호했다. 그는 김창에게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고 외쳤으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미처 보호막 안으로 도망치지 못한 김창의 몸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맞고서 뒤로 붕 날아갔다.

이번엔 단순히 벽에 부딪히는 정도가 아니라 벽이 부서지고 그 안에 처박히고 말았다. 아무리 숙련된 칼잡이라도 그런 충격에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크윽 하는 소리와 함께 김창이 억지로 벽에 박힌 몸을 빼낼 때였다.

“나와 싸우길 원하나? 내 신성이 탐나? 그러면 찾아와라! 찾아와서 날 죽여봐라, 이 건방진 칼잡이야!”

그건 목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마력이 공기를 떨리게 하여 만들어낸 사나운 울림이었다. 정복자조차도 그 외침에 약간의 섬뜩함을 느꼈다.

외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이제 남은 건 산산조각이 난 갑옷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 그 안에는 어떠한 마력도 남아 있지 않았고 갑옷은 단순한 고철로 변해버렸을 뿐이다.

하이나는 사라졌다. 정복자는 그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가 흠칫 놀랐다.

‘···내가 쫄았다고?’

온갖 괴물을 상대해온 그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겁을 먹은 적은 없었다. 자신의 몸보다 세 배쯤은 더 큰 괴물과 혼자 싸우더라도 언제나 철퇴로 대가리를 부숴버릴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저 마법사의 진짜 얼굴을 본 적도 없건만 상당한 강자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면 플레이어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아니, 어지간한 플레이어 따위는 하이나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도 플레이어만큼 강한 존재는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다니? 차라리 싸워서 쳐발린 게 낫지, 싸우기도 전부터 꼬리 마는 개새끼도 아니고 이게 무슨······.

정복자가 굴욕감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쥘 때였다.

“씹새끼, 찾아오라더니 집 주소는 왜 안 가르쳐줘? 이거 현피 뜨자 해놓고 끝까지 자기 어디 사는지는 말 안 하는 놈이랑 다를 게 뭐야?”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누그러졌다. 정복자는 혼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김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 나는 몰라도 이 새끼라면······.

“뭘 쳐다봐?”

김창이 묻자 정복자가 픽 웃었다.

“너 본다, 인마.”

“징그럽게 왜 쳐다보는 거지?”

“···넌 진짜 혀 뽑아달라고 그러는 거냐?”

정복자가 짜증을 내자 김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너······.”

정복자가 그답지 않게 김창의 눈치를 흘끔 봤다. 왜 그러는지 알만했다.

“신성이 어쩌고, 승천할 자가 어쩌고 때문에?”

“그래. 그거 대체 뭔 소리냐?”

원래 게임 속에는 신성도 없고 승천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성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승천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신성은 말 그대로 신의 힘이요, 또한 승천은 말 그대로 하늘에 오른다는 뜻이다. 두 단어의 뜻을 생각해봤을 때 신성을 모으면 승천할 수 있다는 걸 추론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번엔 모르스의 사도가 될지도 모른다더니 이젠 신이 된다고?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다.

“뭔 소리긴? 신성을 얻으면 더 강해져. 단지 그것뿐이야.”

“그것뿐이라고?”

“그러면 뭐가 더 있어야 해?”

“승천하면 신이 되는 거 아닌가?”

정복자의 물음에 김창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 웃겨서 웃는 웃음이었다.

“내가 왜 신이 돼야 하지?”

“뭐?”

왜 신이 되어야 하긴? 승천자가 될 수 있다는데 그걸 안 할 이유가 있나? 애초에 신이 되지도 않을 거라면 신성은 왜 모은단 말인가?

정복자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김창이 말했다.

“게임은 언제가 제일 재밌는 줄 아냐.”

“갑자기 뭔 소리야?”

김창이 작게 웃었다.

“게임은 말이야, 좆밥일 때가 제일 재밌어. 클릭 한 번으로 보스 죽이는 만렙 때보다 이리저리 몸 비틀면서 보스 잡는 좆밥 때가 제일 재밌는 법이라고. 왜인 줄 아나?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야.”

“너······.”

“왜 만렙 찍은 애들이 맨날 망겜 타령이나 하겠어? 할 게 없으니까 그런 거지. 걔넨 이제 더는 성취감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게임 접는 거고.”

뜬금없는 소리지만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김창이 왜 신성을 모으는가? 신이 되지도 않을 거라면서 대체 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에게 있어서 누구나 갈망하는 신성은 그저 레벨업을 대신하는 무언가일 뿐이다.

그게 어이가 없어서 정복자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미친놈, 그러니까 신이 되면 만렙 찍는 거랑 다를 게 없으니 일부러 승천하지 않겠다는 거지. 그냥 여기 남아서 애들 더 썰어 죽이려고······.

“···어쨌건 승천하지 않겠다니 다행이네.”

“왜 다행인데?”

설마 내가 신이 되면 배알이 꼴려서 그런 건가? 하기야 원래 사람은 남이 잘 나가는 걸 못 보는 생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너 빠지면 석구가 싫어할 테니까. 걘 모든 플레이어가 원탁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김창이 웃었다. 어이가 없지만 한석구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신이 되어 승천했는데도 모든 플레이어는 원탁 소속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혼자 실실 웃던 김창이 문득 말했다.

“결국 수정구가 말했던 위협은 내가 아니었군.”

“그래, 수정구가 보여줬던 위협은 네가 아니라 그 마법사였어. 하이나인가 하는 놈도 너처럼 승천할 자라고 했지? 그러면 너만큼 강할까?”

정복자는 아니라고 말하길 바랐다. 지금까지 원탁이 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가? 그건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폭력 조직이기 때문이다.

힘의 비대칭이 그들의 권력을 보장했는데 실은 이 세상에 그들만큼 강한 존재가 또 있다면? 그러면 그들의 권력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

“글쎄, 나도 나 말고 다른 승천할 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하지만 강하니까 저렇게 깝죽거리겠지.”

“그래, 그렇겠지······.”

정복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이 말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 일단 저 친구도 데려가야 할 것 같고.”

김창이 말한 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절해 있었다.

정복자가 그를 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을 갑옷 안에 넣은 건 하이나였지?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 그냥 적당한 놈 하나 골라다가 바깥에서 깽판 좀 치라고 그랬던 거겠지.”

“고작 그런 이유라고? 귀한 플레이어를 잡아놓고 하는 짓이 그런 거라니 믿기 어려운데.”

세상에는 플레이어의 강함을 탐내는 자들이 많다. 개중에는 플레이어의 심장을 먹으면 그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도 있다.

꼭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하이나 정도의 실력자라면 플레이어의 강함을 빼앗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어렵게 잡은 플레이어를 다시 세상에 내보냈는가? 그냥 깽판 치는 게 보고 싶어서?

설마 그러려고······.

“뭐 자세한 건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보통 그런 애들은 목에 칼 들어오면 술술 잘 불더라.”

그건 누구나 그래. 정복자가 한숨을 쉬면서 기절한 플레이어 곁에 쭈그려 앉았다.

“야, 일어나.”

짝짝. 가볍게 뺨을 치자 플레이어의 의식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앳된 얼굴의 소년이 으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어, 어어···?”

정복자가 그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정신이 좀 들어? 하여튼 중2병 걸린 애새끼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냐? 가자. 넌 형들한테 맴매 좀 맞아야겠다.”

그건 정복자 나름대로 친근하게 보이기 위해선 한 농담이었으나 소년에겐 아니었다.

원래 그 나이 때 애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우습게 알아도 자기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형들은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법이다.

물론 정복자와 소년의 나이 차이는 열 살도 넘게 날 테지만 그래도 정복자가 무서운 형쯤 되는 나이인 건 확실했다.

게다가 그 형이 온몸에 누구 것인지 모를 피를 덕지덕지 묻히고 씩 웃고 있으니 소년이 느낄 공포는 어떠했을 것인가?

골목길에서 삥 뜯는 일진 형한테 걸려도 이런 느낌은 아닐 텐데 이건 대체 뭔······.

“사, 살려······.”

“왜 이렇게 떨어?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면 형들이랑 어디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할까?”

김창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 친구야. 형들 무서운 사람 아니야.”

칼 들고 그런 말 해봐야 설득력이 없다. 소년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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