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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70화 (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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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화가 난 한석구를 보고서 정복자는 한숨을 내뱉었으나 이정민은 감동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원래 아이는 어디 가서 맞고 오면 부모한테 이르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로 믿는 법이다. 사고는 자기가 치고 수습은 부모가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소리다.

이정민이 용돈 벌려고 쌀먹까지 하던 발랑 까진 놈이든 아니든 그 본질은 결국 중학생 애새끼라 생각하는 건 다른 애들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 그는 지금 자길 위해서 화를 내주는 한석구에게 크게 감동한 참이었다. 아이는 어른을 동경하는 법이고 이정민이 보기에 한석구는 뭔가 대단해 보이는 어른이었으니까.

“왜 화났는지 알긴 하는데, 그래도 가서 난리 치진 마라.”

김창이 무심하게 충고하자 한석구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애가 당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왜? 나는 원탁의 수장이고 모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이정민이 원래부터 원탁 소속이었다면 그 말도 틀린 건 없지. 그런데 아니잖아.”

사실 한석구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민이 당했던 일은 원탁에 가입하기 전에 있었던 일 아닌가?

이젠 원탁 소속이니 인제 와서 복수하겠다고 하는 건 그냥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한석구도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억지를 부리는 이유가 뭔가? 강박 때문이다. 자신이 원탁의 수호자라고 믿는 병적인 강박.

물론 그 강박이 지금의 원탁을 지탱하는 근간이지만 그게 항상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김창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넌 그냥 누구든 때려눕히고 원탁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것뿐이야. 그래야 원탁이 더 안전해지고 그 위상이 올라갈 거로 믿기 때문에. 그건 좀 치졸한 짓 아닌가?”

“너······.”

모욕을 당한 한석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분노를 따라서 마력이 일렁이더니 물뿌리개 안에 있던 물을 전부 증발시켜버렸다.

당장이라도 마법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한석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분노 속에서도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인지했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화를 내되 잡아먹혀선 안 된다. 한석구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말했다.

“···어쨌건 너도 하이나를 죽이러 가는 거잖아. 거기에 내가 손 하나 보탠다고 해서 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한석구는 하이나가 분명 김창의 손에 죽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악마도 혼자서 죽이는 칼잡이한테 겨우 마법사 따위가 상대가 될 리가?

거기에 자신이 있든 말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끼면 안 될 이유는 뭔가?

“야, 한석구! 너 정말 가려고? 그러면 원탁은?”

정복자가 다급히 외치자 한석구가 가볍게 턱짓했다.

“마침 잘됐네. 너 영주 노릇 하려면 행정 업무 보는 것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번에 배우면 되겠어. 기본적인 업무는 수민이가 가르쳐줄 테니까 잘 배우고 있어. 얼마 안 걸릴 거야.”

“야! 제정신이냐? 네가 가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원탁은 나 하나 없다고 무너질 곳이 아니야. 다들 제 역할을 충실히 잘 해낼 거로 믿어.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이번엔 김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이나라고 했던가? 걔 마법사야? 뭐 하는 앤데?”

“아산트 섬의 주인이자 여왕, 그리고 대마법사.”

“하, 대마법사? 걔가 얼마나 강한진 몰라도 나보단 아닐 텐데. 주제에 대마법사가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우습네.”

한석구가 혼자 웃는 걸 보면서 김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연 승천할 자라 불리는 하이나의 마법 실력은 어떨 것인가?

모든 승천할 자가 같은 실력은 아닐 것이고 그 안에서도 격차가 있을 테지만 일단 확실한 건 하이나는 강했다.

그러면 얼마나 강한가? 그걸 이제부터 알아보러 가야 했다. 이왕이면 아주 강해서 신성도 왕창 주면 기쁘겠는데.

김창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러면 이제 가도 되나?”

“지금 말고 내일 가지? 듣자 하니 너도 이것저것 일이 많았잖아. 그리고 우리도 하이나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여러 가지가 있고.”

하긴 김창은 방금 막 검은 탑에서 이정민과 싸우고 온 참이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니 당장 출발해 봐야 타고 갈 배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일찍 가봤자 항구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그냥 여기서 쉬는 게 낫다.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고. 내가 쓰던 방 그대로 있지?”

“물론이지. 너 돌아오면 언제든 쓰라고 그냥 뒀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정복자가 머리를 흔들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구야, 이건 아니잖아······. 이건 진짜 아니야. 김창 쟤가 개인적으로 돈 받고 설치는 것까지는 괜찮아. 쟨 애초에 우리 소속도 아니니 개인의 일탈이라고 대충 얼버무리면 되니까. 그런데 너는 아니야.”

“창이가 왜 우리 소속이 아니야? 쟤도 원탁 소속이야.”

이 와중에 또 헛소리다. 본인이 가입한 적이 없는데 대체 왜 원탁 소속이 되나? 정복자는 한석구의 눈에서 강한 고집을 발견하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네가 아산트 섬으로 가서 하이나를 죽이면 뭔 일이 생길 것 같냐? 하이나는 아산트의 영주야. 주인이라고. 그런 사람을 죽여버리면 아산트가 가만히 있을까? 바로 전쟁이다. 원탁과 아산트의 전쟁이라고.”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이 죽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쩌면 원탁 쪽에서도 사상자가 나올지 모르는데 그건 정복자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참 다행스러운 소리군.”

“···뭐?”

뭐가 다행스럽단 말인가? 전쟁이 일어나는 게? 사람이 죽는 게? 대체 거기에 다행스러울 부분이 뭐가 있나?

정복자가 당황하는 사이에 한석구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 섬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우리 중에 또 새로운 영주가 탄생하는 셈이지. 이번엔 누굴 줘야 하나? 요즘 제법 말 잘 듣는 놈이······.”

미친놈. 그 와중에 땅따먹기 생각만 하나? 정복자는 한석구를 가만히 쳐다봤다. 전에는 원탁의 이익을 우선하긴 해도 이 정도로 막 나가진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런 인간이 되고 말았나?

내가 요새 임무 때문에 바빠서 원탁에 자주 있지 못한 탓인가? 이제 호엔의 영주가 돼서 멀리 떠나면 다음에 만났을 때 한석구는 대체 어떤 모습이 됐을 것인가······.

정복자는 저도 모르게 김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석구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으니 정복자와 생각이 같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 한석구를 말려줄 것이다. 정복자는 마지막 희망에 매달렸다.

“내가 만나본 플레이어 중에 말린다고 듣는 놈은 없더라. 보통 패야 말을 듣던데 그렇다고 내가 얘를 두들겨 팰 수는 없잖냐.”

그 말을 듣고서 정복자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의 말대로 한석구를 흠씬 두들겨 패서 어디 뼈 한두 군데 부러트려 두는 게 아닌 이상 그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원탁의 일원으로서 그 수장을 두들겨 팰 수는 없지 않나? 더군다나 팬다고 얌전히 맞고 있지도 않을 것이고······.

정복자는 그냥 이 일이 전쟁으로 이어지질 않길 빌었다. 머리를 잃은 도시가 얌전히 원탁에 고개를 숙인다면 그것만큼 다행인 일이 없을 텐데.

“일단은 자고 내일 다시 모이지. 다들 아침 먹고 여기서 다시 모여. 정민아? 너는 내가 방 안내해줄게. 형이 제일 넓은 방으로 줄 건데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방 써도 돼. 가자.”

한석구는 마치 잃어버린 동생을 찾은 것처럼 이정민을 살뜰히 아꼈다. 칙칙한 어른들만 있는 곳에 싱그러운 새싹 하나가 솟아난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그 새싹이 애초부터 싹수 노란 놈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우리도 가서 쉬자.”

김창이 먼저 정원을 나서자 정복자가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조용히 뒤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조용히 하룻밤을 보냈다. 김창도 말은 안 했지만 제법 긴 여행으로 조금 지친 상태였다.

침대에 눕자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어떤 강자도 잠을 이길 수는 없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만약 반신이 되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신이 되면 확실히 안 자도 될 것 같은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던 김창은 곧 조용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밤은 짧았고 자야 할 잠은 많았다.

* * *

김창 일행은 어제 약속했던 대로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정원에서 다시 모였다.

“정민이, 아산트 섬과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가 어디지?”

김창은 한석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비볐다. 아직 잠이 부족한 것인지 약간 잠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컵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아주 써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딴 건 왜 마시지? 입맛만 버렸다고 생각하며 찻물을 모두 바닥에 부을 때였다.

“아, 그건 켈보스라는 곳이에요. 거기서 배를 타면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어요. 배는 자주 있으니까 일단 도착만 하면 섬에는 금방 들어갈 수 있을걸요.”

김창이 켈보스의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그러면 차원문이 있어야겠군.”

“차원문 불러올까?”

“차원문 어디 있는데?”

정복자는 두 사람이 자꾸만 차원문 이야기만 하는데 누굴 부르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데려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잠깐 방을 나갔던 정복자가 심민우를 데리고 왔다. 방에 들어온 그는 이정민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인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정민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데 심민우가 말했다.

“절 찾으셨다고요? 또 어딜 가시려고요?”

심민우도 이제 자신을 찾는 목적이 차원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바로 묻자 김창이 말했다.

“켈보스라고 아나? 항구 도시인데.”

“당연히 알죠. 전 순례자들을 따라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 봤거든요. 그쪽으로 열까요? 그런데 거긴 갑자기 왜? 설마 그곳의 특선 생선 요리가 궁금해선 아닐 테고.”

그건 좀 궁금한데. 나중에 가면 먹어봐야지. 김창이 혼자 중얼거리는 사이에 한석구가 대답했다.

“아산트 섬에 가려고.”

“아, 그 섬에 들어가려면 켈보스를 거쳐야 하긴 하죠. 거긴 세 시간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있습니다. 지금 가면 한 시간 정도 뒤에 배를 탈 수 있겠군요. 그런데··· 거긴 왜 가시는지?”

이번에는 김창이 대답했다.

“하이나인가 하는 놈이랑 면담 좀 할 생각이다.”

“아, 김 선생님도 가시는군요? 음, 그러면 좀 곤란한데······.”

내가 간다고 해서 곤란할 일이 뭐가 있지? 김창이 눈썹을 까딱이자 심민우가 말했다.

“아산트 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설명 좀 해드릴게요. 거긴 마법사가 아니면 입도(入島)가 엄청 어려워요. 아산트 섬의 군주인 하이나가 마법사 우월주의자 비슷한 거라서요. 그러니 마법사인 의장님은 상관없지만 김 선생님은······.”

심민우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고 김창이 말했다.

“오러 보여주고 칼에서 빛 뿜어내는 마법이라고 우기면 안 되나?”

“더러운 칼잡이라고 당장 쫓아낼걸요.”

말이 심하네. 김창이 얼굴을 구기자 한석구가 말했다.

“뭔 상관이야? 애초에 싸우러 가는 건데 못 내리게 막든 말든 다 쓸어버리면 되지.”

“그랬다간 섬 전체랑 싸워야 할걸. 아무리 너랑 나라도 그건 좀 어려워.”

“네? 아니, 두 분 섬에 뭐 하러 가는 건가요? 싸운다고요? 왜?”

두 사람은 심민우의 말을 무시하며 저들끼리 떠들었다.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가리고 들어가면?”

“섬의 병사들도 몰래 들어오는 놈 잡는 일에 잔뼈가 굵었을 텐데 그에 대한 대비도 분명 해놨을걸.”

“배에서 내리지 말고 날아서 가면?”

“화살 맞고 죽기 딱이군.”

“제기랄, 역시 그냥 마법 날리고 뛰쳐 들어가는 게······.”

김창과 한석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이정민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저기······.”

김창이 이정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섬에서 안 쫓겨난 거냐? 너 그때 싸우는 거 보니까 마법사는 아닌 것 같던데.”

“전 마검사라 괜찮아요.”

그런 것치고 마법은 별로 안 쓰던데. 어쩌면 갑옷 때문에 힘의 제약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왜?”

“꼭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섬에 들어갈 방법은 있어요. 누군가 신분을 증명해주면 돼요. 문제는 신분을 증명해주는 그 사람 자체가 귀한 신분이어야 한다는 거죠. 고위 귀족이나 왕족, 그도 아니면 고명한 사제 같은 사람이요.”

그러면 신전에 가서 카룩스를 데려오면 안 되나? 걔만큼 이름난 성기사가 어디 있다고.

김창이 남몰래 카룩스를 납치할 생각을 하는 동안 한석구가 말했다.

“칼라드 영주는 안 되겠지? 그 사람은 귀족이긴 해도 겨우 남작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누구를 데려가지?”

역시 카룩스 납치뿐이다. 김창이 제 생각을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럴 땐 제 도움이 필요하겠군요.”

부스럭. 잘 다듬어진 나무 사이로 누군가 나타났다. 그건 늘씬하면서도 단련된 몸을 가진 요정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잘난 척하는 듯한 얼굴이 마음에 안 들게 생겼다.

“어떠십니까, 제 도움을 받아서 섬에 들어가는 건?”

“너······.”

김창이 요정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오랜만입니다. 저 티샬레, 오늘 드디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군요.”

얜 또 뭔데 여기서 나오지? 김창이 물끄러미 티샬레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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