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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에요! 우린 아는 사이라고요! 저 사람들도 같이 잡아가요!”
혼자만 잡혀갈 수는 없었던 티샬레가 다급히 외치자 마법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김창과 한석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모르는 요정인 것 맞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마법사의 손에서 마력이 탁탁 소리를 내며 튀었다. 그걸 본 티샬레는 한석구가 분명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별 대단치도 않은 놈이 어딜 감히 마법으로 협박하나?
티샬레는 한석구가 저 마법사를 마법으로 날려버리길 기대했다. 그리고 격의 차이를 똑똑히 알려주길 원했다.
“이거 어쩔 수 없군.”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석구는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사실 우리도 일행 맞아. 그러니 잡아가려면 같이 잡아가.”
티샬레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저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나?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왜 싸우지 않고 순순히······.
다급히 김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누가 누굴 잡아가느냐고 당장 칼부림이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그래, 괜한 잔꾀를 부리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드는군. 그래도 너희는 목숨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거다. 샤카리오네의 싸움에 직접적으로 끼어든 게 아니니까.”
“그거참 기쁜 소리군. 아산트 섬의 주인에게도 우리 이야기 좀 잘해달라고.”
한석구가 능글맞게 웃는 걸 본 티샬레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랐다.
“곧 항구에 도착한다!”
영문 모를 상황 속에서도 배는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바람 마법 덕분에 항구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선원들이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에 김창 일행은 구속 상태로 구석에 갇혀 있었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고 그저 가만히 바다며 하늘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티샬레가 몸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저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시겠죠? 그 왜 혼자서 얌전히 잡혀갈 것이지, 괜히 소리쳐서 다 같이 잡혀가게 만들어서 화가 났다던가 그런······.”
한석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창도.
‘차라리 화라도 낼 것이지. 저 인간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게 더 무섭다고······.’
티샬레는 겉으로는 의연한 척을 하면서도 속으론 울상이 되었다.
“모두 내려라!”
처음의 그 마법사가 김창 일행을 데리러 왔다. 이번에도 순순히 명령에 따른 그들은 마법사를 따라서 아산트 섬에 들어섰다.
“이쪽이다! 얌전히 따라와!”
본래 아산트 섬에 들어가기 위해선 엄격한 입도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그들은 심사로부터 면제됐다.
물론 긍정적인 일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범죄자라서 신분을 증명하고 말 것도 없었을 뿐이다.
“여기가 아산트 섬인가? 제법 크네. 성벽도 제대로 만들었고 농사지을 땅도 많아 보여. 확실히 차원문 마법만 차단하면 뚫기 힘든 요새가 되겠어. 흠, 식수 같은 건 마법으로 해결하는 건가? 마법사 몇 명 정도는 살려둬야겠는데.”
마법사를 따라서 섬 안으로 들어간 한석구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선 안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뒤따르던 티샬레가 물었다.
“이 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요?”
“당연히 많지. 나중에 우리가 먹을 섬인데.”
뭘 먹어? 티샬레가 당황하며 되묻자 한석구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하이나가 죽고 나면 이 섬의 주인이 없어지는 셈이잖아. 그리고 주인 없는 물건은 줍는 사람이 임자고. 그러니까 우리가 먹겠다는데 무슨 문제 있나?”
문제가 없나? 물론 문제가 없긴 하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하이나가 이 세상의 위협이 되기 때문에 제거하러 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그냥 이 땅이 탐나서 그런 거였나?
어쨌거나 결과는 좋았으니 상관없다고 치기엔 그 목적이 너무 불순하다.
“거기 뒤에서 뭘 수군거리고 있어? 빨리 따라오기나 해!”
신경질적인 마법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창 일행은 도시 안을 걸었다. 대마법사인 하이나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해서 뭔가 신기한 게 많을 줄 알았는데 도시의 모습은 다른 곳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건물은 튼튼하고 도로는 깨끗했다.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치고 먹을 게 부족해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이나가 제법 섬을 잘 다스리고 있는 걸까?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김창은 이 도시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법사의 뒤를 따라서 걷다 보니 위화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게 대체 뭘까?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을 지나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길거리에 사람이 너무 적은데.”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한석구가 말했다.
“그냥 적당히 있는 것 같은데?”
“아니, 확실히 적어. 도시 규모를 생각하면 길거리에 사람이 이만큼 있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이만한 숫자로 도시를 어떻게 유지해?”
“도시 규모를 크게 지은 건 하이나가 자기 권위를 뽐내려고 그런 거고, 적은 숫자로도 도시를 유지하는 건 마법의 힘을 빌린 건가 보지 뭘.”
“내가 마법에 대해선 잘은 몰라도 마법이 그 정도로 만능이 아니라는 건 안다. 이 정도 숫자의 사람으로 이만한 규모의 도시를 유지하려면 마법사들이 쉬지도 않고 매일 같이 일해야 할 텐데,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러면?”
김창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건물 아래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작은 꼬마 하나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도망쳤다.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을 갈아 넣고 있는 거군. 소수의 마법사가 풍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수의 일반인이 피와 땀을 짜내고 있는 거야.”
그 말에 한석구의 얼굴이 굳었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서 길가의 사람들을 쳐다보니 그들은 확실히 일반인치고 이상할 정도로 마력이 많았다.
그러니 저들은 평범한 농부나 어부 따위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디를 쳐다봐도 마법사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거나 옷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도시가 돌아간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은 어둠 속에 숨어서 소수의 마법사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거라면?
“···이거 아주 씹새끼였네. 나도 내가 좋은 영주라고는 말 못 해도 이딴 짓은 안 하는데.”
한석구가 부득 이를 갈자 티샬레가 조용히 말을 붙였다.
“하이나는 지독한 마법사 우월주의자입니다. 그녀는 자기 섬에 마법사가 아닌 존재가 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해요. 그러면서도 마법사들의 일을 대신해줄 사람은 필요로 하죠. 그래서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을 빈민가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만 살게 했습니다. 매일 같이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게 하면서요. 그건 확실히··· 씹새끼가 맞아요.”
티샬레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하이나의 악행이 도를 지나쳤다는 뜻이다. 김창은 혼자서 흠 소리를 냈다.
여기엔 그냥 신성이나 얻을 겸 해서 온 건데 본의 아니게 정의의 용사 노릇을 하게 될 판이다.
“딜런 님, 오셨습니까?”
저들끼리 한참 수군거리다 보니 어느새 영주궁에 도착했다. 대마법사인 하이나의 거처답게 웬만한 대영주의 것 이상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아무리 마법이 대단해도 저만한 건물을 마법만으로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 건물을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됐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에 별일은 없었고?”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저들은?”
영주궁 입구를 지키는 마법사가 묻자 딜런이라는 마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죄인들이다. 자세한 건 묻지 말고.”
“알겠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마법사도 더 캐묻지 않았다. 딜런은 김창 일행을 데리고 영주궁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봐도 화려한 건물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훨씬 더 화려했다. 과연 승천할 자답게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칼라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한석구조차 원탁의 건물을 이만큼이나 화려하게 짓진 않았다.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칼라드의 경제가 휘청거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하이나가 얼마나 자기 백성들을 쥐어 짜냈는지 짐작할 만했다.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네······. 자기가 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뭔 건물을······.”
한석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리자 티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딜루키둠 가문의 저택도 이 정도는 아닙니다. 확실히 이건 좀 과하네요.”
한석구와 티샬레가 떠드는 소리에 딜런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까부터 뭘 자꾸 수군거리는 거야? 침묵 마법이라도 걸어줘? 아니면 혀라도 뽑을까? 좀 닥치고 따라와!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별······.”
한석구가 뺨을 움찔거리면서도 그 말에 성실하게 따랐다. 티샬레는 이 남자가 이 정도로 인내심을 짜내는 걸 처음 봤다.
“딜런 님, 여긴 어쩐 일로···?”
지하 감옥에 도착하자 간수 역시 당연하다는 듯 마법사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딜런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새로운 죄인들이 들어왔다. 빈방에 대충 넣어둬. 어차피 곧 죽을 놈들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간수가 문을 열기 위해 허리춤에 찬 열쇠 꾸러미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김창이 문득 말했다.
“아까부터 보니까 댁이 여기서 좀 높은 위치인 것 같던데, 맞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딜런은 선선히 대답했다.
“뭐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건 맞지. 난 영주궁 안의 마법사들을 총괄하는 수석 마법사니까. 혹시나 내게 잘 보여서 죗값을 깎아보려는 거면 그만둬라. 어지간한 잘못이라면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잘못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수준이니까.”
“수석 마법사가 얼마나 잘난 놈인지는 몰라도 제법 권력이 있는 놈인 건 알겠군. 그러면 널 인질로 잡으면 하이나도 당황할까?”
“···뭐?”
“한번 해보자고.”
딜런이 당황하는 것과 동시에 김창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마법이 깨졌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석구와 티샬레 역시 쨍그랑 소리가 나며 구속 마법이 깨지고 말았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컥!”
한석구가 손을 휘둘러 간수를 날려버리고 김창이 딜런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끔찍한 고통에 몸이 축 늘어진 딜런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김창이 팔로 목을 꽉 졸랐다.
너무 졸라서 죽으면 곤란하니 적당히 힘조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서 티샬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러려고 얌전히 붙잡힌 거였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갑자기 머리가 휙 돌아서 착해지기라도 한 줄 알았나 보지.”
“아니요, 설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단호한 대답에 김창이 눈을 흘겼다. 그가 딜런의 몸을 질질 끌고 1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지하에 잠깐 있었을 뿐인데 햇살이 눈 부셨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햇살에 적응하고 나니 마침 지하 감옥 입구를 지나치던 마법사 세 명이 자신을 보고 경악한 얼굴을 한 게 보였다.
김창은 침착하게 말했다.
“뭘 봐. 인질극 처음 보나? 이 새끼 죽는 꼴 보기 싫으면 가서 하이나 데려와.”
하는 품이 능숙한 게 한두 번 해본 것 같지가 않다. 티샬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